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비자반(榧子盤)* 일등품 위에 또 한층 뛰어 특급품이란 것이 있다. 반재며, 치수며, 연륜이며 어느 점이 일급과 다르다는 것은 아니나, 반면에 머리카락 같은 가느다란 흉터가 보이면 이게 특급품이다. 알기 쉽게 값으로 따지자면, 전전(戰前) 시세로 일급이 2천 원(돌은 따로 하고) 전후인데, 특급은 2천4, 5백 원 —, 상처가 있어서 값이 내리는 게 아니라 되레 비싸진다는 데 진진한 묘미가 있다. 반면이 갈라진다는 것은 기약지 않은 불측의 사고이다. 사고란 어느 때, 어느 경우에도 별로 환영할 것이 못 된다. 그 균열의 성질 여하에 따라서는 일급품 바둑판이 목침감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큰 균열이 아니고 회생할 여지가 있을 정도라면 헝겊으로 싸고 뚜껑을 덮어서 조심스럽게 간수..
1. 본문 [앞부분 줄거리] 산간벽촌의 동막골 부락민들은 국군인 현철과 상상이 전하는 전쟁 발발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국군과 미군 조종사, 그리고 부락민이 함께 있는 촌장의 집으로 인민군 낙오병 치성, 영희, 택기가 들어닥친다. S#22. 조종사 누워 있는 방 N. / INT 갑자기 소란스러워진 밖이 궁금한 조종사, 부상당한 몸을 간신히 움직여 머리로 문을 밀어낸다. 겨우 열린 틈으로 밖을 내다본다. “저건 또 뭐하는 짓들이지?” 평사 위에 부락민들이 죽 올라서 있는 이상한 행동을 보며 머리를 갸웃거리는 조종사. S#23. 다시 촌장 집 마당 N. / EXT 부락민들 사이사이로 간간이 보이는 적군의 모습들. 싸늘한 기운이 흐르고……. 영희 (겁에 질린 투로) 상위(上尉) 동지……. 아니 ..
■ 본문 늙어 가는 사람의 떨림이란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늙어 가는 사람의 떨림이라기보다 늙어 가는 여자의 떨림이란 말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이고 제가 스스로를 언제나 사람이라고 느끼던 것에서 저의 성을 찾아 여자가 된 것이, 그 자각이 이제라도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비로소 여자에 눈떴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각이 나 하나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어머니와 할머니, 이분들은 내가 실제 보았던 인물들이고, 말로만 들었던 증조할머니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선조의 여자들까지도 생각해 보게 되고, 인맥을 통해 면면히 흐르는 여자로서의 숙명 같은 것도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자궁을 가진 여자로서의 숙명감,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로서의 모(母)라는 의미, 결연히 인생과 마주한 ..
199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기출 문학 작품 ■ 본문 주요 부분 나는 어디까지든지 내 방이 ─ 집이 아니다. 집은 없다. ─ 마음에 들었다. 방 안의 기온은 내 체온을 위하여 쾌적하였고, 방 안의 침침한 정도가 또한 내 안력을 위하여 쾌적하였다. 나는 내 방 이상의 서늘한 방도, 또 따뜻한 방도 희망하지는 않았다. 이 이상으로 밝거나 이 이상으로 아늑한 방은 원하지 않았다. 내 방은 나 하나를 위하여 요만한 정도를 꾸준히 지키는 것 같아 늘 내 방에 감사하였고 나는 또 이런 방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아서 즐거웠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하는 것을 계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행복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다고 불행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
1. 본문 건우 할아버지는 그렇게 해서 다시 국회 의원, 다음은 하천 부지의 매립 허가를 얻은 유력자…… 이런 식으로 소유자가 둔갑되어 간 사연들을 죽 들먹거리더니, “이 꼴이 되고 보니 선조(先祖) 때부터 둑을 맨들고 물과 싸워 가며 살아온 우리들은 대관절 우찌 되는기요?” 그의 꺽꺽한 목소리에는, 건우가 지각을 하고 꾸중을 듣던 날 “나릿배 통학생임더.” 하던 때의 그 무엇인가를 저주하는 듯한 감정이 꿈틀거리고 있는 것 같았다. 얼마나 그들의 땅에 대한 원한이 컸던가를 가히 짐작할 수가 있었다. ▶조마이섬의 소유권에 얽힌 내력과 주민들의 분노 “섬사람들도 한번 뻗대 보시지요?” 이렇게 슬쩍 건드려 봤더니 이번엔 윤춘삼 씨가 그 말을 얼른 받았다. “선생님은 그런 걸 잘 알면서 그러네요. 우리 겉은 기..
■ 전체 줄거리 강원도 산골의 눈 덮인 밤길을 함께 가게 된 낯선 두 사람은 어제 있었던 춘천 근화동 살인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나눈다. 큰 키의 사내는 형사이고 작은 키의 사내는 살인 사건의 범인인 억구이다. 둘은 길을 걸으며 어릴 적의 체험담을 주고받는다. 큰 키의 사내는 중학교 2학년 때 전교생이 나무를 심으러 갔다가 새끼 토끼 한 마리를 붙잡은 일을 들려준다. 토끼를 해부한 다음 술안주로 삼을 것이라는 생물 선생의 말에 그날 밤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잠자리에서 빠져 나왔는데, 도덕적 규범 때문에 생물 선생님 집의 얕은 담을 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러자 이번에는 억구가 유년 시절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아홉 살 때였다. 억구는 자신을 멸시하고 자존심을 짓밟은 득수의 장갑을 낀 손을 물어뜯어 살점이 드..
■ 전체 줄거리 해방 이전 은행 중역의 사택이었던 집에서 미스터 방과 백 주사가 술을 마신다. 이 집은 미스터 방의 것이다. 그의 해방 이전 이름은 방삼복이다. 그는 머슴살이를 하다가 일본, 중국을 돌아다니다 고향에 돌아온 후 다시 서울에 올라가 살았다. 서울에서는 구두 직공, 신기료장수 등을 하며 간신히 생계를 유지했다. 그러던 중 해방이 되고 미군이 서울에 주둔했다. 그는 미군에게 통역이 필요한 것을 간파하고 자신에게 부귀영화를 안겨줄 미군 장교를 물색한다. 그래서 선택된 사람이 S소위였다. 미스터 방은 소위를 따라다니며 조선을 소개하고 조선인을 만나게 해주는 중간 브로커 역할을 하면서 부를 축적해갔다. 그러던 중 그가 우연히 길에서 고향 사람인 백 주사를 만난다. 백 주사는 그 아들과 함께 식민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