■ 본문 유 상서(劉尙書)가 역마를 타고 서울로 올라오다가 서주 땅을 지나가게 되었다. 상서는 교 씨의 일을 알아보려고 일부러 며칠 동안 그곳에서 머물렀다. 그리고 하인 여러 명을 주막으로 보냈다. 곧 ‘교 씨가 냉진을 따라갔다가 냉진이 죽은 후 창기(娼妓)가 되어 그곳까지 온 실상’을 자세히 알아보게 하였다. 이윽고 상서는 매파(媒婆)를 불러 많은 상금을 하사하고 그녀에게 일렀다. “조칠랑을 만나 이러이러하게 이야기하거라.” 매파는 즉시 떠나 교 씨를 만났다. “지금 예부 최 상서(崔尙書)께서 천자의 부름을 받고 서울로 올라가시는 길이라네. 이곳을 지나가다가 칠랑의 명성을 듣고 그대를 취하여 소실(小室)로 삼았으면 하시네. 상서는 당조(當朝)의 이름난 재상이지. 연세는 마흔이 채 되지 않았으며 집안도 ..
■ 본문 술법 높은 학대사는 괴이한 꾀 나는지라, 동자 시켜 짚 한 단을 끌어내어 허수아비 만들어 놓고 보니 영락없는 옹고집의 불측한 상이렷다. 부적을 써 붙이니 이놈의 화상, 말대가리 주걱턱에 어디로 보나 영락없는 옹가였다. 허수아비 거드럭거드럭 옹가집을 찾아가서 사랑문 드르륵 열며 분부할 제, "늙은 종 돌쇠야, 젊은 종 몽치, 깡쇠야, 어찌 그리 게으르고 방자하냐? 말 콩 주고 여물 썰어라! 춘단이는 바삐 나와 발 쓸어라." 하며 태연히 앉았으니, 이리 보나 저리 보나 분명한 옹좌수였다. 이 때 실옹(實擁哥)가 들어서며 하는 말이, "어떠한 손이 왔기로 이렇듯 사랑채가 소란하냐?" 허옹가(虛擁哥)가 이 말 듣고 나앉으며, "그대 어쩐 사람이기로 예 없이 남의 집에 들어와 주인인 체하느뇨?" 실옹가 ..
■ 본문 허생은 묵적골〔墨積洞〕에 살았다. 곧장 남산(南山) 밑에 닿으면, 우물 위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은행나무를 향하여 사립문이 열렸는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글 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가난하면서도 실생활을 등한시하는 허생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과거(科擧)를 보지 않으니, 글을 읽어 무엇합니까?” 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독서를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 “그럼 장인바치 일이라도 못 하시나요?” / “장인바치 일은 본래 배우지 않은 걸 어떻게 하겠소?” / “그럼 장사는 못하시나요?” / “장사는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 처..
■ 본문 하루는 막 씨가 일만 가지 시름을 띠고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한바탕 음산한 바람이 일어나며 초막 밖에 한 사람이 서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 사람은 곧 삼랑이었다. 막 씨가 놀라서 묻기를,“그대가 나를 버리고 나간 지 거의 수십 년이라. 간 곳을 몰라 의심하고 염려하는데 신령이 이르기를 난중에 죽었다 하매 꿈을 믿을 것이 아니로되 역력히 들었으므로 영연(靈筵)*을 배설*하였는데 의심컨대 살아 서로 보는 것입니까? 어찌 깊은 밤에 거취가 분명하지 아니합니까?” 삼랑이 목이 메어 이르되,“과연 그대의 덕을 모르고 탕자의 마음을 걷잡지 못하여 그대를 박대한 죄로 하늘이 내린 재앙을 받아 난중에 죽으매 후천에 가도 또한 죄인이라. 깨달으나 가히 미치지 못할 바이오, 귀신의 무리에도 참례하여 섞이지 못..
■ 본문[앞부분 줄거리] 명나라 선비 이주현의 부인이 어느 날 큰 별이 방 안에 떨어졌다가 황룡이 되어 승천하는 꿈을 꾸고 잉태한 뒤, 18개월 만에 아들을 낳아 경모(아명:경작)라고 이름을 짓는다. 경모는 어려서 부모를 잃은 뒤 남의 집에 머슴살이를 하며 떠돌아다니다가 퇴임 재상 양 승상의 눈에 띈다. "내 여서를 헤기로 병이 일웠더니 금일 영웅을 얻어 동상을 허하였으니 여아의 재덕을 저바리지 아님이라. 어찌 기쁘지 아니리오." 부인이 역희 왈, / "영웅을 가리었다 하시니 아지 못게라. 뉘집 자녀며 문미 어떠하니잇가?" 공이 가로되, / "인품을 볼지니 어이 문미를 이르리오." 하고 인하야 경작의 일을 이르니, 부인이 안색이 여토하야 돈족 대경 왈, "다시 이르지 마르소서. 경주는 이계궁의 모란이오,..
■ 본문청보양반 소년(少年) 당상(堂上) 아해(兒孩) 도령 좌우로 늘어서서 말 잡아 장고(長鼓) 메고 소 잡아 북 메고 안성(安城) 마치 캥수 치고 운봉(雲峰) 내기 징 치고, 술 거리고 떡 치고, 홍문연(鴻門宴) 높은 잔치 항 장군 이 칼춤 출 때 마음이 한가(閑暇)하여 석상(石床)에 비기 앉아 고금사(古今事)를 곰곰 생각할 때, 어데서 응 박 캥캥하는 소리 양반이 잠을 이루지 못하여 나온 짐에 말뚝이나 한번 불러 보자. 이놈, 말뚝아─어릿광대 일동(젓양반 · 갓양반 · 초란이) (제각기) 말뚝아, 말뚝아,청보양반 쉬─ (말뚝아 부르면서 흥청거리는 어릿광대들의 면상을 탁탁친다.)어릿광대 일동 (제각기) 아야, 아야. 굿거리장단이 나온다. 음악에 맞추어 덧배기 춤을 모두 어울리어 한바탕 춘다. 청보양반 ..
■ 본문 화왕(花王)께서 처음 이 세상에 나왔을 때, 향기로운 동산에 심고, 푸른 휘장으로 둘러싸 보호하였는데, 삼춘가절(三春佳節)을 맞아 예쁜 꽃을 피우니, 온갖 꽃보다 빼어나게 아름다웠다. 멀고 가까운 곳에서 여러 꽃이 다투어 화왕을 뵈러 왔다. 깊고 그윽한 골짜기의 맑은 정기를 타고난 탐스러운 꽃들이 다투어 모여 왔다.▶화왕의 내력 문득 한 가인(佳人)이 앞으로 나왔다. 붉은 얼굴에 옥 같은 이와 신선하고 탐스러운 감색 나들이 옷을 입고 아장거리는 무희(舞姬)처럼 얌전하게 화왕에게 아뢰었다. “이 몸은 백설의 모래사장을 밟고, 거울같이 맑은 바다를 바라보며 자라났습니다. 봄비가 내릴 때는 목욕하여 몸의 먼지를 씻었고, 상쾌하고 맑은 바람 속에서 유유자적(悠悠自適)하면서 지냈습니다. 이름은 장미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