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 오는 날 - 손창섭

1. 본문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元求)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東旭)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에게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東玉)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과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이었다.

 동욱의 거처를 왕방하기 전에 원구는 어느 날 거리에서 동욱을 만나 저녁을 같이한 일이 있었다. 동욱은 밥보다도 먼저 술을 먹고 싶어했다. 술을 마시는 동욱의 태도는 제법 애주가였다. 잔을 넘어 흘러내리는 한 방울도 아까워서 동욱은 혀끝으로 잔굽을 핥았다. 기독교 가정에서 성장했을 뿐 아니라 몇몇 교회에서 다년간 찬양대를 지도해 온 동욱의 과거를 원구는 생각하며, 요즈음은 교회에 나가지 않느냐고 물어 보았다. 동욱은 멋쩍게 씽긋 웃고 나서 이따만큼 한 번씩 나가노라고 하고, 그런 때는 견딜 수 없는 절망감에 숨이 막힐 것 같은 날이라는 것이었다. 동욱은 소매와 깃이 너슬너슬한 양복저고리에 교회에서 구제품으로 탄 것이라는, 바둑판처럼 사방으로 검은 줄이 죽죽 간 회색 즈봉을 입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그의 구두가 아주 명물이었다. 개미허리처럼 중간이 잘록한 데다가 코숭이만 주먹만큼 뭉툭 솟아오른 검정 단화를 신고 있었다. 그건 꼭 채플린이나 신음 직한 괴이한 구두였기 때문에, 잔을 주고받으면서도 원구는 몇 번이나 동욱의 발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그동안 무얼 하며 지내느냐는 원구의 물음에 동욱은 끼고 온 보자기를 끄르고 스크랩북을 펴 보이는 것이었다. 몇 장 벌컥벌컥 뒤지는데 보니, 서양 여자랑 아이들의 초상화가 드문드문 붙어 있었다. 그 견본을 가지고 미군 부대를 찾아다니며, 초상화의 주문을 맡는다는 것이었다. 대학에서 영문과를 전공한 것이 아주 헛일은 아니었다고 하며 동욱은 닝글닝글 웃었다. 동욱의 그 닝글닝글한 웃음을 원구는 이전부터 몹시 꺼렸다. 상대방을 조롱하는 것 같은, 그러면서도 자조적이요, 어쩐지 친애감조차 느껴지는 그 닝글닝글한 웃음은, 원구에게 어떤 운명적인 중압을 암시하여 감당할 수 없이 마음이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대체 그림은 누가 그리느냐니까, 지금 여동생 동옥이와 둘이 지내는데, 동옥은 어려서부터 그림을 좋아하더니 초상화를 곧잘 그린다는 것이다. 동옥이란 원구의 귀에도 익은 이름이었다. 소학교 시절에 동욱이네 집에 놀러 가면 그때 대여섯 살밖에 안 되는 동옥이가 귀찮게 졸졸 따라다니던 기억이 새로웠다. 동옥은 그 당시 아이들 사이에 한창 유행되었던, ‘중중 때때중 바랑 메고 어디 가나’를 부르고 다녔다. 그사이 이십 년이라는 세월이 흐르고 보니 동옥의 모습은 전연 기억도 남지 않았다.

 비 오는 날인 데다가 창문까지 거적때기로 가리어서 방 안은 굴속같이 침침했다. 다다미 여덟 장 깔리는 방 안은, 다다미 위에다 시멘트 종이로 장판 바르듯 한 것이었다. 한편 천장에서는 쉴 사이 없이 빗물이 떨어졌다. 빗물 떨어지는 자리에는 바께쓰가 놓여 있었다. 촐랑촐랑 쪼르륵 촐랑, 빗물은 이와 같은 연속적인 음향을 남기며 바께쓰 안에 가 떨어지는 것이었다. 무덤 속 같은 이 방 안의 어둠을 조금이라도 구해 주는 것은 그래도 빗물 소리뿐이었다. 그러나 그 빗물 소리마저, 바께쓰에 차츰 물이 늘어 갈수록 우울한 음향으로 변해 가는 것이었다. 동욱은 별로 원구와 동옥을 인사시키거나 소개하려 하지 않았다. 동욱은 젖은 옷을 벗어서 걸고, 런닝과 빤쓰 바람으로 식사 준비를 할 터이니 잠깐만 앉아 있으라고 하고 부엌으로 나가는 것이었다. 부엌이라야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비어 있는 옆방이었다. 다다미는 걷어서 벽 한구석에 기대어 놓아, 판장뿐인 실내에는 여기저기 빗물이 오줌발처럼 쏟아졌다. 거기에는 취사도구가 너저분하니 널려 있는 것이었다. 연기가 들어간다고 사잇문을 닫아 버리고 나서, 동욱은 풍로에 불을 피우느라고 부채질을 하며 야단이었다. 열시가 조금 지난 회중시계를 사잇문 틈으로 꺼내 보이며, 도대체 조반이냐 점심이냐는 원구의 질문에, 동욱은 닝글닝글하며 자기들에게는 삼시의 구별이 없다고 했다. 언제든 배고프면 밥을 끓여 먹고, 밥 생각이 없는 날은 종일이라도 굶고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러는 동안 원구는 별안간 엉덩이가 척척해 들어옴을 의식했다. 바께쓰의 빗물이 넘어서 옆에 앉아 있는 원구의 자리로 흘러내린 것이었다. 원구는 젖은 양복바지의 엉덩이를 만지며 일어섰다. 그제서야 동옥도 바께쓰의 물이 넘는 줄을 안 모양이다. 그러나 동옥은 직접 일어나서 제 손으로 치우려고 하지도 않았다. 앉은 채 부엌 쪽을 향해, 오빠 물 넘어, 했을 뿐이었다. 동욱은 사잇문을 반쯤 열고 들여다보며, 이년아, 네가 좀 치지 못해? 하고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러자 자기가 나서기에 절호한 기회라고 생각한 원구는, 내가 내다 버리지 하고 한 손으로 바께쓰를 들어 올렸다. 그러나 한 걸음도 미처 발을 옮겨 놓을 사이도 없이 바께쓰는 철그렁 하는 소리와 함께 한옆이 떨어지며 물이 좌르르 쏟아졌다. 손잡이의 한쪽 끝 갈고리가 고리 구멍에서 벗겨진 것이었다. 순식간에 방바닥은 물바다가 되고 말았다. 여지껏 꼼짝 않고 앉아 있던 동옥도 그제만은 냉큼 일어나 한걸음 비켜서는 것이었다. 그 순간의 동옥의 동작이 예사롭지가 않았다. 원구에게 또 하나 우울의 씨를 뿌려 주는 것이었다. 원피스 밑으로 드러난 동옥의 왼쪽 다리가 어린애의 손목같이 가늘고 짧았기 때문이다. 그러한 다리를 옮겨 디디는 순간, 동옥의 전신은 한쪽으로 쓰러질 듯이 기울어지는 것이었다. 동옥은 다시 한번 그 가늘고 짧은 다리를 옮겨 놓는 일 없이, 젖지 않은 구석 자리에 재빨리 주저앉아 버리고 말았다. 그러고는 희다 못해 파랗게 질린 얼굴에 독이 오른 눈초리로 원구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는 것이었다. 동옥의 시선을 피하여, 탁류의 대하 가운데 떠 있는 것 같은 공포에 몸을 떨며, 원구는 마지막 기력을 다하여 허위적거리듯, 두 발로 물 괸 방바닥을 절벅거려 보는 것이었다.

2. 전체 줄거리

 피란지인 부산에서 리어카 행상을 하며 살아가던 원구는 고향 친구인 동욱을 만나게 된다. 기독교 가정의 영문학을 전공한 동욱은 전쟁 후 절망감으로 많이 변해 있었고,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불구가 된 여동생 동옥과 같이 피란 와서 외지에 있는 낡은 목조 건물에서 살고 있었다. 동옥이 미군을 상대로 그려 주는 초상화를 생업으로 근근히 살아가던 동욱은 미군 부대의 출입이 통제되고 동생조차 자신을 믿지 못하고 주인 노파에게 돈을 빌려주었던 돈을 떼이고 살고 있던 집에서 나가야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된다. 원구가 며칠 동안 계속 되는 비로 생계에 위협을 느껴 가 보지 못한 사이에 동욱은 짐스러워하던 동옥을 버리고 가출을 하고, 혼자 남은 동옥은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원구는 새 집 주인이 동옥을 팔아 먹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자신 또한 돌보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그냥 돌아서고 만다.

 

3.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소설, 전후소설

• 성격 : 허무적, 실존적, 사실적

• 배경 : 시간적 - 6 · 25 전쟁 중,

공간적 - 피란지 부산의 변두리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제재 : 월남한 동욱 · 동옥 남매의 삶

• 주제 : 전쟁이 가져온 허무 의식과 삶의 무기력함

• 특징 : 

 ① 작품 배경의 상징적 속성을 통하여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음.

 ② ‘~것이다’라는 종결 어미를 사용하여 인물에 대한 간접 제시와 냉소적 감정 전달.

 ③ 어감이 강한 부사어를 통해 사태의 심각성을 드러내고 독자의 주의를 환기시킴.

 

4.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육체적, 정신적 불구자로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고 피해 의식에 젖어 살아가고 있는 인물들의 삶을 다룬 전후 소설이다. 특정 등장인물의 눈을 통하여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이 가져온 인간의 무기력하고 비참한 삶이라는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특히, 전쟁이 가져다준 절망적 상황과 이 때문에 구성원들이 정신적, 육체적으로 불구적인 삶을 살 수밖에 없는 현실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어 사건보다는 전달자인 원구의 감정을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한편, 이 작품의 주된 배경을 이루는 ‘비’는 작품 전체의 암울한 분위기를 형성하며, 우울하고 절망감에 싸여 있는 등장 인물의 심정과 조응되어 사용되고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5. 작품 해설 2

 이 작품은 전쟁의 후유증으로 인하여 무기력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우울한 내면 심리와 허무 의식을 다룬 전후 소설이다. 작가는 신체적, 정신적 장애를 가진 남매의 모습을 이들이 살아가는 전후의 상황, 기후적인 조건 등과 결합하여 작품의 독특한 분위기를 조성하고 있다. 또한 폭압적이고 일방적인 전쟁이 개인의 삶에 미치는 영향을 보여 주면서 사회적 환경과 인간의 관계에 대한 인식을 심화시키고 있다.

이 작품에는 객관적 묘사가 거의 없고, 작중 인물의 제한된 시점에서 내면 심리 중심의 서술이 이루어지고 있다. 이를 통해 전쟁으로 인해 상처받은 인물들의 황폐한 내면을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있다. 또한 삶을 극복하려는 적극적인 의지가 없는 무기력한 작중 인물들의 모습을 통해 전쟁이 낳은 패배적이고 부정적인 인간상을 보여 주고 있다.

 - 천재교육, 천재학습백과 참고

6.심화 내용 연구

1. 서술상의 특징

  이 작품은 ‘~것이었다’라는 종결 어미를 사용하여 사건을 간접적으로 제시하였다. 그럼으로 사건 자체보다는 사건을 전달하는 전달자의 느낌이나 감정이 두드러지게 하고 있다. 또한 원구의 눈에 비친 동욱 남매의 암울한 삶을 간접적으로 제시하여 그들의 비정상적이고 불구적인 삶을 보다 더 암울하게 전달하고 있다.

 

2. 동욱의 위악적인 태도

  동욱은 영문과를 전공하였지만 피란지에서 하루하루를 비참하게 살아가고 있다. 게다가 육체적 불구성을 띤 여동생을 제대로 보살피지도 못하고 미군 부대를 돌며 동생이 그린 초상화의 주문을 받아오는 일을 하며 피폐한 삶을 살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동욱은 시대 현실에 대한 분노, 자신의 앞날에 대한 암울함, 동생에 대한 미안함과 책임져야 한다는 부담감 등으로 동생에게 폭언을 하는 위악적인 행동을 하고 있다.

 

3. 등장인물의 이해

• 동옥: 어려서 소아마비를 앓아 다리에 장애를 갖게 된 후에 타인에게 경계심을 갖고 적대적으로 대하는 정신적, 육체적 불구성을 띤 인물이다.

• 동욱: 속으로는 동생인 동옥을 걱정하면서도 겉으로는 폭언과 폭행을 행하는 인물이다.

• 원구: 동욱의 친구로 동욱 남매의 삶을 동정하지만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지 못하는 관찰자적 인물이다.

 

4. 동옥의 정신적 불구성을 보여 주는 행동이 지닌 의미  

 동옥은 원구가 동욱의 집을 찾아가 동욱의 집이 맞느냐는 질문에 고개만 약간 끄덕여 보일 뿐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또한 ‘동욱 군 어디 나갔습니까?’ 하고 재차 묻는 말에도 고개만 끄떡하고 나서 원구를 까닭 모를 모멸과 일종의 반항적 태도까지 서리어있는 눈으로 노려보듯 하기만 한다. 이러한 동옥의 행동은 낯선 사람과 거리감을 두는 행동으로, 동옥이 현실적 삶에 제대로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임을 보여 준다.

 

5. ‘비 오는 날’의 배경의 역할

 이 작품은 전쟁 중이라는 사회적 배경과 상황적 배경, 시간적 배경과 공간적 배경을 적절히 배합함으로써 우울한 분위기를 연출하면서 전후의 무기력한 삶이라는 작품의 주제를 효과적으로 구현하고 있다.

 공간적 배경 : 피란지 부산이다. 고향을 떠나 월남한 작중 인물들에게 부산은 절망적인 삶을 살아가는 비극의 장소이다. 특히 인가에서 외따로 떨어진 곳에 위치한 동욱 남매의 폐가와 같은 집은 인물이 처해 있는 상황을 단적으로 드러내며, 비참하고 절망적인 삶을 보여주고 있다.

 시간적 배경 : 장마철로, 계속 비가 내려 어둡고 침침한 분위기를 조성하며, 소설 전체의 상황을 드러낸다. 전후의 절망적이고 무기력한 당대의 상황을 보여 주는 것이다. ‘비’는 인물이 느끼는 중압감, 우울하고 궁핍한 삶을 상징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6. ‘비 오는 날’의 결말의 효과

 ‘비 오는 날’의 마지막 부분에서 원구는 남매의 집을 다시 찾지만, 이미 동욱과 동옥이 떠난 상태였다. 그곳에서 원구는 동옥은 얼굴이 반반하니 몸을 팔아서라도 굶어 죽진 않을 거라는 주인의 말을 듣고 분노한다. 원구는 주인이 동옥을 팔았을 거라고 생각하면서도 말없이 발길을 돌이키며 자책감을 느낀다. 결국 이 소설의 결말에는 문제점에 대한 해결이 부재(不在)한다. 원구의 관심으로도 동욱 남매의 삶을 구제하지 못한 것이다. 이러한 결말은 전후의 상황을 보다 사실적으로 보여 주면서 절망적인 삶의 모습을 드러낸다. 더불어 인간의 무기력함과 허무 의식을 더욱 강조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7. 작가 소개

손창섭 - 20세기 한국 문학의 탐험 3

 

손창섭

손창섭(孫昌涉, 1922~2010)은 장용학과 함께 1950년대 문학이 낳은 스캔들의 주인공이다. 누구도 감히 따를 수 없는 그의 자기 모독적 소설이 스캔들의 핵심이다. 195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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