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제 - 김병연

반응형
728x90

四脚松盤粥一器 사각송반죽일기

天光雲影共排徊 천광운영공배회

主人莫道無顔色 주인막도무안색

吾愛靑山倒水來 오애청산도수래

네 다리 소반 위에 멀건 죽 한 그릇.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가 그 속에서 함께 떠도네.

주인이여, 면목이 없다고 말하지 마오.

물 속에 비치는 청산을 내 좋아한다오.






요점 정리


작가 : 김병연(김삿갓)

형식 : 7언절구

성격 : 해학적, 긍정적, 은유적

구성 :

- 농민의 따스한 인정과 가난

- 방랑하는 시적 화자의 처지

- 가난한 농민에 대한 연민

- 안빈낙도하는 유유자적한 삶

표현 : 은유적 표현으로 이 작품에서 작자는 방랑 생활 속에서 자신의 삶에 대한 반성적 인식을 하늘에 뜬 구름 그림자로 비유하는 한편, ‘물 속에 비치는 청산을 좋아한다고 말함으로써 자연을 벗삼아 떠도는 자신의 모습을 객관화하고 있다. 작자는 그러한 인생관에 대해서 긍정적 가치를 부여하고 있다.

어조 : 농민의 처지를 이해하는 연민의 목소리

제재 : 가난한 농민의 삶

주제 : 가난한 농민에 대한 연민과 안빈낙도의 삶에 대한 의지

 



이해와 감상

 

 산골의 가난한 농부 집에 하룻밤을 묵었는데 가진 것 없는 주인이 손님 접대로 내놓은 저녁 끼니는 멀건 죽이고, 죽 밖에 대접할 것이 없어 미안해하는 주인에게 시 한 수를 지어 주면서 농민에 대한 연민의 정과 자신의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읊은 작품이다. 이 시는 비록 해학적인 느낌을 주지만 당시의 비극적 사회상에 대한 추론이 가능한 작품으로 하층민인 농민들의 힘겨운 생활에 대한 묘사가 드러나기도 한다. 방랑 생활로 지친 그에게 멀건 죽밖에 대접을 하지 못해 미안해 하는 어려운 처지의 농민을 도리어 위로하는 글로 오히려 멀건 죽 안에 비친 청산(靑山)을 감상하는 것이 더 좋다는 말로 농민의 심정을 위로하고 있는 데에서 시인의 기발한 해학을 엿볼 수 있고, 이러한 해학적 표현은 백성들의 비참한 처지에 대한 연민과 동정을 함께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글을 모르는 그에게 이 한편의 시는 무슨 소용이 있으랴.

 


보충 학습


김병연

 1807(순조 7)1863(철종 14). 조선 후기의 방랑시인. 본관은 안동. 자는 난고(蘭皐), 별호는 김삿갓 또는 김립(金笠). 경기도 양주 출생.

 평안도 선천(宣川)의 부사였던 할아버지 익순(益淳)이 홍경래의 난 때에 투항한 죄로 집안이 멸족을 당하였다. 노복 김성수 (金聖洙)의 구원으로 형 병하(炳河)와 함께 황해도 곡산(谷山)으로 피신해 공부하였다. 후일 멸족에서 폐족으로 사면되어 형제는 어머니에게로 돌아갔다. 그러나 아버지 안근(安根)은 홧병으로 죽었다.

어머니는 자식들이 폐족자로 멸시받는 것이 싫어서 강원도 영월로 옮겨 숨기고 살았다. 이 사실을 모르는 김병연이 과거에 응시, 논정가산충절사탄김익순죄통우천 論鄭嘉山忠節死嘆金益淳罪通于天이라는 그의 할아버지 익순을 조롱하는 시제로 장원급제하였다. 그러나 자신의 내력을 어머니에게서 듣고는 조상을 욕되게 한 죄인이라는 자책과 폐족자에 대한 멸시 등으로 20세 무렵부터 처자식을 둔 채로 방랑의 길에 오른다. 이때부터 그는 푸른 하늘을 볼 수 없는 죄인이라고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은 채 방랑생활을 시작하였다.

 금강산 유람을 시작으로 각지의 서당을 주로 순방하고, 4년 뒤에 일단 귀향하여 1년 남짓 묵었다. 이때 둘째아들 익균(翼均)을 낳았다. 또다시 고향을 떠나서 서울·충청도·경상도로 돌았다. 도산서원(陶山書院) 아랫마을 서당에서 몇 해동안 훈장노릇도 하였다. 다시 전라도·충청도·평안도를 거쳐 어릴 때 자라던 곡산의 김성수 아들집에서 1년쯤 훈장노릇을 하였다.

 충청도 계룡산 밑에서, 찾아온 아들 익균을 만나 재워놓고 도망하였다가 1년 만에 또 찾아온 그 아들과 경상도 어느 산촌에서 만났으나, 이번에는 심부름을 보내놓고 도망쳤다. 3년 뒤 경상도 진주땅에서 또다시 아들을 만나 귀향을 마음먹었다가 또 변심하여 이번에는 용변을 핑계로 도피하였다.

 57세 때 전라도 동복(同福)땅에 쓰러져 있는 것을 어느 선비가 나귀에 태워 자기 집으로 데려가 거기에서 반년 가까이 신세를 졌다. 그 뒤에 지리산을 두루 살펴보고 3년 만에 쇠약한 몸으로 그 선비 집에 되돌아와 한많은 생애를 마쳤다. 뒤에 익균이 유해를 강원도 영월군 의풍면 태백산 기슭에 묻었다.

 김병연의 한시는 풍자와 해학을 담고 있어 희화적(戱怜的)으로 한시에 파격적 요인이 되었다. 그 파격적인 양상을 한 예로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스무나무 아래 앉은 설운 나그네에게/망할놈의 마을에선 쉰밥을 주더라/인간에 이런 일이 어찌 있는가/내 집에 돌아가 설은 밥을 먹느니만 못하다(二十樹下三十客 四十村中五十食 人間豈有七十事 不如歸家三十食).” 이 시에서 전통적인 한시의 신성함 혹은 권위에 대한 도전, 그 양식 파괴 등에서 이러한 파격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국문학사에서는 김삿갓으로 칭해지는 인물이 김병연 외에도 여럿 있었음을 들어 김삿갓의 이러한 복수성은 당시 사회의 몰락한 양반계층의 편재와 깊은 관련이 있다고 보고 있다. 특히, 과거제도의 문란으로 인하여 선비들의 시 창작기술은 이와 같은 절망적 파격과 조롱·야유·기지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1978년 김병연의 후손들이 중심이 되어 광주 무등산 기슭에 시비(詩碑)를 세웠다. 1987년 영월에 전국시가비건립동호회(全國詩歌碑建立同好會)’에서 시비를 세웠다. 그의 시를 묶은 김립시집 金笠詩集이 있다.

 

'문학 이야기 > 고전운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안락성을 지나며(過安樂見捂) - 김병연  (0) 2014.04.23
삿갓을 읊다(詠笠) - 김병연  (0) 2014.04.23
구지가 - 구간 등  (0) 2014.04.22
원왕생가 - 광덕  (0) 2014.04.22
헌화가 - 견우노옹  (0) 2014.04.22

Designed by JB FAC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