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주요 부분
그날도 기표는 담임 선생의 지시에 의해 체육부실에 내려가 우리 반 아이들의 체력 검사 통계를 내고 있었다. 그럴 시각 담임 선생이 말했다.
“66명이 탄 우리 배는 순풍을 맞아 참으로 순탄한 항해를 하고 있다. 다 여러분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알려 줄 게 있다. 여러분의 한 친구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그 자세한 얘기는 반장이 해 줄 것이다. 다만 담임으로서 당부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남의 일 아닌 내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 사람을 돕는 일에 앞장서 주기 바란다.”
담임 선생님이 교단에서 내려서고 그 대신 반장 임형우가 사뭇 엄숙한 표정으로 단 위에 섰다.
“담임 선생님의 말씀처럼 지금 우리 친구 하나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지금이라도 힘을 합쳐 그 친구를 구원해 주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서두를 잡은 형우는 언젠가 하굣길에서 내게 들려준 기표네 가정 형편을 반 아이들한테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은 형우의 혀였다. 나한테 얘기를 들려줄 때의 그런 적대감은 씻은 듯 감추고 오직 우의와 신뢰 가득한 말로써 우리의 친구 기표를 미화하는 일에 열을 올렸던 것이다.
기표 아버지가 중풍에 걸려 식물인간처럼 누워 있는 정경이며 기표 어머니의 심장병, 그러한 부모들을 위해서 버스 안내원을 하던 기표 여동생의 눈물겨운 얘기, 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는 기표네 식구들의 배고픔이 눈에 보이듯 열거되었다. 그런 가난 속에서도 가난을 결코 겉에 나타내지 않고 묵묵히 학교에 나온 기표의 의지가 또한 높게 치하되었다. 더구나 그런 가난 속에서 유급을 했기 때문에 1년간의 학비를 더 마련해야 했던 그 고통스러운 얘기도 우리들 가슴에 뭉클 뭔가 던져 주었다.
■ 전체 줄거리
새로운 담임은 1년간의 학급 운영 계획을 발표하면서 ‘자율’과 ‘공동 운명체’를 강조한다. 그리고 ‘나’를 임시 반장으로 임명하였다. 이것이 재수파의 리더인 ‘최기표’의 눈을 거슬리게 한 계기가 돼, 나는 강당 뒷편의 으슥한 곳에 끌려가 린치를 당한다.
일주일이 지난 뒤, 가정 방문을 한 담임은 내가 계속 반장을 맡았으면 하였으나 나는 극구 사양하고 대신에 ‘형우’를 추천하였다.
결국 담임은 형우를 반장으로 임명하고, 기표를 달래서 무력화시키기 위해 그를 부반장에 임명한다.
중간고사 때가 되어 반장 ‘형우’는 재수파들을 구제하려고 계획적인 부정 행위를 모의하고 시험에 응했으나, 기표가 오히려 사실을 감독 교사에게 신고하였다. 기표는 이 일에 대해 놀랐고, 형우를 린치하여 자신의 자존심과 존재를 부각시키려고 안간힘을 쓴다. 형우는 일주일씩이나 입원을 하였으면서도 학생 주임의 집요한 추궁에 침묵함으로써 기표를 두둔한다. 이런 일이 있은 후부터 형우는 일약 의리의 사나이로 우상이 되어 가고, 상대적으로 기표의 존재는 초라하게 전락하기 시작한다.
나는 이번 일이 반장 형우와 담임 간에 세워진 치밀한 계획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동안 기표를 따르던 재수파들도 완전히 와해되고, 기표의 어려운 가정 형편이 알려지면서 결국 사회 각지로부터 성금과 위문편지가 답지하고 급기야는 영화화하기 위한 시도에까지 이른다. 최기표는 초라하게 전락하여 연약하고 내성적인 존재가 되어 버린다. 기표가 결석을 하게 되고, 그의 어머니가 학교에 찾아와 기표가 여동생에게 보냈다는 편지를 내놓는다. 그 편지에는 “무섭다, 나는 무서워 살 수가 없다”라는 내용이 실려 있었고, 담임은 영화사 사람들을 만나기로 했는데 자신의 계획을 ‘기표’가 무산시켰다며 신경질을 부린다.
■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청소년 소설
• 배경 : 1970년대 말, 어느 도회의 고등학교
• 시점 : 1인칭 관찰자 시점
• 성격 : 완곡한 비판과 풍자적 어조, 교훈적, 사실적
• 주제 : 진실, 호의를 가장한 치밀한 위선의 무서움
• 특징 : 극적 제시와 분석적 제시 방법에 의해 인물은 생동감을 획득함.
• 인물 :
나(이유대) - 자존심이 강하고 상대방의 심중을 잘 감지하는 학생. 관찰자.
최기표 - 불량 청소년의 전형. 갖은 비행(蜚行)에도 불구하고 학생들의 혹평을 별로 받지 않는 인물. 담임 과 '형우'의 주도 면밀한 술책에 무서움을 느끼며 학교를 떠난다.
임형우 - 학급을 헌신적으로 잘 이끄는 모범생이나 위선적인 면이 있음.
담임 - 치밀한 성격에 권위주의적인 인물. 학급 관리에 능숙함.
구성 :
발단 – 새학기에 담임 선생은 반의 ‘자율’을 강조하고, ‘나’는 학생들의 머리 위에 군림하려는 담임 선생의 저의를 찔러 주려다 얼떨결에 임시 반장이 된다. 이 일로 ‘나’는 기표를 비롯한 재수파에게 ‘매쓰껍게 보였’다는 이유로 잔인한 린치를 당한다.
전개 – 담임 선생은 ‘나’에게 반장을 계속 맡아 달라고 하지만, ‘나’는 임형수를 추천한다. 또 담임은 ‘나’에게 은근히 학급을 위한 ‘조언(고자질)’을 해 줄 것을 제의하지만 ‘나’는 이를 거절한다. ‘나’는 항상 문제아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비난받지 않는 기표의 힘에 대해 생각한다.
위기 – 기표의 유급을 막기 위해 형우는 담임의 묵인 하에 조직적인 부정 행위를 계획하고, 기표는 이를 거부한다. 이 사건으로 인해 형우는 기표에게 린치를 당하고 병원으로 실려 가지만 가해자에 대해 입을 다뭄으로써 일약 학교의 영웅이 된다. 그 결과 재수파는 와해되고 기표는 급격하게 힘을 잃는다.
절정 – 기표의 어려운 가정 형편과 기표를 도우려는 친구들의 미담이 언론에까지 실리며, 마침내 기표의 이야기는 영화화될 단계에까지 이른다. 그럴수록 기표는 순하고 수줍은 학생이 되어 가고, 이제 더 이상 기표를 무서워하는 학생은 없게 된다.
결말 – 어느 날 기표는 ‘무섭다’는 편지를 동생에게 남긴 채 사라지고, 담임 선생은 기표 어머니의 걱정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채 기표가 영화사와의 약속을 어겼다며 화를 낸다.
■ 작품 해설 1
1980년 “세계의 문학” 여름 호에 발표된 단편 소설로, ‘나(이유대)’가 폭력을 휘두르는 문제아 기표와 정당치 못한 방법으로 그를 제압하려는 담임과 반장(형우)을 관찰하는 이야기이다. 인간 사회의 질서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어 가는가 하는 문제를 교실 공간으로 축소하여 보여 주는 작품으로, 표면적으로 보면 교사와 학생들의 문제를 다룬 것으로, 불량 학생이 담임의 치밀한 계획과 조작에 의해 선도되는 과정을 그린 것이지만, 이를 통홰 위선적인 지도층의 한계를 노출시키면서, 합법적인 권력과 벌거벗은 폭력과의 관계를 다루고 있다. 최기표의 몰락을 통해 합법적인 권력이 더 무서운 폭력일 수 있음을 보여 준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작품은 약간은 냉소적이나 꽤 날카로운 관찰력을 가진 ‘나(이유대)’의 시선을 통해 학교에서 일어나는 폭력과 권력의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나’가 처음 맞닥뜨린 폭력은 기표의 무서운 린치였는데 이는 본능적인 폭력이었다. ‘나’의 잘난 척 하는 모습이 기분 나쁘다는 이유였지만 이는 철저히 본능적 혹은 야성적인 폭력으로 어떤 계산에 의하거나 의도된 것은 아니다. 그래서 ‘나’뿐만 아니라 폭력을 당한 다른 아이들도 기표에 대해 혹평을 하지는 않난다. 기표가 분명 문제 학생이긴 하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어떤 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것이 간교함이 가미되지 않은 가장 본능적인 힘이기 때문이라고 판단하고 있다.
이와 달리, ‘나’가 두 번째로 목격한 폭력은 합법을 가장한 간교한 폭력이다. 담임과 반장 형우가 만들어낸 폭력은 겉으로는 폭력처럼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실제로는 치밀한 계획과 조작에 의해서 기표를 억누르는 합법적인 폭력이다. 기표를 악이라고 규정하고 그를 밀어내기 위해 교묘한 술책을 사용하는 그들은 학교라는 축소된 사회에서 기득권을 가지고 있다. 합법적인 권력을 가지고 행해지는 이러하 조작과 위선적 행위는 그래서 기표의 물리적 폭력보다 더 무서운 것으로 느껴진다.
작가 전상국은 선악의 대립을 그릴 때 오히려 악의 상징처럼 보이는 기표를 모범생인 형우보다 더 매력적으로 설정해 놓았다. 기표는 순수한 악마로 어떤 계산이나 의도를 가지고 행동하지 않는 반면, 형우는 담임의 비호 아래 진실과 호의를 가장하여 자신을 돋보이게 행동한다. 실제로는 기표를 미워하며 없어져야 할 존재로 무시하면서도 겉으로는 그를 배려하는 척 온갖 정성을 다한다. 기표의 어려운 가정 환경을 이용하여 그를 동정받아야 할 불쌍한 인간으로 만들어 버리고, 재수파들의 행동을 우정으로 둔갑시켜 미화함으로써 한순간에 기표의 힘을 없애 버린 형우의 위선은 합법을 가장한 더 무서운 폭력적 모습이다.
그래서 이 교실 속 정치는 인간 사회의 질서가 어떻게 형성되고 유지되어 가는가 하는 문제를 아주 극명하게 보여준다. 또한 이 교실 공간은 1970년대의 경쟁적이고 이기적인 출세 지향적인 시대 공간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하나같이 부정적인 면을 지닌 이 소설의 등장인물들이 참다운 인간에 대해 목마름을 상징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을 감안한다면, 이유대의 분석적 해설은 나름대로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준다. 이성보다 더 무서운 지성의 간교함, 치밀한 위선의 무서움은 이제 세상으로 나아가야 하는 청소년들은 물론 일반인들에게도 큰 교훈을 던져 주고 있기 때문이다.
- 타임기획, 소설119 플러스 5권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담임 선생’이 강조하고 있는 ‘자율’이란 말의 허구성
‘자율’의 참된 의미는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의 행동을 규제’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신을 통제하는 것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고자 하는 방향성을 정하는 데 있어서도 동일하게 작용해야 한다. 그러나 담임 선생의 ‘자율’은 이미 자신이 정해 놓은 방향대로 학생들이 스스로 순순히 따라와야 함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즉, 자신이 정해 놓은 목표에 학생들이 맹목적으로 따라오는 것을 의미하므로 이는 결국 ‘자율’이 아닌 ‘타율’에 가까운 것이다.
2. ‘벌거 벗은 폭력’과 ‘합법적 폭력’의 의미
이 소설의 주제 의식은 기표로 상징되는 ‘벌거벗은 폭력’과 이를 무력화시키는 ‘합법을 가장한 폭력’의 관계에서 드러난다. 폭력 자체는 선(善)과 대비되는 악(惡)을 의미하지만, ‘벌거벗은 폭력’은 적어도 그 자신을 숨기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순수함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담임 선생과 형우의 폭력은 표면적으로는 합법적이고 선의인 것처럼 보이나 그 내면에 위선을 숨기고 있다는 점에서 더 무서운 악(惡)으로 비춰지고 있다. 이는 그들이 ‘자신을 돋보이게 하기 위해 악마를 곁에 두고 이용’하는 신(神)과 같이 불순(不純)한 의도를 가진 위선자이기 때문이다.
■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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