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일행이 구류간에서 풀려나왔을 때에는 산에 있는 황거칠 씨의 수도 시설은 완전히 철거되고, 파괴됐던 다섯 개의 우물은 호동팔 측에 의해서 복구 작업이 시작되고 있었다. 드디어 소원 성취를 한 동팔이가 ‘마삿등’ 일대의 수도를 독차지하겠다는 것이었다. / ‘죽일 놈!’
하고, 황거칠 씨가 이를 악물고 있는 판에 뜻밖에 동팔이 측에서 사람을 하나 보내왔다. 용건이 또 걸작이었다. — ‘마삿등’ 일대의 배수 시설을 자기에게 팔든가(물론 헐값으로), 정 놓기 싫으면 자기와 공동 경영을 하자는 것이었다. 아니꼽게도 이쪽의 약점을 노린 수작이었다.
“가거라, 이 개 같은 놈아! 밥을 처먹는 놈이 그 따위 심부름을 하고 다녀?”
황거칠 씨는 벼락 같은 소릴 쳤다. 차라리 거저 내버렸음 내버렸지, 동팔이에게 시설을 판다든가, 더구나 공동 경영 따위 쓸개 빠진 짓은 입에 담기조차 창피한 일이었다. 교섭을 왔던 사람이 코를 싸고 돌아간 뒤에도 그는 내처 주먹을 떨어 댔다.
‘누굴 자기 같은 놈인 줄 알았던가? 뻔뻔스런 놈 같으니!’
아무리 생각해도 분했다.
▶호동팔의 요구를 단호하게 거절한 황거칠 씨
배수 시설의 양도를 거절당한 동팔이는 어디 보자는 듯이 ‘마삿등’ 일대에 자기대로의 시설을 하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매일같이 많은 물을 쓰지 않으면 안 되는 콩나물 장수, 두부집, 그리고 두꺼비가 그려진 소주의 깃발을 늘어놓고 소주랑 막걸리, 청주까지 만들어서 파는 ‘두꺼비집’ 같은 데서는 만부득이 호동팔의 물이라도 쓰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밖에도 동팔이와 특별한 관계 — 가령’ 그의 목수 허드렛일을 맡아 있다든가, 인척 관계인 몇몇 사람들도 그 물을 쓰기 시작했다.
▶‘호동팔’의 물을 쓸 수밖에 없는 마삿등 사람들
한편, 복수라기보다 자기의 권리를 되찾기 위해 여러 날 여러 밤을 골똘히 궁리해 오던 황거칠 씨는 드디어 호동수의 산이 아닌 다른 산에서 물을 끌어오기로 결심했다.] / ‘어디 제놈들의 산이 아니면 물이 없을까!’
이튿날부터 황거칠 씨는 예의 쇠 작대기를 찾아 들고 집을 나섰다. 수정암 훨씬 뒤 굴밤나뭇골이란 데 가서 새 수원을 찾기로 했다. 그곳은 안심할 수 있는 국유 임야였다. <중략>
그는 뭉클한 채 일어섰다. 굴밤나뭇골로 되돌아온 그는 바삐 산으로 싸댔다. 냉큼 물풀이 있는 곳을 찾아야 한다. 그의 경험에 의하면 물이 솟을 만한 자리에는 반드시 특수한 종류의 멧풀들(가령, 개구리갓이니 쇠스랑개비 등속의 습지 생풀들을 그는 통틀어 물풀이라고 불렀다.)이 나 있었다.
그럴 만한 곳을 한참 쏘다닌 끝에 다행히 그는 그럴싸한 자리를 몇 군데 찾았다. 물풀이 나 있었다. 그는 반색을 하며 쇠 작대기로 땅을 쿡쿡 찔러 보았다. 한 곳은 토질도 물러 보였다. 그는 용기를 얻었다.
▶다른 산에서 ‘물’을 찾기 시작한 황거칠 씨
용기를 얻은 황거칠 씨는 물풀이 한결 짙어 보이는 곳에 퍼져 앉아서 담배를 연거푸 두 개비나 태웠다. 물풀이 있는 곳을 쉬 찾은 것은 좋았으나 이윽고 일껏 만들었던 수원을 빼앗긴 일, 그리고서 다시 새 우물을 파야 할 일들을 생각하면 새삼 입맛이 쓰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그에게는 허덕이는 조국과 더불어 겪어야 될 시련의 하나려니 생각하면서 발끝에 있는 물풀을 한 움큼 푸짐하게 뜯어 쥔 채 뚜벅뚜벅 산을 내려왔다.
▶황거칠 씨가 새로 우물을 팔 것을 작정하고 산에서 내려옴
그날 밤 그는 실근이를 비롯해서 가까이 지내는 통·반장 몇 사람과 저번 날 일로 말미암아 함께 구류를 살던 청년들을 자기 집으로 불렀다.
먼저, 동팔이와 화해를 않음으로써 본의 아니게 주민들에게 물 곤란을 주고 있는 자기의 안타까운 심정을 사과 겸 말하고, 그날 낮 산을 돌아본 얘기와 자기의 새로운 계획을 비쳐 보였다.
“한 번 진다는 건 두 번 질 장본이라고 생각합니다. 결국 우리들은 지다가 지다가 지금 같은 꼴들이 된 게 아닐까요? 내가 그런 엄두를 낸 것은 결코 내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그런 게 아닙니다. 아시겠어요?”
황거칠 씨는 자못 흥분된 어조로 말했다. 평소 말을 잘 안 하는 그의 입에서 어떻게 그런 말들이 쏟아져 나올까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새삼스레 어떤 희망이라기보다는 묵은 분노라도 되살아나는 듯 눈마저 이상스럽게 이글거리는 것 같았다.
“댔심더! 내일부터 당장 시작합시더. 그까짓 새미 몇 개쯤, 여러 사람이 가문 하리면 다 안 파겠능기요. 똥파리의 원수를 어서 갚아야 잠이 오지, 온…….” <중략>
▶새로 우물을 파기 위해 마을 사람들의 동의를 구하는 황거칠 씨
마을 사람들이 떠난 뒤, 황거칠 씨의 할멈은 북창 위 시렁에 모셔 둔 세존단지 곁에, 영감이 산에서 가져온 물풀을 얹어 두고는 성주 세손에게 한참 동안 기도를 올렸다.
쇠뿔도 단김에 뺀다는 격으로 날이 새기가 바쁘게 ‘마삿등’ 남정들은 마을 뒤 언덕배기로 모여들었다. 실근이란 통장이 지난 밤 황씨 집에서 얘기된 계획을 말하자 죄다 물 곤란을 겪던 터이라 누구 하나 반대하는 사람이 없었다.
“그거 참 잘 생각했소. 더런 놈이 가져오는 물 묵을 뿐 했딩이!”
“그렇기 말임더.” / 모두 잘코사니를 치며 돌아갔다. 그것은 비단 호동팔이가 미워서만 하는 소리가 아닌 것 같았다.
‘마삿등’ 따라지 — 그러나 악바리들은 조반을 끝내기가 바쁘게 괭이랑 삽들을 들고, 더러는 황거칠 씨 집 앞길에 모여 들고 더러는 바른총으로 굴밤나뭇골로 올라갔다. 골은 거기서 십 리나 떨어져 있었다.
▶우물을 파기 위해 산으로 올라가는 마을 사람들
좁은 골목길에는 호동팔의 인부들이 열심히 파이프를 묻고 있었다.
“우리들 것 다칠라, 단딩이 하소!” / 동네 사람들은 지나오면서 동팔이의 인부들을 보고 이렇게 주의를 시켰다. 그들은 황거칠 씨의 것을 ‘우리들 것’이라고 말했다. 말하자면 그만큼 그 수도 시설을 아끼는 심정들이었던 것이다.
“예 예, 그기싸예 비미이 알아서 하겠능기요. 염려 마이소.” / 호동팔의 인부들은 그러한 동민들의 심정을 십분 이해하는 말눈치들이었다. 얼굴에도 미안한 빛이 나타나 있는 것 같았다. 어떤 치는 숫제 그런 의민 듯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동팔이의 인부들에게 주의를 주는 마을 사람들
■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소설, 민중소설, 참여소설
• 배경 : 1960년대 부산 낙동강 인근의 마삿등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성격 : 현실 비판적, 민중적, 저항적
• 제재 : 산의 수도 시설
• 주제 : 소외당한 인간들의 생존 문제와 서민들의 생존권을 위협하는 지배 세력에 대한 비판
• 특징 :
① 표현이나 내용면에서 리얼리즘적 성격이 강함
② 비속어를 사용하거나 방언을 사용하여 인물의 성격을 실감나게 보여 줌
③ 특정 인물을 중심으로 서술자가 직접 서술하여 독자의 이해를 돕고 있음
④ 정의를 지키고 얻기 위해 항거하는 개인의 의지가 집단의 의지로 승화됨
■ 전체 줄거리
마삿등 판자촌에 살고 있는 황거칠 씨는 마을에 수도가 들어오지 않자 직접 산의 물을 끌어다 마을의 물 걱정을 해결한다. 그때 친일로 부를 쌓은 집안의 호동팔이 등장하여 산의 소유권을 주장하고, 재판에서 진 황거칠 씨는 물 사용권을 빼앗겨 버린다. 이어 강제 철거가 시작되고 이 과정에서 울분을 참지 못한 황거칠 씨와 동네 청년들이 경찰에 연행된다. 강제 집행을 방해하지 않겠다는 각서를 쓰고 나온 황거칠 씨는 새로운 우물을 파기로 하고, 마침내 국유지 산에다 새로운 우물을 파고 수도를 연결한다. 그러나 이것 역시 국유지를 불하받았다는 산 임자가 나타나게 되고 다시금 수도 시설을 빼앗길 위기에 처한다. 이를 지키기 위해 황거칠 씨는 다방면으로 노력하게 되고 다시 재판까지 가게 되지만 총선으로 갑자기 재판이 종결된다. 황거칠 씨는 이에 굴하지 않고 단결력이 강한 T촌 사람들과 함께 불하 취소 투쟁을 하면서, 이번 일이 끝날 때까지 정부로부터 받은 독립 유공 감사장을 조상들의 무덤에 묻을 것을 다짐한다.
■ 작품 해설 1
이 소설은 마삿등에 사는 황거칠이라는 한 인물의 모습을 통해, 서민들의 생존권이나 다름없는 물을 사용조차 못하게 하는 가진 자들의 악행을 고발하면서 사회의 부조리한 면을 들춰내고 있는 작품이다.
이 작품의 중심 소재인 ‘물’은 서민들의 생존권을 상징적으로 드러내 주면서, 한편으로 인물 간의 첨예한 갈등의 중심에 있는 소재이기도 하다. ‘물’에 대해 황거칠 씨는 마삿등 사람들의 편익을 위한 개인의 노력과 열정을 보여 주는 반면, 일제 앞잡이면서도 또다시 지배 권력으로 등장한 호동팔 개인에게 ‘물’은 부를 축적할 수 있는 수단이 되고 있다.
이러한 사고의 차이로 유발된 갈등을 통해 가진 자들인 지배 권력의 횡포와 이러한 횡포에 저항하는 황거칠 씨의 저항 의식을 잘 구현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에는, 부당한 세력이 판을 치는 광복 직후의 부조리한 사회상과 황거칠이라는 인물로 대변되는 부조리한 현실에 대한 저항 의지를 통해 당시대에 대한 작가의 비판 의식이 드러난다고 할 수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1971년 초에 발표하여 제3회 ‘예술문화상’을 받은 작품으로 ‘사회 부조리에 항거한 황거칠’이라는 등장인물이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는 모습을 중심으로 내용이 전개된다. 낙동강 근처에 있는 ‘마삿등’이라는 판자촌을 배경으로 가난한 사람들의 삶의 모습과 불의에 항거하는 투쟁을 사실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 작품에서 ‘황거칠’이 싸우는 대상은 단순히 개인적인 차원의 문제가 아니다. 1960~70년대 도시 개발 문제, 국유지의 비윤리적인 불하 문제, 강제 철거로 인한 인권 유린 등이 대상이 된다. 작가는 작품속에서 이러한 부정적이고 비윤리적이며 불합리적인 국가 권력과 법, 당시의 사회 구조에 대한 ‘황거칠’의 항거를 통해 그 부당함을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 타임기획, 소설119 플러스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산거족’의 공간적 배경
주민들이 ‘마삿등’이라고 부르는 산은 근대화된 이름으로 ‘S산’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마삿등 주민들은 ‘S산’이라고 하지 않고 그저 ‘마삿등’이라고만 부른다. ‘마삿등’은 일본말로 ‘참모래언덕’이라는 뜻에서 온 말이다. 이런 이름을 계속 써내려 오는 것으로 보아 당대에도 과거 일제의 잔재가 청산되지 않고 그대로 내려오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호씨 형제들에게서도 볼 수 있다. 당시에는 과거 친일파였던 사람들이 부끄럼 없이 떵떵거리며 살 수 있는 사회였다. 두 번째로 마삿등 주민들이 근대화된 이름인 ‘S산’으로 부르지 않고 ‘마삿등’으로 부른다는 것을 통해 마삿등 주민들은 근대화를 부정적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마삿등’은 대도시의 바로 옆에 붙어 있는 모래로 된 등성이로서, 대도시의 미관을 온통망치고 있다. 빠르게 변화하는 도시와 그 안에서 화려하게 피어나는 빌딩들과는 대조적으로 마삿등은 황량한 모래벌판에 두꺼비처럼 붙어 있는 판잣집으로 당대 사회의 양면을 잘 보여 주고 있다.
2. ‘산’이라는 공간이 지니는 의미
‘산거족’의 배경이 되는 ‘마삿등’은 자본에 의해 밀려난 변두리 인간의 애환과 낙후한 경제 현실에서 고통받는 민중의 입장을 대변하는 공간이다. 소유권을 갖고 있지는 못하지만, ‘진정한 주인’이라고 할 수 있는 ‘마삿등’ 주민들에게 산은 그들의 생존권, 즉 삶의 터전이라는 절대적인 가치를 지닌다. 반면, 외지인에게 그 산은 탐욕의 대상이라는 상반된 가치가 적용된다. 그리고 이러한 두 개의 이질적인 가치가 하나의 공간에 공존하면서 갈등을 촉발시킨다. ‘마삿등’은 주민들의 식수원이 되는 우물과 산 수도가 있는 곳이다. 이러한 점 때문에 갈등이 내포되어 있는 공간으로 존재한다. 그것은 ‘산’이 힘없는 자들의 공간으로서 폭력적인 수탈의 횡포 속에 무기력하게 노출되어 있기 때문이고, 세간의 집중을 받을 수 없는 외진 위치에 있기 때문이며, 바로 이러한 공간적 특성 때문에 가뜩이나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더욱 가진 자들의 횡포 속에서 착취당하는 것이다. ‘산’을 빼앗기는 일은 그나마 있었던 삶의 터전을 빼앗기는 일일 뿐 아니라, 정신적인 지주 혹은 주체적 정신을 짓밟히는 일이 되는 것이므로 인물들은 그 현실에 맞서 저항하는 태도를 갖는 것이다.
■ 작가 소개
'문학 이야기 > 현대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국물 있사옵니다 -이근삼 (0) | 2017.04.10 |
---|---|
눈길 - 이청준 (0) | 2017.03.30 |
유자소전 - 이문구 (0) | 2016.09.01 |
병신과 머저리 - 이청준 (0) | 2016.08.26 |
사수 - 전광용 (0) | 2016.08.1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