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덕 선생전 - 박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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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선귤자(蟬橘子)에게 예덕 선생(穢德先生)이라는 친구가 있었다. 그 친구는 종본탑(宗本塔) 동편에 살면서 매일 마을의 똥을 져 나르는 것을 업으로 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이 모두 그를 불러 ‘엄 행수’(嚴行首)라고 했다. ‘행수’란 역부(役夫)의 우두머리에 대한 호칭이었고, ‘엄’은 그의 성(姓)이다.

  자목(子牧)이 선귤자에게 따져 물었다.
  “전에 선생님께서 ‘친구란 함께 살지 않는 처(妻)이고 동기가 아닌 형제라.’라고 말하시었지요. 친구는 이처럼 중한 것이 아닙니까. 세상의 이름 있는 사대부(士大夫)들이 선생님과 종유해서 아랫바람에 놀기를 청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선생님은 이런 분들과 사귀지 않으시고, 저 엄 행수는 마을의 상놈이라 하류(下流)에 처한 역부로 치욕스런 일을 하는 자 아닙니까. 그런데 선생님은 곧잘 이자의 덕을 칭찬하여 ‘선생’이라 부르고 바로 친교를 맺어 벗을 청하려고 하니 저희는 이것이 부끄러워서 이만 문하(門下)를 하직할까 합니다.”
  선귤자는 웃으며 말했다.
  “거기 앉아라. 내가 너에게 친구란 것에 대해서 이야기해 주마. 상말에 ‘의원이 자기 병 못 고치고 무당이 제 굿 못한다.’는 격으로, 사람들이 누구나 자기가 잘한 일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으면 안타깝게 여긴다. 자기 허물을 충고해 주길 바랄 경우에 마냥 칭찬만 하면 아첨에 가까워서 맛이 없고 단처만 자꾸 지적하면 들추어내는 것 같아서 인정이 아닐 것이다. 이에 그의 잘못을 띄워 놓고 말해 변죽만 울리고 꼭 꼬집지 않으면 비록 크게 책망하더라도 노하지 않을 것이다. 왠고 하면 자기의 정말 거리끼는 곳을 건드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우연히 자기가 잘한 일이라고 생각하는 일에 언급하되 무엇에 비유해서 숨겨진 일을 딱 맞추면 마음속에 감동하여 마치 가려운 곳을 긁어 주는 것 같을 것이다. 긁는 데도 방법이 있으니 등을 만져 주되 겨드랑이까지 닿아서는 안 되고 가슴을 쓰다듬어 주되 목에 침노해서는 안 된다. 공중에 띄워 놓고 하는 말이 나중에 자기를 칭찬하는 말로 귀결되고 보면 뛸 듯이 기뻐 ‘나를 알아준다.’고 하겠지. 이와 같은 것을 친구라 할 수 있겠느냐.”
  자목은 귀를 틀어막고 달아나며 “이야말로 선생님이 나를 시정배(市井輩)나 겸복(傔僕) 따위의 일로 가르치는 것입니다.” / 고 했다. / 선귤자가 다시 말했다.
  “그러면 네가 수치로 여기는 것은 여기에 있는 것이지 저기에 있는 것이 아니로구나. 무릇 시교(市交)는 이해(利害)로 사귀는 것이고, 면교(面交)는 아첨으로 사귀는 것이다. 그러므로 아무리 좋은 사이라도 세 번 손을 내밀면 사이가 벌어지지 않을 수 없고, 또 아무리 묵은 원한이 있더라도 세 번 도와주면 친해지지 않을 수 없는 법이다. <중략> 이것을 이른바 도의지교(道義之交)라고 하는데 위로 천고(千古)를 벗해도 요원하다 아니하고 서로 만 리(萬里)를 떨어져 있어도 소원하다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익을 독점해도 의롭지 못하다거나 아무리 탐다무득(貪多務得)해도 양보할 줄 모른다거나 하는 말을 듣지 않는다. 손바닥에 침을 탁탁 뱉고서 가래를 휘둘러 허리를 꾸부정하고 일하는 모습이 마치 금조(禽鳥)가 무엇을 쪼는 형상이란다. 그는 볼만한 글이 있어도 보려고 않고 종고(鐘鼓)의 풍악에도 귀를 기울이지 않는다. 대저 부귀라는 것은 사람들이 다 같이 원하는 바이지만 원해서 꼭 얻어질 것이 아니기 때문에 부러워하지 않는다. 그리고 그를 칭찬한다고 영광스러워질 것도 아니고 그를 비방한다고 더 욕될 것도 없다.
  왕십리에서 무, 살곶이 다리〔箭橋〕에서 순무, 석교(石郊)에서 가지 · 오이 · 수박, 연희궁(延禧宮)에서 고추 · 마늘 · 부추 · 해채(薤菜), 청파(靑坡)에서 미나리, 이태인(利泰仁)에서 토란 같은 것들이 나오는데 밭은 상상전(上上田)에 심고 모두 엄씨의 똥을 써서 잘 가꾸어 내는 것이다. 그래서 엄 행수는 매년 육천 전(錢)을 벌기에 이른다. 아침이면 한 대접 밥을 먹어 치우고 만족한 기분으로 하루 동안 다니다가 저녁이면 또한 대접 밥을 먹는다. 누가 고기를 먹어야 한다고 권하면 ‘목구멍을 내려가면 소채나 고기나 배부르기는 매일반인데 맛을 취할 것이 있겠느냐.’고 사양한다. 또 누가 좋은 옷을 입으라고 권하면 ‘소매 넓은 옷을 입으면 몸이 활발치 못하고 새 옷을 입으면 똥을 지고 다니지 못할 것이라.’고 거절한다. 해마다 정월 초하룻날 아침이면 비로소 벙거지에 띠를 두르고 의복에 신발을 갖춘 뒤 인근에 두루 세배를 다닌다. 그러고는 돌아와서 다시 전의 그 옷으로 갈아입고 다시 바지게를 짊어지고 골목을 돌아다닌다.
  엄 행수야말로 이른바 더러움 속에 자기의 덕행을 파묻어 세상에 크게 숨은 사람일 것이다. 논어(論語)에 ‘소부귀(素富貴)하면 행호부귀(行乎富貴)하고 소빈천(素貧賤)하면 행호빈천(行乎貧賤)’이라 했는데 여기서 소(素)의 의미는 정할 정(定) 자의 뜻이다. 시경(詩經)에는 ‘숙야재공(夙夜在公)은 식명부동(寔命不同)이기 때문이라.’ 하였는데 여기서 명(命)의 의미는 분수라는 뜻이다. 대저 하늘이 만물을 낳을 때 저마다 정해진 분수가 있어 명(命)을 타고난 것이니 원망할 무엇이 있겠는가. <중략>
  엄 행수는 똥을 져서 밥을 먹고 있으니 지극히 불결하다 하겠으나 그가 밥벌이 하는 일의 내용을 따져 보자면 지극히 향기로운 것이다. 그리고 그의 몸가짐은 더럽기 짝이 없지만 의로움을 지키는 자세는 가장 꿋꿋하다. 그러한 뜻을 확대해 나간다면 비록 만종의 녹봉을 받게 되더라도 지조를 바꾸지 않을 것이다. 이 점에서 보면 깨끗한 가운데 불결한 것이 있고 더러운 가운데 청결한 것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음식에 곤란을 당해서 견디기 어려운 경우에는 매양 나보다 곤궁한 사람들을 생각하는데, 엄 행수를 생각하면 견디지 못할 것이 없다. 참으로 마음속에 도둑질할 뜻이 없는 사람이라면 엄 행수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것을 확대해 나간다면 가히 성인의 경지에도 이를 것이다. 대저 선비가 궁한 생활이 얼굴에 드러나면 부끄러운 일이고 뜻을 얻어 출세하매 온몸에 표가 나는 것도 부끄러운 일이다.
  저 엄 행수를 보고 얼굴을 붉히지 않을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래서 나는 엄 행수를 선생이라 부르는 것이다. 어찌 감히 벗이라 하겠느냐. 그래서 나는 엄 행수에 대해서 감히 이름을 부르지 못하고 ‘예덕 선생’(穢德先生)이란 칭호를 바친 것이다.”
  

■ 전체 줄거리(지학사)

  엄 행수는 똥을 치워 나르는 천한 자였으나 선귤자(이덕무의 호)는 그에게 예덕이라는 호까지 지어 주고 선생으로 대접하며 친하게 지냈다. 예덕 선생은 동네로 돌아다니며 똥을 져 나르는 일에 종사하는 미천한 사람이다. 사람들은 그를 엄 행수라 불렀는데, 엄은 성이고 행수는 늙은 역부를 뜻하는 말이다. 선귤자의 제자 자목은 스승이 사대부와 교유하지 않고 비천한 엄 행수와 벗하는 것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표시한다. 선귤자는 이해(利害)로 사귀는 시교(市交)와 아첨으로 사귀는 면교(面交)는 오래 갈 수 없다고 말하고, 마음으로 사귀고 덕을 벗하는 도의의 교를 해야 한다고 설득한다. 그는 이어서, 엄 행수는 신분이 미천하고 하는 일은 더럽지만, 마음이나 행동은 향기롭고 의롭기 때문에 예덕 선생으로 일컬으며 도의의 교를 나누지 않을 수 없다고 설명한다.

 

■ 핵심 정리

• 갈래 : 한문 소설, 풍자 소설
• 성격 : 풍자적, 비판적, 교훈적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배경 : 조선 후기, 한양
• 제재 : 바람직한 교우(交友)
• 주제 : 바람직한 벗의 사귐과 무실역행(務實力行)하는 엄 행수의 삶과 교훈
• 특징 :
 ① 설득하는 어조가 두드러짐.
 ② 지배 계층에 대한 풍자가 나타남.
 ③ 한자어 및 고사를 빈번하게 사용함.
• 의의 : 
 ① 소외된 하층민의 삶을 조명하여 바람직한 인간상을 제시함
 ② 계급 타파 의식과 평등사상을 나타냄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자신의 분수에 만족하며 무실역행(務實力行)하는 ‘엄 행수’의 모습을 통해, 신분과 체면 등 봉건적 가치를 중시하는 당대의 위선적 양반층을 풍자하고 있는 소설이다.
  선귤자의 제자인 자목은 스승이 당신을 따르는 양반들을 마다하고, 똥을 치우는 미천한 일을 하는 엄 행수에 대해 칭송하고, 교우를 하려고 하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그러자 선귤자는 아첨과 이득을 앞세워 친구를 사귀는 것은 진정한 교우가 아니며, 마음으로 사귀고 덕으로 벗을 하는 것이 진정한 교우라고 말한다. 또한, 엄 행수가 가진 여러 가지 긍정적 행동(안분지족하는 삶의 모습, 소박하고 검소한 삶의 모습, 실용적인 삶의 모습,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는 삶의 모습 등)을 묘사하여 그가 왜 엄 행수를 ‘예덕 선생’이라 하는 지를 설명한다.
  이 작품에서는 미천한 신분인 ‘엄 행수’를 긍정적인 인물로 묘사한 것으로 보아 작가가 가진 계급 타파 의식, 인간 평등사상 등을 엿볼 수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작품은 자기의 분수를 알고 그 속에서 삶의 즐거움을 찾는 엄 행수(예덕선생)를 통해, 진실된 사귐의 의미와 참다운 인간상을 제시한 작품이다.
 이 작품은 연암의 다른 소설들과 달리 선귤자와 자목의 대화를 중심으로 한 문답 형식을 통해 주제를 구현하고 있다. 제자 자목은 스승 선귤자가 비천한 신분인 엄 행수와 사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면서 이를 비판하는 물음을 던진다. 이에 선귤자는 엄 행수가 비록 신분과 직업이 미천하지만 분수를 알아 안분지족(安分知足)하고 근검절약하는 아름다운 덕을 갖추고 있어서 존경하는 마음으로 ‘예덕 선생’이라 부르고 그와 벗한다고 대답하며, 자목에게 이해나 아첨에 의해 맺어지는 인간관계가 아닌 올바른 교우(交友)의 도를 가르치고 있다.
 이러한 문답 형식은 작가의 의식을 효과적으로 드러내는 역할을 하는데, ‘자목’의 물음을 통해서는 당시 양반들의 허위의식과 위선에 대한 비판과 풍자를, 선귤자의 대답을 통해서는 사회적으로 성장하고 있던 서민 의식과 바람직한 인간상을 드러내고 있다.

 - 천재교육, 해법 문학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자목이 예덕 선생을 벗으로 사귀는 스승에 대해 비난한 이유(지학사)
 자목은 엄 행수(예덕 선생)를 “마을의 상놈이라 하류(下流)에 처한 역부로 치욕스런 일을 하는 자”라고 하며 스승 선귤자가 예덕 선생을 벗으로 사귀는 것에 대해 문제를 제기한다.
→ 자목은 당대의 위선적인 양반층을 대변하는 풍자적 인물임.
① 계급적 신분 질서를 옹호하고 있음.
② 사람이 하는 일이나 겉모습 등을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함.

2. 선귤자가 엄 행수의 삶을 높이 평가한 이유(지학사)
 벗에 대한 선귤자의 생각 : “큰 사귐은 안면을 보고 사귀는 것이 아니며 훌륭한 친구는 친소가 문제가 아니고, 다만 마음으로 사귀고 덕을 벗하는 것이다.”
→ 선귤자에게 중요한 친구의 덕목은 그 대상이 ‘덕(德)’이 있느냐 없느냐이지, 신분의 귀천이나 체면 따위가 아니다.

3. ‘예덕선생전’에 나타난 우도(友道, 친구를 사귀는 도리)(천재교육) 
 자목은 스승인 선귤자가 인분을 나르는 일을 하는 천한 이와 사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기나, 선귤자는 가장 비천한 일을 하는 이를 예덕선생이라 칭하며 친밀하게 지내면서 우도를 지킨다. 그리고 이를 통해 진정한 우도가 무엇인가를 자목에게 깨우쳐 주고 있다. 군자는 군자끼리 어울려 벗을 사귀되 변치 않는 진실된 사귐이 가능하지만, 소인은 소인끼리 어울려 벗을 사귀며 이해관계에 따라 신의를 저버리므로 참된 사귐은 있을 수 없다는 생각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4. ‘예덕 선생’의 시대적 의미(윤희재 고전문학)
 예덕 선생이 분뇨를 나르는 사람이라는 점에 근거하여 이 작품이 농사를 천시하는 사상을 비판한 작품이라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그러나 작품의 줄거리로 보아 예덕 선생은 직접 농사 일을 하는 사람은 아니다. 그는 전통적 신분인 사농공상(士農工商)의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인물이다. 그는 농부들에게 인분을 져다 주고 돈을 받아 살아가던 새로운 계층(임금 노동자)이라는 추정까지도 가능하다. 이 작품에서 예덕 선생이 가지는 의미는 분뇨를 나르는 역부나 농사꾼으로 제한되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분수를 알고 그 속에서 즐거움을 가지는 모든 인물로 확대되는 데 있다. 

 

■ 작가 소개

박지원 – 두산 백과

예덕선생전 - 박지원.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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