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서귀포 언덕 위 초가 한 채 귀퉁이 고방을 얻어 아고리와 발가락군*은 아이들을 키우며 살았다 두 사람이 누우면 꽉 찰, 방보다는 차라리 관에 가까운 그 방에서 게와 조개를 잡아먹으며 살았다 아이들이 해변에서 묻혀 온 모래알이 버석거려도 밤이면 식구들의 살을 부드럽게 끌어안아 조개껍질처럼 입을 다물던 방, 게를 삶아 먹은 게 미안해 게를 그리는 아고리와 소라 껍질을 그릇 삼아 상을 차리는 발가락군이 서로의 몸을 끌어안던 석회질의 방, 방이 너무 좁아서 그들은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높이 가질 수 있었다 꿈속에서나 그림 속에서 아이들은 새를 타고 날아다니고 복숭아는 마치 하늘의 것처럼 탐스러웠다 총소리도 거기까지는 따라오지 못했다 섶섬이 보이는 이 마당에 서서 서러운 햇빛에 눈부셔한 날 많았더라도 ..
1. 본문 돌아가야지 전나무 그늘이 한 겹씩 엷어지고 국화꽃 한두 송이 바람을 물들이면 흩어졌던 영혼의 양 떼 모아 떠나온 집으로 돌아가야지 가서 한 생애 버려뒀던 빈집을 고쳐야지 수십 년 누적된 병인을 찾아 무너진 담을 쌓고 창을 바르고 상한 가지 다독여 등불 앞에 앉히면 만월처럼 따뜻한 밤이 오고 내 생애 망가진 부분들이 수묵으로 떠오른다 단비처럼 그 위에 내리는 쓸쓸한 평화 한때는 부서지는 열기로 날을 지새고 이제는 수리하는 노고로 밤을 밝히는 가을은 꿈도 없이 깊은 잠의 평안으로 온다 따뜻하게 손을 잡는 이별로 온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성찰적, 치유적 • 제재 : 집 짓기 • 주제 : 방황하고 고뇌하던 과거의 삶을 극복하고 누리는 평안 • 특징 : ① 과거와 ..
1. 본문 병원에 갈 채비를 하며 어머니께서 한 소식 던지신다 허리가 아프니까 세상이 다 의자로 보여야 꽃도 열매도, 그게 다 의자에 앉아 있는 것이여 주말엔 아버지 산소 좀 다녀와라 그래도 큰애 네가 아버지한테는 좋은 의자 아녔냐 이따가 침 맞고 와서는 참외밭에 지푸라기도 깔고 호박에 똬리도 받쳐야겠다 그것들도 식군데 의자를 내줘야지 싸우지 말고 살아라 결혼하고 애 낳고 사는 게 별거냐 그늘 좋고 풍경 좋은 데다가 의자 몇 개 내놓는 거여 2. 핵심 정리 • 갈래 : 서정시, 자유시 • 성격 : 상징적, 사색적, 교훈적 • 주제 : 서로 배려하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삶의 중요성 • 특징 : ① 화자의 어머니가 화자에게 직접 말하는 듯한 시적 상황을 설정하여 시상을 전개함 ② 사투리를 사용하여 인물의 특성..
1. 본문 고향이 고향인 줄도 모르면서 긴 장대 휘둘러 까치밥 따는 서울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남도의 빈 겨울 하늘만 남으면 우리 마음 얼마나 허전할까 살아온 이 세상 어느 물굽이 소용돌이치고 휩쓸려 배 주릴 때도 공중을 오가는 날짐승에게 길을 내어 주는 그것은 따뜻한 등불이었으니 철없는 조카아이들이여 그 까치밥 따지 말라 사랑방 말쿠지*에 짚신 몇 죽 걸어 놓고 할아버지는 무덤 속을 걸어가시지 않았느냐 그 짚신 더러는 외로운 길손의 길보시가 되고 한밤중 동네 개 컹컹 짖어 그 짚신 짊어지고 아버지는 다시 새벽 두만강 국경을 넘기도 하였느니 아이들아, 수많은 기다림의 세월 그러니 서러워하지도 말아라 눈 속에 익은 까치밥 몇 개가 겨울 하늘에 떠서 아직도 너희들이 가야 할 머나먼 길 이렇게 ..
1. 본문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을 어깨서 허리까지 길게 내리친 시퍼런 칼자욱을 아는가 질주하는 전율과 전율 끝에 단말마*를 꿈꾸는 벼랑의 직립 그 위에 다시 벼랑은 솟는다 그대 아는가 석탄기의 종말을 그때 하늘 높이 날으던 한 마리 장수잠자리의 추락(墜落)을 나의 자랑은 자멸(自滅)이다 무수한 복안(複眼)들이 그 무수한 수정체(水晶體)가 한꺼번에 박살 나는 맹목(盲目)의 물보라 그대 아는가 나의 등판에 폭포처럼 쏟아지는 시퍼런 빛줄기 2억 년 묵은 이 칼자욱을 아는가 *단말마: ‘임종(臨終)’을 달리 이르는 말. 숨이 끊어질 때의 모진 고통. 2.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관념시 • 성격 : 서정적, 관념적 • 제재 : 폭포 • 주제 : 존재에 대한 비극적 인식 • 특징 : ① 관념적 ..
1. 본문 폭포는 곧은 절벽을 무서운 기색도 없이 떨어진다 규정할 수 없는 물결이 무엇을 향하여 떨어진다는 의미도 없이 계절과 주야를 가리지 않고 고매한 정신처럼 쉴 사이 없이 떨어진다 금잔화도 인가도 보이지 않는 밤이 되면 폭포는 곧은 소리를 내며 떨어진다 곧은 소리는 소리이다 곧은 소리는 곧은 소리를 부른다 번개와 같이 떨어지는 물방울은 취할 순간조차 마음에 주지 않고 나타(懶惰)와 안정을 뒤집어 놓은 듯이 높이도 폭도 없이 떨어진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주지시 • 성격 : 주지적, 관념적, 상징적, 참여적 • 어조 : 강인하고 의지적인 어조 • 제재 : 폭포 • 주제 : 부조리한 현실에 타협하지 않는 의지적인 삶 • 특징 : ① 시인의 지적 인식과 정신을 자연물에 효과적으로..
1. 본문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에 힘없는 책갈피는 이 종이를 떨어뜨리리. 그때 내 마음은 너무나 많은 공장을 세웠으니 어리석게도 그토록 기록할 것이 많았구나. 구름 밑을 천천히 쏘다니는 개처럼 지칠 줄 모르고 공중에서 머뭇거렸구나. 나 가진 것 탄식밖에 없어 저녁 거리마다 물끄러미 청춘을 세워 두고 살아온 날들을 신기하게 세어 보았으니 그 누구도 나를 두려워하지 않았으니 내 희망의 내용은 질투뿐이었구나. 그리하여 나는 우선 여기에 짧은 글을 남겨 둔다. 나의 생은 미친 듯이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단 한 번도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2.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회고적, 성찰적, 자조적 • 제재 : 젊은 날의 자신이 삶 • 주제 : 젊은 날에 대한 반성적 성찰 • 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