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수 - 전광용


■ 본문

 흰 눈이 쌓인 산록(山麓)의 바람 소리가 시리다. 그것은 바로 사형 집행장에서의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권총 사격에 몇 점, 카빈에 몇 점, 엠원 소총에는 몇 점 하는 명사수의 하나로, 나의 소속 부대에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이 사형 집행의 사수로 지명될 줄은 몰랐다. 또 그렇게 달갑지도 않은 일이다. 더욱이 일단 지명된 이상에는 피해 낼 도리가 없다. 아무도 이런 일을 선두에 서서 하겠다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도 전기장치로 된 집행장에서 단추 하나를 누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계가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여 주는 경우라면 몰라도, 이런 경우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전에 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관리들의 고역을 상상해 본 일이 있다. 그럴 때마다 소름이 끼쳐 그런 일을 어떤 불우한 사람들이 직업으로 삼고 맡아 할 것인가 하고 동정했던 것이다. 사실 그 경우의 죽는 사람과 죽이는 사람 사이에는, 개인적으로 생명을 여탈(與奪)할 하등의 이해관계가 없는 것이 거의 전부의 경우이기에…….

 지금 나의 경우는 약간 다르다. B가 오늘 집행되는 수형(受刑)의 당사자라는 것을 알았을 때 나는 순간 — 그것은 참말 계량할 수 없는 눈 깜짝할 찰나였지만 — 복수의 만족감 같은 회심의 미소를 지을 뻔했던 것이다. B의 얼굴에 겹쳐 경희의 모습이 떠올랐다. 그러나 그것들이 다 어릴 때부터의 벗이던 순진하고 아름다운 정에 얽매인 인간의 모습이 아니라, 언젠가 가족 동반에서 만난 당황하는 표정들이 점점 혐오를 느끼게 하던 그런 모습들인 것이다.


 나는 눈을 떴다.

 십 미터의 거리. 전방에는 B가 서 있다. 목사의 기도는 끝났다. 유언(遺言)이 없느냐고 물었다. B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내 앞에서 졌다고 항복한 일이 없는 B다. 그렇게 서로 대결이 되는 경우는 늘 내가 양보 하는 위치에 서게 되었었다. 오늘도 이 숨 가쁜 마지막 고비에서, B의 목숨을 앞에 놓고 B와 나는 여기 우리 둘이 한 번도 같이 와 본 적이 없는 눈 덮인 산골짜기에서 이렇게 대결하고 있는 것이다. 나를 알아보는 B의 눈은 조금도 경악의 표정은 없다. 일체의 체념 이 나까지도 안중에 없게 하는가 보다. 그러면 나는 벌써 이 마지막 순간에도 이미 B에게 지고 있는 것이다. 만일 내가 이 자리에 사수로 나타나지만 않았다면 B는 무슨 말이든 한 마디 남겼을는지도 모른다. 적어도 경희에게만은 무슨 마지막 당부의 한 마디를 전하여 주고파 했을 것이 아닌가.

 다섯 명의 사수는 일렬로 같은 간격을 두고 나란히 횡대로 늘어섰다. B의 손은 묶인 대로이다. 그의 눈은 검은 천으로 가리어졌다. 왼쪽 가슴 심장 위에 붙인 빨간 헝겊의 표지가 햇빛에 반사되어 더 또렷하다. 헛기침 소리 이외에는 아무의 입에서도 말이 없다. 다만 몸들의 움직임이 있을 뿐이다.

 B가 이적적인 모반(謀反)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신문 보도를 본 얼마 후 나는 B의 집으로 경희를 찾아갔다. 이 근래의 B의 의식 상태에는 약간의 이상적인 징조가 나타나 발작적인 행동이 집안에서도 거듭되었다는 사실은 이날 들은 이야기다. B는 나의 절친한 친구의 한 사람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그 생각은 버리지 않는다. 그와의 개인적인 대결이 치열할수록 나는 그를 잊어 본 적이 없다. 내 삼십 년의 지나온 세월에 있어서 B는 내 마음속에 새겨진 가장 오랜 친구였고, 접촉된 시간도 가장 긴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와 그는 이해관계를 초월하여 사귀어 왔다. 다만 경희

의 경우를 비롯한 몇 고비의 치열한 대결은 B와 나의 의식적인 적대 행위가 아니라, 환경적인 조건이 주어진 불가피한 운명 같은 것이 더 컸다고 나는 생각하고 싶은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는 나의 아끼던, 아니 현재도 아끼고 있는 유일한 친구이고, 그와의 어쩔 수 없는 대결이 거세면 거셀수록 그에 대한 관심이 더 강력하게 작용했던 만큼, 그의 혐의를 받는 죄상에 대한 내막은 이 이상 더 소상하게 늘어놓고 싶지는 않다.

 나를 만난 경희는 시종 울기만 하였다. 그것은 오랫동안 떨어졌다가 만난 육친의 애정 같은 것이어서 그 자리에서는 그와 나 사이에 아무런 장벽도 없는 것만 같았다. 경희는 남편인 B의 구출 문제보다도 나에 대한 자신의 변명 같은 호소로 일관하였다. 사변 통에 나의 행방은 알 길이 없었고, 수복 후에 우연히 만난 것이 나와 자기와의 과거를 가장 잘 아는 B였기에, 나의 생사에 대한 수소문을 서두르는 사이에 나의 소식은 묘연했고, B와의 결혼이 정식으로 성립되었다는 것이다. 나로서는 지금이라도 경희가 B를 버리고 나의 품으로 뛰어오겠다면 받아들일 수 있는 애정의 여신(餘燼)이나 아량 이 없는 바도 아니었지마는, 몇 번이고 죽음에 직면했던 나로서, 경희의 행방에 대한 관심에 얼마 동안 적극적이 되지 못하였던 나 자신에 대한 자책이, 이제야 더욱 거세게 싹터 나로 하여금 아무의 힐난(詰難)도 못 하게 만들었고, 오히려 경희에 대한 미안한 생각으로 가슴이 뿌듯해지게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미 때는 늦었다. B의 구명 운동이 우리 둘의 긴급한 일로 당면될 뿐이었다.


■ 핵심 정리

갈래 : 단편소설, 전후소설, 심리소설

성격 : 사실적, 비판적, 심리적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배경 : ① 현재 – 한국 전쟁 무렵의 한 병원, ② 과거 – 어린 시절의 학교

제재 : 친구와 경쟁하던 학창 시절과 전쟁 체험

주제 : 인간관계에 내재한 경쟁의식

인물 : 

 ▷ 나 - 어린 시절부터 친구 B와 끝없는 대결의 상황을 맞이하는 인물. B와의 대결 속에서 이겨야 한다는 오기(傲氣)와 늘 지고 있다는 패배감을 동시에 느끼고 있다. 

 ▷ B - ‘나’의 영원한 적수.  

 ▷ 경희 - ‘나’의 연인. 후에 B의 아내가 됨으로써 ‘나’에게 패배감을 안겨 준다. 

구성 :

 발단 - ‘나’가 깨어나면서 과거를 회상한다. 

 전개 - 선생님께 벌을 받게 되면서 첫 대결을 벌인다. 실력 경쟁도 심하게 벌인다.

 위기 - 경희를 차지하기 위한 공기총 대결. ‘나’의 패배. 

 절정 - 6·25 동란 중 B를 다시 만나고, 경희가 B의 아내가 되었음을 알게 된다. 

 결말 - B는 이적적(利敵的) 모반 혐의로 구속되고, ‘나’는 B의 사형 집행 사수(射手)가 된다. 


■ 전체 줄거리

 ‘나’는 병원에서 눈을 뜬다. B와의 마지막 대결을 회상하며 어쩌면 지금도 자신이 B에게 지고 있다고 생각한다. B와의 첫 대결은 우연히 이루어졌다. ‘곰’이라는 별명을 가진 선생님이 말끝마다 습관적으로 내는 “엠” 소리를 세다가 서로의 뺨을 때리는 벌을 받게 되었다. 서로의 뺨을 때리다가 ‘곰’ 선생님에 대한 반감이 B에게 옮겨지며 서로 손에 힘을 더하게 되고, ‘나’는 B의 손에 맞아 코피를 흘렸다.

 같은 중학 한 반이었던 ‘나’와 B는 실력 경쟁에서도 치열했다. 또, ‘나’와 B는 모두 ‘경희’를 좋아했다. 졸업반이 되던 해 B는 ‘나’의 책갈피에서 ‘경희’의 편지를 발견했다. ‘나’는 ‘경희’와의 관계를 B에게 고백했다. 그러나 B는 양보보다는 대결을 택했다. 상대편을 나무 옆에 세워 놓고 귀 높이 되는 나무통 복판을 공기총으로 정확하게 맞혀 이기는 쪽이 ‘경희’를 차지하기로 하고 대결을 벌였다. ‘나’는 헛방을 쏘았지만 그의 총알은 내 귓바퀴에 상처를 내면서 목표물을 명중시켰다.

 그 후 ‘나’와 ‘경희’는 형식적인 절차를 밟지는 않았지만 약혼한 바나 다름없었다. 그러던 중 6·25 동란을 계기로 모두 흩어지고 ‘나’가 새로 전속된 부대에서 B를 다시 만났다. B는 ‘경희’의 소식을 모른다고 했다. 그러나 휴가 중 외출에서 돌아오다가 B의 아내가 된 ‘경희’를 우연히 만난다. 결국은 B에 대한 배신감과 자신에 대한 패배감을 맛보게 되었다.

 B가 이적적(利敵的)인 모반 혐의로 구속되었다는 신문 보도를 본 후 ‘나’는 ‘경희’를 찾아갔다. ‘나’는 그간 B와의 대결은 의식적인 적대 행위가 아니라, 환경적인 조건에 의한 불가피한 ‘운명’ 때문이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B의 구명(救命) 운동을 한다. 그러나 허사였다.

 B의 사형 집행 사수(射手)로 ‘나’를 비롯한 다섯 명이 지목된다. B를 들고 달아날 수는 없을까 생각하며, 마지막으로 허공에 총을 쏘고 ‘나’는 의식을 잃는다.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1959년에 발표된 작품으로, 전후 소설의 범주에 넣을 수 있다. 이 작품은 주인공인 ‘나’가 간첩 협의를 받은 옛 친구 B를 처형하고 기절해 쓰러진 뒤, 병원에서 깨어나 B와 자기의 과거 관계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이루어져 있다. B는 어린 시절부터 ‘나’와 친구였으면서도 미묘한 경쟁 관계를 강요받은 인물이다. 나는 B의 사수로서 그를 죽일 수 있는 위치에 있었음에도 죄책감 때문에 주저하다가 결국 총을 가장 늦게 쏘게 되고 패배감에 젖는 고민 많은 유형의 인물이다. 기존의 전후 소설들이 전쟁으로 인한 비참한 실제 현실의 묘사에 치중했다면, <사수>는 구체적인 두 인물인 ‘나’와 B를 대상으로 삼아 그들의 인간관계가 전쟁을 거치면서 어떻게 파국으로 치닫는가를 보여주고 있다. 그러나 두 사람의 갈등은 전쟁 이전부터 내재하고 있었고, 그것은 인간 심리에 내재한 외부적 영향을 쉽게 받는 속성과 경쟁의식에서 비롯된다. 따라서 이 작품은 전후 소설적 성격과 함께 인간의 내면을 깊이 있게 묘사한 심리 소설의 성격도 지니고 있다. 


■ 작품 해설 2

 이 작품은 표면적으로는 여자를 사이에 두고 경쟁하는 평범한 소재를 통하여 친구 간의 우정과 갈등을 보여 주고 있다. 그들의 관계는 전쟁을 겪으면서 크게 흐트러지고, 결국은 친구의 사형 집행을 담당하게 되는 과정으로 변화된다. ‘나’와 친구 B는 어린 시절부터 맞수이다. 6.25전쟁의 혼란기 속에서 ‘나’와 B는 사수(射手)와 사형수(死刑囚)의 관계로 대립한다. 마지막 대결에서 B는 다른 사수에 의해 죽음을 맞는다. 이렇듯 이 작품은 친구 사이의 승부를 이야기하는 듯하지만, 실은 그 속에 전쟁으로 인해 급격히 변모하고 파멸해 가는 인간의 모습과 인간이 지니고 있는 본능적인 경쟁의식을 보여 주고 있다. 두 주인공의 운명적이라 할 수 있는 끈질긴 대결은 우리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인간의 삶에 개입하여 그 관계를 미묘한 방향으로 전개시키는 어떤 비밀스러운 힘이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을 하게 한다. 인간은 무수한 형태의 대립 관계를 겪으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이 모든 대립은 인간 스스로의 의지보다는 그와 같은 대립을 요구하는 외부적 상황에 의해서 이루어진 경우가 더 많다. 이렇듯 이 작품은 미묘한 대립적 인간관계를 통하여 비극의 본질과 그 책임의 궁극적 소재(所在)를 탐구하고 있는 것이다.


■ 심화 내용 연구

1. 인물 간의 강요된 경쟁과 ‘나’의 운명적 패배감

 이 작품은 주인공인 ‘나’와 B의 운명적인 경쟁 관계를 형상화하고 있다. ‘나’와 B는 본래 친구였으나 상황적 조건에 의해 번번이 경쟁 관계에 빠지고 ‘나’는 항상 패배감을 느낀다.

2. B를 가장 늦게 쏘는 ‘나’의 행위의 의미

 ‘나’와 B의 갈등은 우연적으로 생겨나 끝내 해소되지 못하고 전쟁 상황 속에서 파국으로 치달으며, ‘나’가 B를 사살하는 데서조차 이겼느냐 졌느냐를 고민하는 어리석은 양상으로 전개된다.

3. <사수>의 실험적 기법

․ 시간의 연역적 배치 방법 : 이 작품은 ‘나’가 B의 사형을 집행하고 그 충격으로 병원에 입원하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하지만 이 부분은 결말 부분에 나오는 B의 사형 집행 장면 바로 뒤에 나오는 것이 시간의 흐름으로 볼 때 더 적절하다. 즉, 이 작품은 ‘나’가 과거를 회상하는 형식으로 진행되며, 회상의 내용은 ‘나’와 B의 운명적 대결 의식과 그 원인에 대한 탐구이다.

․ 의식과 무의식이 연결된 서사 구조 : 이 소설은 주인공의 서술이 두 가지 플롯으로 진행되는데, 하나는 B를 사형 집행한 뒤에 그 충격으로 병원에 누워 있는 ‘나’의 의식이고, 또 하나는 ‘나’가 생각하고 있는 과거에 대한 ‘나’의 무의식적 회상이다. 이러한 두 가지 경로를 병행하는 서술을 통해 인물의 심리를 속도감 있게 전개하고 있다.


4. <사수>의 문체적 특징

 <사수>는 주인공인 ‘나’의 비참한 현재 심리 상태를 바탕으로 하여 그러한 심리가 생겨날 수밖에 없었던 과거의 상황을 ‘나’의 회상으로 재현하고 있다. 대개 긍정적 회상은 느린 시간 전개를 통해 음미되는 경향이 있지만, <사수>와 같이 자기의 불행의 원인을 탐구하기 위한 회상의 경우에는 충격적인 사건을 간결체로 형상화하고 그로 인한 심리 전개를 속도감 있게 묘사하는 것이 효과적이다.


■ 작가 소개

 전광용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문학 이야기 > 현대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유자소전 - 이문구  (0) 2016.09.01
병신과 머저리 - 이청준  (0) 2016.08.26
메밀꽃 필 무렵 - 이효석  (0) 2016.07.06
너와 나만의 시간 - 황순원  (1) 2016.06.13
만무방 - 김유정  (3) 2016.05.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