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무대
어떤 아파트와 회사 사무실, 그리고 길거리를 다양하게 나타낼 수 있는 무대. 무대가 구태여 사실적일 필요는 없다. 대체로 무대 우측은 아파트의 실내, 좌측은 회사 사무실로 구분된다. 관객석 가까운 무대 전면은 길거리, 복도 또는 공원 구실을 한다. 관객과 아파트의 실내 사이는 그대로 트여 있지만, 그 사이에 벽이 가로막혀 있다고 상상하면 된다. 실내 앞 무대는 또한 아파트의 복도도 겸한다.
이 극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재 상황 이외에는, 즉 과거지사를 말하거나 재연할 때는 공간 처리에 구애될 필요가 없다.
교회 종소리와 더불어 막이 오르면 아파트의 실내 모습이 나타난다. 종소리가 여전히 들려오는 가운데 김상범이 아랫바지만 겨우 걸치고 위 파자마는 그대로 어깨에 맨 채 침실에서 나오며 하품을 한다. 이어 눈을 비비며 창문의 커튼을 헤친다. 밝은 아침 햇살이 실내 가득 들어찬다. 상범은 크게 기지개를 하고 나서 이른바 실내 체조를 한다. 어깨가 쑤시고 허리가 아프다. 서른한 살이라는 나이에 비해 이런 현상은 너무나 빨리 찾아온 것 같다. 다음엔 소파며 마루에 흩어져 있는 잡지를 주워 모은다. 이어 무대 앞에 나와 관객을 향한다.
상범 오늘 일요일 아침, 저 김상범은 몹시 피곤을 느낍니다. 밤새 잠을 청할 수가 없으니까요. 이렇다 할 근심이 있어서가 아니요, 뭐 그렇다고 해서 토요일 저녁에 보통 건강한 월급쟁이들이 그렇듯이 술집에서 과음을 해서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 잡지 때문입니다. 천일 은행 뒷골목에서 한 권에 2백원 주고 산 이 영어 잡지 말입니다. 영어 잡지이기 때문에 물론 글은 읽을 수가 없습니다. 전 대학을 나오긴 했지만 영어하고는 관계가 없습니다. 어학에 대한 소질이 모자라서가 아니라, 요새 대학 영어 선생들의 교수 방법이 나빠서 그렇다고 믿고 싶습니다. 이 정도의 구실이 있어야만 마음에 부담이 안 생기니까요. 요는 이 잡지에 실린 수많은 사진 때문에 잠을 못 잤지요. 젊은 여자들의 나체 사진, 나의 공상의 심지에 슬슬 불을 붙여 주는 이 매혹적인 사진들……. 사진 한 장을 보면서 한 시간 또는 두 시간이 나 공상을 합니다. 밤새 사진을 보고 있노라면 닭이 울고 두부 장수가 지나가고, 이윽고 쓰레기 차가 이 아파트 입구에 와서는 나의 피곤한 공상 속의 미국 여자를 무수한 쓰레기와 더불어 쓸어 가지고 갑니다. 남은 것은 (크게 하품을 하고서) 이 하품뿐입니다. 이 잡지를 산 데도 이유는 있었습니다. 어제 토요일에 영화관에 갔었지요. 가장 이상적인 즐거움은 남녀가 같이 즐기는 데 있습니다. 하나님이 남녀의 쌍을 지어 준 데는 이유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모두 짝을 지어 구경 가는데 유독 저만은 혼자서 갔습니다. 같이 갈 사람이 있어야죠. 영화의 내용은 열정적인 사랑인데, 보고 나오니까 마음이 이상해졌습니다. 혼자서 종로를 한 바퀴 삥 돌고, 명동의 인파에 밀려 양장점을 드나드는 젊은 여자들의 얼굴이며 몸뚱어리를 슬슬 훔쳐보다가 천일 은행 뒤에서 이 영어 잡지를 두 권 사 들고 들어왔습니다. <중략>
상학 나…… 이제 한 달 후면 결혼을 하게 될 것 같아.
상범 네? 결혼이요? 아, 축하해요. 벌써 장가를 들어야 했었는데……. 아닌게 아니라 나도 결혼을 할 생각하고 있었던 참인데, 암만해도 형님보다 앞서 장가간다는 것이 좀 이상해서……. 참 잘됐어요!
상학 러니 말이야. 아버지 환갑에 손님을 좀 초대하고도 싶지만 한 달 후엔 내 결혼식이 있으니 같은 손님들을 두 번 청할 수도 없고…….
상범 그야 그렇지…….
상학 그러니 암만해도 이번 아버지 환갑은 네가 좀 주동이 돼서 도와주었으면 좋겠어.
상범 그렇기도 하군요. 사장님한테 직접 사정 말씀 드릴까…….
상학 잘 알아서 해 주렴.
상범 근데 아주머니 될 분은 어떤 여자예요?
상학 너도 잘 아는 여자지.
상범 저도요?
상학 요 위층에 있는 미스 박 말이야. 가정주부로서는 그만이기에…….
상범 아니, 박용자 씨 말입니까?
상학 그래, 아마 너도 반대는 안 할 거야.
상범 저요? …… 아니요…… 아니요.
상학 (팔뚝시계를 보더니) 이런, 시간에 늦겠다! 그럼 내 2, 3일 내에 또 연락할게.
상범 박용자 씨하고는 얘기가 다 됐어요?
상학 그럼, 인천에도 몇 번 놀러 왔었구. 약혼식은 생략하기로 했어. 결혼식도 간단히 하기로 하구. 그때 같이 영화 구경 간 것이 인연이 됐어. 그럼 몸조심해라.
상학이 걸어 나간다. 상범은 움직이지 못한다. 잠시 그대로 서 있다.
상범 (체념하기에는 너무나 억울하다는 태도로) …… 이거…… 결혼 상대자를 빼앗긴데다가 아버지 환갑잔치 비용도 내가 주선해야만 하는 팔자입니다.] 이젠 할 말이 없습니다. 저의 나이는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살아 봤자 한 20년……. 나머지 20년마저 밤낮 손해만 보는 세월일 것이라고 생각하니 앞이 캄캄해집니다. 저는 여태까지의 모든 생활을 제가 아는 상식의 테두리 안에서 해 왔습니다. 인천서 근무할 때의 일입니다. 여름에 하도 무덥기에 해수욕장에 나갔죠. 갑자기 저쪽 바위 밑에 옷을 입은 채 기어 들어가는 젊은 여자를 보았습니다. 틀림없는 자살입니다. 저는 밀짚모자를 내던지고 달려가 그 여자를 끌어냈습니다. 얼굴도 예쁜데 왜 자살을 하려고 했는지. 모래 위에 끌어내서 살렸더니 그 여자는 고맙다는 말 대신에 저의 뺨을 갈겼습니다. 그러니까 경찰은 저를 파출소로 연행하더군요. 이 사회에선 저의 상식이 통용 안 되는 것 같습니다. 이제부터 물에 빠진 놈에겐 돌을 안겨 줘야겠습니다. 자리를 양보하느니 발로 걷어차 길을터야겠습니다. 즉, 기존 상식을 거부하는 겁니다. 우선 새 상식을 회사에서 한번 실험해 보았습니다.
■ 핵심 정리
• 갈래 : 희곡
• 배경 : 1960년대, 서울
• 제재 : 출세욕과 물질 만능주의에 빠진 젊은이의 삶
• 주제 : 현대 사회의 물질 만능주의와 출세 지향주의적 가치관에 대한 풍자와 비판
• 특징 :
① 서술적 화자를 등장시켜 극을 이끌어 감.
② 당대 사회의 부정적 가치관을 반어적인 어법을 통해 비판함.
■ 전체 줄거리
소심하지만 성실한 김상범은 늘 실패와 손해뿐인 삶을 살아가게 된다. 김상범은 정직한 방법만으로는 사회에 적응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부정적인 방법으로 살아가기로 결심한다. 그러던 중 우연한 기회에 사장에게 신임을 얻어 임시 사원에서 정규 사원이 된다. 상사인 경리 과장이 공금을 유용한다고 모함하여 그 자리를 차지하고, 사장의 며느리이며 비서인 미망인 성아미와 전무와의 스캔들을 이용하고, 임신 중인 그녀와 결혼까지 한다. 또 암흑가의 건달을 포섭하여 그에게 강도질을 시킨 후 뒤에서 총을 쏘아 그를 죽임으로써 자신에게 큰 공이 있는 것처럼 조작한다. 결국 그는 상무가 되고 사장까지 바라볼 수 있게 된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삶에 만족하지 못하고, 오히려 대학교수를 버리고 초등학교 교사가 된 형과, 불철주야 노력하여 입사 시험에 합격한 동생이 행복하고 만족스럽다고 생각한다.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사회 현실에 대한 풍자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는 이근삼의 대표작이다. 1960년대 산업화 시대를 배경으로 한 이 작품의 주인공 김상범은 발단 부분에서는 우직하고 성실한 태도로 살아가는 젊은이로 등장한다. 그러나 그는 점점 적자생존의 비정한 사회 현실에 눈을 뜨게 되고, 점점 더 야비한 처세술을 익혀나가게 된다. 그는 우연한 기회에 회사의 정규직 사원이 되고, 마침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사장의 며느리와 결혼하는데에 성공하지만, 결국 그 성공은 온전한 것이 아니었다. 작가는 김상범의 아내가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다는 사실을 보여줌으로써 김상범의 삶에 대해 풍자한다. 제목인 ‘국물 있사옵니다’는 당시의 유행어인 ‘국물도 없다.’의 반어적 표현이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작품은 산업화 시대에 널리 퍼진 출세주의와 배금주의를 풍자하고 있다. 어리숙하지만 정직했던 상법이 세속적인 성공의 방법에 눈을 뜨면서 출세를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속물적 인간이 되어 가는 과정을 희극적인 언어를 통해 그려 내고 있다. 주인공인 상범이 관객을 향해 인물과 사건을 설명하고 논평하는 해설자의 역할을 수행하는 등 서사극적 특성이 강하다.
- 2017년 EBS 수능특강 해설 참고
■ 심화 내용 연구(지학사 T솔루션 자료실 참고)
1. 연출가로서의 서술적 화자
이근삼 희곡에서 도입부에 등장하는 서술적 화자들은 앞으로 무대에서 벌어지게 될 일은 현실이 아니라 연극일 뿐이라고 말함으로써 극 밖에 있던 관객들을 극 안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무대 위에 등장한 서술적 화자는 관객의 극적 환상을 파괴하는 동시에, 설정된 연극의 상황을 직접적으로 전달함으로써 극의 도입부에 대한 관객의 이해를 돕는다.
이 작품의 상범은 중심인물인 동시에 서술적 화자로, 장면은 중심인물인 상범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제시되고, 상범의 주관에 의해 사건의 의미가 규정된다. 또 사건 전개는 상범의 주관성을 매개로 진행된다. 이는 정거장식 드라마에서 중심인물이 그가 가는 길에 놓인 정거장에서 만나는 인물들과의 만남을 통해 인식의 변화를 갖게 되는 구조와 유사하다. 다른 인물들은 중심인물과 만나는 경우에만 등장함으로써 중심인물의 시점에서, 중심인물과 연관되어 나타난다. 정거장식 기법은 줄거리의 연속체를 장면의 연속으로 대체한다. 장면의 연속에서 통일을 이루고 있는 것은 줄거리가 아니라 중심인물이고, 줄거리에 개연성을 부여하는 것은 중심인물인 서술적 화자 상범의 정서와 심리이다.
2. 느슨한 플롯의 구조
‘느슨한 플롯’이란 플롯의 계획에 관한 강조의 정도와 연관된다. 느슨한 짜임새의 플롯은 갈등을 풀고 해결함에 있어 작중 인물과 행동이 어떤 주어진 역할을 담당하도록 노력하지 않음을 말한다. 이러한 플롯의 주된 효과는 ‘정서와 경험의 상태’를 표출하는 데 있다.
즉 이 작품은 전복된 가치관의 부조리한 사회를 폭로하고 비판하기 위해서 돌발적인 우연으로 인한 비논리적 사건 전개의 과정을 밟아 가는 ‘느슨한 플롯’을 선택하고 있다. 이렇게 방만하고 느슨한 짜임새는 비인간화된 현대인들의 모습과 전복된 가치관으로 인한 부조리한 사회 구조의 모순을 드러내는 데 아주 효과적으로 작용하고 있다.
3. 절충적 사실주의 희곡
이근삼은 사실주의극의 기본 테두리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시간과 공간 변화를 관객과의 약속이나 약간의 소도구와 조명 사용으로 자유로이 한다거나, 해설자를 등장시켜 극에서 사적 거리감을 창출한다거나, 극히 부분적이긴 하지만 극장주의적 기법을 사용한다거나 하여 절충적 사실주의극 경향을 보인다.
이 작품 역시 절충적 사실주의 희곡으로서 철저한 인과율에 의해 빈틈없이 전개되는 전통적인 폐쇄형의 사실주의 희곡과는 달리 전통적인 플롯에서 일탈하고 있다. 그러나 전통적 플롯의 인과율에서 일탈하고 있는 희곡들이 난해함으로 일관하는 데 비해 이 작품은 특유의 흥미로운 전개와 명쾌한 응집력을 보여 준다. 이것은 잘 짜인 극의 틀 대신 작위적 상황에 기초한 자유로운 극의 흐름과 예기치 않은 극적 동기의 도입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예고나 준비 없이 도입된 의외의 동기가 탈일상적인 행동이라는 큰 파장을 불러일으킨다. 우연한 기회와 중요한 변화라는 ‘불균형적 인간관계’에 의한 구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상범의 출세 과정은 비상식적이고 우연적인 만남과 남의 약점을 이용하는 기회주의의 비논리적 질서를 보여 준다. 또한 이 작품에서의 ‘우연’의 위력은 인물들의 자기 지탱력을 능가한다. 그리하여 그것은 우연이라기보다는 ‘운명’의 성질에 가깝지만, 역시 운명으로서의 필연성은 결여되어 있다.
4. 제목의 상징적 의미
이 작품의 제목인‘국물 있사옵니다’는 당시(1950~60년대) 유행하던 은어인 ‘국물도 없다.’라는 말을 차용하여 이에 대한 상대적인 의미로 쓰인 것이다. 평범하게 기존의 상식으로 살아가던 상범이 새 상식을 좇아 살아가지만 역시 ‘국물 없는’ 생활이긴 마찬가지다. 평범한 사람으로서의 상범이나, 배금주의적이고 출세지향적인 일종의 악인으로서의 상범은 모두 사회의 비리나 부패에 피해 받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다. 이것을 이근삼은 ‘국물 있사옵니다’라는 말로 역설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 작가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