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 산 - 이호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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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아침에 깨어 보니 온 누리엔 수북하게 첫눈이 내렸는데, 대문 옆 블록 담 위에 웬 흰 남자 고무신짝 하나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얼마 안 신은 듯한 거의 새 고무신짝이었다. / 아내와 나는 다 같이 께름칙한 느낌에 휩싸였다. /  “웬일일까. 누가 장난을 했나.” / 내가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중얼거리자, / “아무리, 장난으로 저랬을라구요.” / 아내는 어쩐지 뾰루퉁해지면서 말하였다. 아내는 현대 여성이어서라기보다는 본시부터 이런 일에는 대범한 편이었는데, 요즘 조금은 나를 닮게 된 모양이었다.

  사실은 이런 일에는 내 쪽에서 훨씬 소심하고 예민한 편이어서 아내는 이런 나를 어지간히 구질구질하게 여겨 왔던 것이다.

  간밤에도 근처 어느 집에서 굿을 하는 듯,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다. 텔레비전 안테나가 무성해 있고 젊은 샐러리맨 부부가 많이 살고 있는 동네인데도, 웬일인지 한밤중이면 굿하는 꽹과리 소리가 가끔 멀리 가까이 들리곤 하는 것이다. <중략>

▶담 위에 놓여진 고무신짝을 보며 불길함을 느끼는 ‘나’와 아내

  우리 마을 서쪽 멀리 청(靑)빛의 마식령 줄기가 가로 뻗어 갔는데, 마을 사람들은 이것을 ‘큰 산’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내 경우 이 ‘큰 산’은 그곳에 그 모습으로 그렇게 있다는 것만으로 항상 나의 존재의, 나를 둘러싼 모든 균형의, 어떤 근원을 떠받들어 주고 있었던 것이다. 내가 태어난 후, 가장 먼저 익숙해진 것은 어머니 젖가슴이었겠지만, 두 번째로 익숙해진 것은 그 ‘큰 산’이었을 것이다. 아침저녁으로 우리 집에서 정면으로 건너다 보이던 그 ‘큰 산’, 문만 열면 서쪽 하늘 끝에 웅장하게 덩더룻이 솟아 있던 그 청빛 큰 산. 그 ‘큰 산’에서부터 산과 골짜기들이 곤두박질을 치듯이 내려오다가 서서히 길게 뻗으면서 골짜기 하나가 갑자기 흰 치맛자락 펴듯이 큰 내를 이루며 내려오는 가에 미루나무 숲이 우거지고, 우리 마을이 앉아 있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 마을 앞에서부터 좁은 들판이 시작된다. 이 들판은 더욱 퍼지면서 밑으로 흘러 내려가, 두 야산 끝머리의 한 머리는 원산 거리 쪽으로 닿고, 한 머리는 비옥한 안변평야의 북쪽 끝으로 가 닿는 것이다.

  바람도 없이 비는 패연히 쏟아졌고 저녁답이라, 들판은 휑하게 비어 있었다. 웃 보매기 마을로 올라가는 길과 우리 마을로 들어가는 갈림길까지는 빈 달구지 서넛이 가고 있어, 그런 대로 나도 심심치는 않았다. 달구지꾼들은 늙수그레하였고, 소 엉덩이 뒤에 바싹 붙어 앉아 웅숭그리고 있었는데 싸릿대로 엮은 삿갓을 쓰고 쉬임없이 웅얼거리고들 있었다. 비를 맞고 가는 어린 나더러도 저희들 빈 달구지에 올라타라고 했을 법도 한데, 어째선가 그날따라 하나같이 모두가 냉랭하였다. 나도 그날따라 웬일인지 그들의 그것을 당연한 것으로 어린 나이에 걸맞지 않게 접어 생각하면서, 무리를 해서까지 굳이 올라타고 싶지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그 달구지꾼들과 헤어져 마을로 들어가는 안길로 혼자 꺾이면서, 비로소 나는 저녁답과 비를, 그리고 ‘큰 산’이 안 보이는 쓸쓸함을, 분명하게 의식했다. 아, 그 때의 그 분명하던 의식! 그리고 그 쓸쓸함!

▶존재의 근원인 ‘큰 산’을 생각하는 ‘나’

  바람 한 점 없이 패연하게 쏟아지는 빗속에, 온 누리는 음산하고 오로지 써늘할 뿐이었다. 천지에 들리는 것은 지척지척 비 내리는 소리뿐이었다. 아, 그 아득함! 아득함! 그 비 내리는 소리도, 귀를 곤두세워 빗소리를 의식하면서 듣자고 해야, 밭 가운데 여기저기 세워 놓은 수숫대 무더기에 빗방울 듣는 소리로 구체적으로 들릴 뿐이지, 그냥 멍청한 귀에는 그 빗소리가, 그저 그렇게 낮은 가락의, 그 무슨 하늘과 땅의 둔탁한 울림소리 같은 것으로, ‘큰 산’을 잃어버린 허공 같은 소리로만 들리던 것이었다.

  그 ‘큰 산’이 구름에 깝북 가려 보이지 않아서, 좁은 들판은 더 푸욱 패어 보이고, 양옆의 야산도 빗속에 더 시커멓게 뚜릿뚜릿해 보였다. 빠안히 들여다보이는 우리 마을도 집집의 굴뚝마다 젖은 저녁 연기는 내고 있었지만 여느 때 없이 쓸쓸해 보였다.

  ‘큰 산’이 구름에 가려서 안 보이는 것이, 어찌 이렇게도 이 들판에, 이 누리에, 쓸쓸한 느낌을 더하게 하는 것일까. 야산을 야산이도록, 강은 강이도록, 이만한 분수의 들판을 이만한 분수의 들판이도록, 저렇게 빠안히 건너다보이는 우리 마을을 우리 마을이도록, 제 분수대로 제자리에 쏘옥 들어앉지 못하게 하는 것일까.

  바로 이때 나는 길 가장자리 무밭에 아무렇게나 버려진 그 ‘지카다비’짝을 흘낏 보았던 것이며, 순간 화닥닥 놀라 머리끝이 쭈뼛해지는 공포감에 휘감겨서 미친 듯이 빗속을 달렸던 것이다. <중략> 

  ▶‘큰 산’을 볼 수 없어서 공포감을 느끼는 ‘나’

  나는 마치 머릿속의 저 아득한 맨 끝머리에 쩌엉스런 깊고 빈 들판이 있다가, 그것이 또 확 열려 오는 듯한 공포 속으로 휘어 감겼다. / 아내도 까맣게 질린 얼굴이다.

  “대체 어떻게 된 셈이지?” / “돌아다니고 있어요, 저게. 염병 돌 듯이.”

  아내는 빠른 입놀림으로 이렇게 헐떡거리듯이 지껄였다. 나는 그 아내를 금방 신내리는 무당 쳐다보듯이 을씨년스러운 느낌 섞어 쳐다보았다.

  “돌아다니다니, 대체 무슨 소리야?” / “이 집에서 저 집으로, 저 집에서 이 집으로.”

  “그때 그 고무신짝은 분명히 쓰레기통에 버렸지 않아.”

  “아무래도 께름칙해서 그날 밤 당신이 들어오시기 전에 내가 다시 들고 나갔던 거예요.” / “무엇이? 그럼 그걸 어느 집 담장 너머로 버렸었다는 말인가?”

  “그렇지요.” / 아내는 당연하다는 듯이 약간 우락부락한 얼굴까지 되며 말하였다.

  “왜?” / “왜라뇨, 당신 그걸 지금 나한테 따져 묻는거예요?”

  “던지긴 어느 집으로 던졌어?” / “몰라요.” / “…….”

▶‘나’의 집에 다시 돌아온 고무신짝

  그러니까 이렇게 된 모양이다. 새벽 일찍 뜰 한가운데 그 고무신짝이 떨어진 것을 본 그 어느 집의 부부들도 쩌엉한 느낌에 휘어 감기며 간밤내 근처에서 들리던 굿하는 꽹과리 소리 같은 것을 떠올리며 공포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별로 복잡하게 궁리할 것도 없이, 그날 낮이든가 밤에, 이웃집 아무 집에건 담장 너머로 그 고무신짝을 훌쩍 던졌을 것이다. 남편 모르게 아내가, 혹은 아내 모르게 남편이. 그만한 자존심들은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액(厄)은 이웃집으로 옮아 보내고, 제 집은 일단 마음을 놓았을 것이다. 그러자 담장 안에 웬 고무신짝 하나가 떨어진 것을 본 그 집에서도, 그렇게 제 집으로 기어 들어온 액을, 멀리는 못 쫓고, 그날 낮이면 낮, 밤이면 밤에, 근처 이웃집으로 또 던져 버렸을 것이다. 그 이웃집에서는 다시 이웃집으로, 또 그 이웃집으로, 순이네 집에서 영이네 집으로, 영이네 집에서 웅이네 집으로, 웅이네 집에서 건이네 집으로, 이런 식이었을 것이다.

 모두 현대적인 교육을 받은 터여서 자존심들은 있었을 것이다. 모두가 합리적인 사람 대우는 대우대로 받고 싶었을 것이다. 그러나 대우는 대우고, 겪는 것은 겪는 것이다. 그들은 서로 상처 한 군데 입음이 없이, 그 고무신짝만 이웃집 담장 너머로 던지면 되었던 것이다. <중략>

▶아내가 버린 고무신짝이 다시 돌아와 당황해하는 부부

  “대체 저눔의 것을 어쩌지?” / 나는 이미 액투성이 때가 엉기엉기 묻은 듯한 그 고무신짝을 만지기도 싫어서, 그것을 엇비슷이 건너다보며 투덜거렸다.

  “어쩌긴 어째요, 놔두세요, 내가 처리할게.”

  아내는 독(毒) 오른 표정이 되며, 악착같이 해보겠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처리하다니 어떻게?” / “아주 머얼리 보내지요. 이따가 밤에.”

  “산에라도 가져다가 버릴 요량인가?”

  “뭣 허러 산에 가져가요. 우리가 그렇게 질 수는 없는 거 아녀요.”

하고, 아내는 다시 말하였다.

  “밤에 저눔의 걸 들고 버스 타고 멀리 가져갈 터에요. 하다 못해 동빙고동에라도.”

  “뭐라고?” / 나는 입을 벌리며, 악착같이 해볼 기세인 시뻘게진 아내의 얼굴을 마주 쳐다보았다. 동시에 초등학교 4학년 적의 그 ‘지카다비’짝과 그때 그 ‘큰 산’이 구름에 깝북 가렸던 교교한 산천을 떠올렸다.

▶다른 동네에 가서 고무신짝을 버리고 오겠다고 하는 아내

  “ ‘큰 산’이 안 보여서 이래, 모두가.” / 내가 나지막하게 혼잣소리로 중얼거리자, 아내도 나를 귀신 내리고 있는 박수 쳐다보듯이 쳐다보고 있었다.

  “당신 이제 무슨 소리 했소. 대체 ‘큰 산’이 뭐유, ‘큰 산’이.” / “…….”

  그 ‘큰 산’은 청(靑)빛이었다. 서쪽 하늘에 늘 덩더룻이 웅장하게 퍼져 있었다. 아침저녁으로 혹은 네 철을 따라 표정은 늘 달랐지만, 근원은 뿌리 깊게 일관해 있었다. 해 뜨기 전 새벽에는 청청한 빛으로 무겁게 싱싱하고 첫 햇볕이 쬐이면 산머리에서부터 백금색으로 빛나고 햇볕 속의 한낮에는 멀리 물러앉은 청빛이었다. 해 질 녘 저녁에는 골짜기 하나하나가 손에 잡힐 듯이 거멓게 윤곽을 드러내고 서서히 보랏빛으로 물들어 간다. 봄엔 봉우리부터 여드러워지고 겨울이면 흰색으로 험준해진다. 가을에는 침착하게 물러앉고, 여름이면 더 높아 보인다. 그 ‘큰 산’ 쪽으로 마파람이 불면 비가 왔고, ‘큰 산’ 쪽에서 바다 쪽으로 샛바람이 불면 비가 그치고 하늘이 개었다. 그 ‘큰 산’은 늘 우리 모든 사람의 마음속에 형태 없는 넉넉함으로 자리해 있었던 것이다. 그 ‘큰 산’이 그곳에 그렇게 그 모습으로 뿌리 깊게 웅거(雄據)해 있다는 것이, 우리들 존재의 어떤 근원을 이루고 있었던 것이다. 깊숙하게 늘 안심이 되었던 것이다.

▶‘큰 산’을 그리워하는 ‘나’

  아, 그 ‘큰 산’, ‘큰 산’. / 그날 밤 아내는 악착같이 해볼 기세로, 시뻘게진 얼굴로, 그 ‘고무신짝’을 신문지에 둘둘 말아 싸 가지고 어디론가 나갔다가, 아홉 시가 지나서야 비시시 웃으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과연 나갈 때의 뭉뚱그러진 표정은 가셔지고, 무거운 짐이라도 벗어 놓은 듯이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소리도 안 물었고 아내도 구태여 아무 소리도 안 하였다. 우리는 이렇게 이 정도로는 서로 존중해 줄 줄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아내의 그 일은 그런대로 그 나름의 차원으로 성공한 모양이었다.

▶‘고무신짝’을 해결하고 만족해하는 아내


■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소설, 현대소설

• 성격 : 풍자적, 회상적

• 배경 : - 시간적: 1970년대

- 공간적: 젊은 샐러리맨 부부가 많이 사는 동네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제재 : 고무신짝, 큰 산

• 주제 : 이기주의에 빠진 현대인 비판

• 특징 : 

 ① 소재(고무신, 큰 산)의 상징성을 통한 주제 암시

 ② ‘나’와 아내의 대화를 통해 내면 심리 표현.

 ③ 현재와 과거의 사건이 긴밀하게 연계됨

 ④ 자연물에서 느낀 서술자의 주관적 체험과 인식이 사회적 의미로 확대됨


■ 전체 줄거리

 ‘나’는 비교적 대학 출신의 젊은 샐러리맨 부부가 많이 사는 마을에 사는데, 가끔 굿하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를 불길하게 여길 만큼 소심한 아내와 ‘나’는 별것 아닌 것처럼 애써 외면한다. 어느 날 첫눈이 내린 아침, ‘나’와 아내는 마당에 떨어져 있는 흰 남자 고무신짝 하나를 보고 께름칙하게 생각하며 불안해한다. ‘나’는 고무신짝을 보고 어린 시절 밭에 버려진 ‘지카다비’짝 하나를 본 뒤 공포에 떨었던 기억을 떠올린다. 아내는 밤에 몰래 남의 집 담장 너머로 그 신발을 던져 버렸는데, 어느 날 열흘 전의 일처럼 담 밑에 고무신짝이 다시 떨어져 있는 것을 목격한다. 아내는 그것을 가지고 멀리 버스를 타고 가서 버리고 오겠다고 하고, ‘나’는 마을 사람들이 벌이는 ‘고무신짝 떠넘기기’ 소동이, 어릴 때 마을 사람들에게 하나의 정신적 지주로서 자리하고 있었던 그 ‘큰 산’ 같은 공동체적 동질성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그날 밤 아내는 신문지에 싼 고무신짝을 갖다 버리고 다소 홀가분해진 마음으로 돌아왔지만, ‘나’는 존중의 의미로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어느 날 첫눈이 내린 아침에 ‘나’의 집 마당에 떨어진 고무신짝과 관련하여 일어나는 사건을 통해 현대인들의 이기주의를 고발하고 있다. ‘나’의 마을에는 비교적 대학 출신의 젊은 샐러리맨 부부가 많이 사는데, 이런 사람들조차 고무신짝을 불길하게 여겨 이웃집 담장 너머로 던지는 모습을 통해 이기적인 소시민들의 모습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나’는 이러한 사건의 원인을 그들이 근원적인 동질감, 즉 ‘큰 산’을 잃어버렸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며 대상의 부재에 대한 큰 상실감을 드러내고 있는데, 이는 조화의 질서와 윤리성의 회복을 위해서는 마음의 근원이 되는 ‘큰 산’이 필요하다는 작가의 의식이 반영된 것이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작품은 남의 집 담장 너머로 고무신짝을 던져 버리는 마을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현대인들의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인 속성을 비판하고 있다. 작가는 이렇듯 사회 구성원이 조화를 이루지 못하는 원인은 사람들이 마음의 중심을 상실했기 때문이라고 보았다. 이 작품에는 마을 공동체에게 안정과 균형을 느끼게 해 주고 그들을 하나로 묶어 주었던 ‘큰 산’에 대한 갈망이 드러나 있다.

 - 2017학년도 EBS 수능특강 해설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큰 산’의 의미

  이 작품에서 ‘큰 산’은 중심 소재로서 주제와 관련된 상징적 의미를 갖는다. ‘큰 산’은 어린 시절의 ‘나’가 어머니 다음으로 익숙해진 존재이고, 마을의 ‘야산’, ‘들판’, ‘강’ 등을 ‘야산’, ‘들판’, ‘강’답게 존재하도록 지켜 주고 보살펴 주는 존재이다. ‘나’는 그러한 ‘큰 산’이 ‘나’의 존재의 근원을 떠받들어 주고 모든 것의 균형을 잡아 준다고 믿는다. 그래서 ‘나’는 ‘큰 산’을 느낄 수 없는 순간에 ‘지까다비’짝을 보고 공포를 느낀 것이다. 현재 ‘나’의 마을에서는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고무신짝’이 액운으로 받아들여져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떠돌아다닌다. 이는 남이 불행해지건 말건 나만 상처 입지 않으면 된다는 식의 이기주의가 낳은 결과이다. 이토록 이기주의에 빠진 현대인들에게 필요한 것은 무엇일까. 바로 ‘나’를 든든하게 받쳐 주던 ‘큰 산’이다. ‘큰 산’이 없어져 현대인들은 불안과 공포에 빠져 남을 생각할 틈이 없게 되었다. 모든 존재를 지키고 보살피며 넉넉함을 지닌 ‘큰 산’. 그것은 바로 ‘대자연’의 다른 이름이라 할 수 있다.


2. ‘고무신짝’의 기능

  이 작품의 중심 소재인 고무신짝은 굿이라는 미신적 요소와 결합하여 사람들로 하여금 불길한 존재로 여겨진다. 누군가에 의해 버려진 고무신짝이 액운을 남에게 전가하기 위한 것으로 받아들인 사람들은 그 액운을 남에게 떠넘기는 데 혈안이 된다. 결국, 남이야 어떻게 되든 자신만 불행하지 않으면 된다는 이기주의가 고무신짝을 통해 드러난다. 즉, 고무신짝은 사람들의 내재된 의식을 드러내는 기능을 한다.

  한편, 결말부에서 아내가 고무신짝을 멀리 가져다 버리는 것은 군사 정권하의 1960년대 소시민들이 느끼는 공포감을 형상화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작가는 당시의 정치 현실을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으면서 ‘큰 산’이 부재하는 당대의 혼란상과 그에 따른 소시민들의 공포감을 아내의 행위로 향상화한 것이다.


3. 결말의 의미

  ‘고무신짝’을 둘러싸고 한바탕 소동을 벌이게 된 ‘나’와 아내는 내다 버린 고무신짝이 다시 돌아오자 그것을 어떻게 처리할지 고민에 빠진다. 결국 처음과 마찬가지로 아내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고무신을 버리고 오는데, 불길한 고무신짝을 이웃에 버리는 사람들의 행동에 씁쓸해했던 ‘나’는 아내의 행동을 묵인한다. 아마도 아내가 버린 고무신짝은 또다시 이 집에서 저 집으로 떠돌아다닐 것이고 어쩌면 다시 악몽처럼 ‘나’와 아내에게 돌아올지도 모른다. 작가는 아내가 고무신짝을 어딘가에 버리게 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음으로써 현대 사회의 이기적인 세태가 앞으로도 지속될 것임을 암시하고 동시에 경고하고 있다.


4. ‘나’가 ‘지카다비’를 무섭게 느낀 근본적인 이유

  어린 시절 ‘나’가 ‘지카다비’를 보고 느낀 공포는 지카다비 자체에 대한 것이 아니라 주변 사물의 질서와 균형을 잡아 주고 존재의 근원을 떠받들어 주는 ‘큰 산’의 부재 때문이다. 즉, ‘나’의 공포는 ‘큰 산’의 부재로 제 모습을 잃은 자연물들을 보고 느낀 한없는 아득함과 쓸쓸함 때문이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어릴 적 ‘나’의 심리는 현재의 ‘나’가 ‘고무신짝’을 보고 불길함을 느끼게 된 근원적인 이유와 통한다.


5. 역순행적 구성을 통한 ‘큰 산’의 의미 조명

  집 마당에 떨어진 ‘고무신짝’을 보고 공포감을 느낀 현재의 ‘나’는 어린 시절 ‘지카다비’짝을 보고 공포감을 느낀 기억을 떠올린다. 당시 ‘나’가 길에 버려진 ‘지카다비’짝을 보고 겁에 질렸던 것은 평소에 늘 곁에 있다고 느낀 ‘큰 산’을 느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갑작스레 자신의 앞에 놓인 과거의 ‘지카다비’짝과 현재의 ‘고무신짝’은 사건의 유사성으로 인해 ‘나’로 하여금 ‘큰 산’의 의미를 되새기게 한다. 이 작품은 현대인들의 이기적인 행위가 ‘큰 산’의 부재로 인한 것이라는 주제 의식을 자연스레 불러오기 위해 현재에서 과거로 돌아가 ‘큰 산’의 의미를 조명하면서 그 원인을 밝히고 있다.



■ 작가 소개

이호철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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