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하나님 - 김춘수 |
나의 하나님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늙은 비애(悲哀)다. ↳ 어두움, 애처로움을 의미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이다. ↳ 삶의 처절함, 희생물을 의미 시인(詩人) 릴케가 만난 슬라브 여자(女子)의 마음속에 갈앉은 놋쇠 항아리다. ↳ 묵중함, 무거움을 의미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사랑하는 나의 하나님, 당신은 또
대낮에도 옷을 벗는 여리디 여린 순결(純潔)이다. ↳ 하나님의 순결함을 의미 삼월(三月)에 젊은 느릅나무 잎새에서 이는 연둣빛 바람이다. ↳ 하나님의 청신함을 의미 |
성격 : 주지적, 관념적, 비유적, 이미지적
표현 : 은유법
제재 : 하나님의 의미
주제 : 새로이 발견한 하나님의 의미
‣ 이해와 감상
이 시는 ‘나의 하나님’이라는 대상을 향해 모든 이미지를 집중시키는 구조를 취한다. 이 이미지들은 - ‘늙은 비애’,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 ‘놋쇠 항아리’, ‘어리디어린 순결’, ‘연두빛 바람’- 매우 이질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어 얼핏 아무런 연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이질적 이미지들은 서로 충돌하고 융합함으로써 개개의 이미지가 가지고 있는 고정된 틀에서 벗어나 전혀 새로운 느낌을 주고 있다. 바로 이 점이 이 시의 특성이다.
‘나의 하나님’을 이루고 있는 이미지들은 7행을 중심으로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대립하고 있다. 전반부의 ‘비애’는 마음을 어둡게 하며, ‘살점’은 생의 처절함을 느끼게 하고, ‘놋쇠 항아리’는 무겁고도 깊은 속성을 지니므로, 이들은 슬픔 내지는 고통의 정조라는 연관성을 지닌다.
시적화자에게 있어 ‘하나님’은 인간들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가고 있어서 그 인간들에게 지친 모습으로 ‘늙은 비애’라 표현하고 있다. 또한 십자가에 못이 박혀 죽은 모습은 푸줏간에 걸린 고기마냥 하나의 ‘살점’으로 은유되고 있는 것이다.
반면 후반부의 ‘순결’은 맑고 깨끗한 느낌을 주며, ‘연두빛 바람’은 가볍고 밝은 느낌으로 ‘순결’을 구체화시킨다. 또한 앞의 ‘걸다’, ‘가라앉다’ 등의 동사는 무거움과 하강의 의미를 갖는 한편, 뒤의 ‘벗다’, ‘일다’ 등은 가벼움의 상태로 상승하는 느낌을 준다. 말하자면 무거움과 가벼움, 늙음과 젊음, 어둠과 밝음이라는 모순된 의미의 총체가 시인이 말하고자 하는 ‘나의 하나님’인 것이다. 그렇기에 모순되고 다양한 자아를 지니고 있는 우리 인간에게 비애와 순결을 동시에 지니면서 ‘손바닥에 못을 박아 죽일 수도 없고 죽지도 않는’ 영원불멸의 존재인 하나님은 진정한 존재로서 다가온다.
한편 이 시에서의 ‘하나님’은 단순한 신적(神的) 존재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나의 하나님’은 우리들이 갈구하는 삶의 가치일 수도 있고, 시인이 추구하는 시 정신일 수도 있다.
‣ 이해와 감상 2
이 시는 은유를 통해 하나님이란 존재의 진상을 밝히고 있다.
이 시의 구조는 매우 단순하다. ‘A=B'의 구조로 병렬되는데, A는 하나님이요, B는 하나님의 비유된 이미지들이다. 그것들은 네 가지로 제시되었는데, 늙은 비애(悲哀), 묵은 연정, 순결함, 청신함 등이다. 이 네 가지는 또 점층적 성격을 띤다. 비애→청신함으로 전이되며, 늙음에서 젊음으로 바뀌어 간다. 1단락에서 제시된 ’늙은 비애‘라는 규정은, 현실의 혹독함, 부정적 인간들에 지친 존재로 나타난다. 하나님은 명랑하고 젊은 이미지로 포착되지 않고, 성큼 늙어 버린 존재, 인간 세상에 비애를 느끼는 존재로 제시된다. 그러기에 푸줏간의 살점으로 은유될 수가 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의 모습과 푸줏간에 걸린 고기 살점과는 유사성이 발견된다. 또한 푸줏간의 고기처럼 속된 인간들에게는 하찮은 존재로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존재에 대해 화자는 동의하지 않는다. 앞의 진술은 화자의 의식이기보다는 속된 인간들의 무명(無明)에 대한 일종의 냉소적 태도라고 보아야 옳을 것이다. 화자의 진정한 의식은 하나님을 보다 진중한 의미로 인식한다는 데 있다. 슬라브 여자의 마음 속에 무겁게 자리한 놋쇠 항아리처럼 쉬 사라지지 않는 존재로 그 의미는 중심에 놓여 있다. 그러므로 못 박아 죽인다고 죽는 존재가 아닌 것이다. 하나님의 존재는 생물적 존재가 이미 아니기 때문이다.
이런 인식의 끝에 화자의 의식은 보다 밝은 세계로 나아간다. 대낮에도 옷을 벗을 만큼 천진성을 지닌 것으로 본 것이 그러하다. 전반부의 ‘푸줏간에 걸린 커다란 살점’과 비교하면 그 차이는 확연해진다. 십자가에 옷을 벗은 채 박혀 있는 모습을 그렇게 다른 시각으로 포착한 것이다. 그리고 연둣빛 바람의 청신한 이미지는 위의 순결성을 한층 심화한다. 그는 언제나 순결의 정령으로, 맑고 신선한 존재로 화자에게 다가온다.
이 시의 비유는 무척 당돌하다. 이런 비유를 래디컬 메타포라 하는데, 비유된 사상(事象)의 이미지 또한 래디컬한 이미지이다. 이렇게 당돌하게 연결되는 사상들의 결합은 독자에게 충격을 준다. 이 충격은 단순히 정서상의 문제가 아니다. 이는 다분히 의도된 것이다. 의도한다는 것은 이미 지적 사고 작용이 전제되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와 같은 일련의 시적 경향은 현대시의 한 특질이 되기도 한다. 이런 특징을 지닌 시는 분명 주지적이다. 김춘수의 시에 보이는 래디컬한 이미지 결합은 그러한 주지적 성향을 특징적으로 보여 준다. 이 시가 의도하는 것도 당돌한 이미지, 다시 말하여 이질적 사물들의 결합에서 오는 지적 충격을 주고자 하는 것이다.
* ‘나의 하나님’을 구체화하기 위해 사용된 보조 관념들과 함축적 의미
보조관념 |
함축적 의미 |
비애(悲哀) |
하나님은 인류의 죄를 다 뒤집어 쓰고 있는 관계로 슬픔 그 자체 (‘늙은’을 ‘낡은, 오래 된’으로 바꿔도 좋음)라고 할 수 있음. |
살점 |
십자가에 매달린 예수의 모습 연상, 고통스러운 존재 |
놋쇠 항아리 |
충만성, 평범성, 영구성 |
순결(한 존재) |
순수, 처녀성 |
연둣빛 바람 |
신선하고 희망적이고 이상적인 존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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