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동이 앞에 막아서면서부터 책망이었다. 걱정두 팔자요 하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상기된 눈망울에 부딪힐 때, 결김에 따귀를 하나 갈겨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동이도 화를 쓰고 팩하게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 생원은 조금도 동색하는 법 없이 마음먹은 대로는 다 지껄였다. 어디서 줏어먹은 선머슴인지는 모르겠으나 네게도 아비어미 있겠지. 그 사나운 꼴 보면 맘 좋겠다. 장사란 탐탁하게 해야 되지, 계집이 다 무어야. 나가거라, 냉큼 꼴 치워. 그러나 한마디도 대거리하지 않고 하염없이 나가는 꼴을 보려니, 도리어 측은히 여겨졌다. <중략>
▶충줏집과 농탕치는 동이의 따귀를 올려붙인 후 동이에게 연민을 느끼는 허 생원
거나해짐을 따라 계집 생각보다도 동이의 뒷일이 한결같이 궁금해졌다. 내 꼴에 계집을 가로채서는 어떡할 작정이었누 하고 어리석은 꼬락서니를 모질게 책망하는 마음도 한편에 있었다. 그러기 때문에 얼마나 지난 뒤인지 동이가 헐레벌떡거리며 황급히 부르러 왔을 때에는, 마시던 잔을 그 자리에 던지고 정신없이 허덕이며 충줏집을 뛰어나간 것이었다.
“생원 당나귀가 바를 끊구 야단이에요.” / “각다귀들 장난이지 필연코.”
짐승도 짐승이려니와 동이의 마음씨가 가슴을 울렸다. 뒤를 따라 장판을 달음질하려니 게슴츠레한 눈이 뜨거워질 것 같다. / “부락스런 녀석들이라 어쩌는 수 있어야죠.” / “나귀를 몹시 구는 녀석들은 그냥 두지는 않을걸.”
반평생을 같이 지내 온 짐승이었다. 같은 주막에서 잠자고, 같은 달빛에 젖으면서 장에서 장으로 걸어 다니는 동안에 이십 년의 세월이 사람과 짐승을 함께 늙게 하였다. 까스러진 목 뒤 털은 주인의 머리털과도 같이 바스러지고, 개진개진 젖은 눈은 주인의 눈과 같이 눈곱을 흘렸다. <중략>
▶나귀에 대한 허 생원의 애착
“우리들 장난이 아니우. 암놈을 보고 저 혼자 발광이지.”
코흘리개 한 녀석이 멀리서 소리를 쳤다. / “고 녀석 말투가.”
“김 첨지 당나귀가 가 버리니까 왼통 흙을 차고 거품을 흘리면서 미친 소같이 날뛰는걸. 꼴이 우스워 우리는 보고만 있었다우. 배를 좀 보지.”
아이는 앵돌아진 투로 소리를 치며 깔깔 웃었다. 허 생원은 모르는 결에 낯이 뜨거워졌다. 뭇시선을 막으려고 그는 짐승의 배 앞을 가려 서지 않으면 안 되었다.
“늙은 주제에 암샘을 내는 셈야, 저놈의 짐승이.”
아이의 웃음소리에 허 생원은 주춤하면서 기어코 견딜 수 없어 채찍을 들더니 아이를 쫓았다. / “쫓으려거든 쫓아 보지. 왼손잡이가 사람을 때려.”
줄달음에 달아나는 각다귀에는 당하는 재주가 없었다. 왼손잡이는 아이 하나도 후릴 수 없다. 그만 채찍을 던졌다. 술기도 돌아 몸이 유난스럽게 화끈거렸다.
“그만 떠나세. 녀석들과 어울리다가는 한이 없어. 장판의 각다귀들이란 어른보다도 더 무서운 것들인걸.” / 조 선달과 동이는 각각 제 나귀에 안장을 얹고 짐을 싣기 시작하였다. 해가 꽤 많이 기울어진 모양이었다.
▶봉평 장에서 아이들에게 놀림을 당하는 허 생원
드팀전 장돌림을 시작한 지 이십 년이나 되어도 허 생원은 봉평 장을 빼논 적은 드물었다. 충주, 제천 등의 이웃 군에도 가고, 멀리 영남 지방도 헤매기는 하였으나 강릉쯤에 물건 하러 가는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내를 돌아다녔다. 닷새만큼씩의 장날에는 달보다도 확실하게 면에서 면으로 건너간다. 고향이 청주라고 자랑삼아 말하였으나 고향에 돌보러 간 일도 있는 것 같지는 않았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반날 동안이나 뚜벅뚜벅 걷고 장터 있는 마을에 거지반 가까웠을 때 지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면 —— 더구나 그것이 저녁녘이어서 등불들이 어둠 속에 깜박거릴 무렵이면 늘 당하는 것이건만 허 생원은 변치 않고 언제든지 가슴이 뛰놀았다. <중략>
▶드팀전 장돌뱅이의 애환을 지닌 허 생원
“달밤에는 그런 이야기가 격에 맞거든.”
조 선달 편을 바라는 보았으나 물론 미안해서가 아니라 달빛에 감동하여서였다.
이지러는 졌으나 보름을 가제 지난 달은 부드러운 빛을 흐붓이 흘리고 있다. 대화까지는 칠십 리의 밤길, 고개를 둘이나 넘고 개울을 하나 건너고 벌판과 산길을 걸어야 된다. 길은 지금 긴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 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뭇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붉은 대궁이 향기같이 애잔하고 나귀들의 걸음도 시원하다. 길이 좁은 까닭에 세 사람은 나귀를 타고 외줄로 늘어섰다. 방울 소리가 시원스럽게 딸랑딸랑 메밀밭께로 흘러간다. 앞장선 허 생원의 이야기 소리는 꽁무니에 선 동이에게는 확적히는 안 들렸으나, 그는 그대로 개운한 제멋에 적적하지는 않았다.
▶메밀밭과 달빛의 낭만적 분위기
“장 선 꼭 이런 날 밤이었네. 객줏집 토방이란 무더워서 잠이 들어야지. 밤중은 돼서 혼자 일어나 개울가에 목욕하러 나갔지.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나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이상한 일도 많지. 거기서 난데없는 성 서방네 처녀와 마주쳤단 말이네. 봉평서야 제일가는 일색이었지…….”
“팔자에 있었나 부지.”
아무렴 하고 응답하면서 말머리를 아끼는 듯이 한참이나 담배를 빨 뿐이었다. 구수한 자줏빛 연기가 밤기운 속에 흘러서는 녹았다.
“날 기다린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다고 달리 기다리는 놈팽이가 있은 것두 아니었네. 처녀는 울고 있단 말야. 짐작은 대고 있었으나 성 서방네는 한창 어려워서 들고날 판인 때였지. 한집안 일이니 딸에겐들 걱정이 없을 리 있겠나. 좋은 데만 있으면 시집도 보내련만 시집은 죽어도 싫다지……. 그러나 처녀란 울 때같이 정을 끄는 때가 있을까. 처음에는 놀라기도 한 눈치였으나 걱정 있을 때는 누그러지기도 쉬운 듯해서 이럭저럭 이야기가 되었네……. 생각하면 무섭고도 기막힌 밤이었어.”
“제천인지로 줄행랑을 놓은 건 그다음 날이렸다.” <중략>
▶성 처녀와의 추억을 소개하는 허 생원
고개 너머는 바로 개울이었다. 장마에 흘러 버린 널다리가 아직도 걸리지 않은 채로 있는 까닭에 벗고 건너야 되었다. 고의를 벗어 띠로 등에 얽어매고 반 벌거숭이의 우스꽝스러운 꼴로 물속에 뛰어들었다. 금방 땀을 흘린 뒤였으나 밤 물은 뼈를 찔렀다. / “그래, 대체 기르긴 누가 기르구?”
“어머니는 하는 수 없이 의부를 얻어 가서 술장사를 시작했죠. 술이 고주래서 의부라고 전 망나니예요. 철들어서부터 맞기 시작한 것이 하룬들 편한 날 있었을까. 어머니는 말리다가 채이고 맞고 칼부림을 당하고 하니 집 꼴이 무어겠소. 열여덟 살 때 집을 뛰어나와서부터 이 짓이죠.”
“총각 낫세론 동이 무던하다고 생각했더니 듣고 보니 딱한 신세로군.”
▶동이의 성장 내력
물은 깊어 허리까지 찼다. 속 물살도 어지간히 센데다가 발에 차이는 돌멩이도 미끄러워 금시에 훌칠 듯하였다. 나귀와 조 선달은 재빨리 거의 건넜으나 동이는 허 생원을 붙드느라고 두 사람은 훨씬 떨어졌다.
“모친의 친정은 원래부터 제천이었던가?”
“웬걸요, 시원스리 말은 안 해 주나 봉평이라는 것만은 들었죠.”
“봉평? 그래 그 아비 성은 무엇이구?” / “알 수 있나요. 도무지 듣지를 못했으니까.”
그 그렇겠지 하고 중얼거리며 흐려지는 눈을 까물까물하다가 허 생원은 경망하게도 발을 빗디뎠다. 앞으로 고꾸라지기가 바쁘게 몸째 풍덩 빠져 버렸다. 허위적거릴수록 몸을 걷잡을 수 없어 동이가 소리를 치며 가까이 왔을 때에는 벌써 퍽이나 흘렀었다. 옷째 졸짝 젖으니 물에 젖은 개보다도 참혹한 꼴이었다. 동이는 물속에서 어른을 해깝게 업을 수 있었다. 젖었다고는 하여도 여윈 몸이라 장정 등에는 오히려 가벼웠다.<중략>
▶물에 빠진 허 생원을 업고 개울을 건너는 동이
동이의 탐탁한 등어리가 뼈에 사무쳐 따뜻하다. 물을 다 건넜을 때에는 도리어 서글픈 생각에 좀 더 업혔으면도 하였다. / “진종일 실수만 하니 웬일이요, 생원.”
조 선달은 바라보며 기어코 웃음이 터졌다.
“나귀야. 나귀 생각하다 실족을 했어. 말 안 했던가. 저 꼴에 제법 새끼를 얻었단 말이지. 읍내 강릉집 피마에게 말일세. 귀를 쫑긋 세우고 달랑달랑 뛰는 것이 나귀새끼같이 귀여운 것이 있을까. 그것 보러 나는 일부러 읍내를 도는 때가 있다네.”
“사람을 물에 빠치울 젠 딴은 대단한 나귀 새끼군.”
허 생원은 젖은 옷을 웬만큼 짜서 입었다. 이가 덜덜 갈리고 가슴이 떨리며 몹시도 추웠으나 마음은 알 수 없이 둥실둥실 가벼웠다.
“주막까지 부지런히들 가세나. 뜰에 불을 피우고 훗훗이 쉬어. 나귀에겐 더운물을 끓여 주고. 내일 대화 장 보고는 제천이다.” / “생원도 제천으로?”
“오래간만에 가 보고 싶어. 동행하려나 동이?”
나귀가 걷기 시작하였을 때 동이의 채찍은 왼손에 있었다. 오랫동안 아둑시니같이 눈이 어둡던 허 생원도 요번만은 동이의 왼손잡이가 눈에 띄지 않을 수 없었다.
걸음도 해깝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
달이 어지간히 기울어졌다.
▶동이가 자신의 아들임을 확신하고 제천으로 갈 것을 결심하는 허 생원
■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소설, 순수소설
• 성격 : 낭만적, 서정적, 묘사적, 유미적
• 배경 : 시간적 - 어느 여름 낮부터 밤, 공간적 - 강원도 봉평에서 대화 장터로 가는 산길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제재 : 장돌뱅이의 삶
• 주제 : 떠돌이 삶의 애환과 혈육의 정
• 특징 :
①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문체와 사실적 묘사를 통해 사건을 제시함.
② 암시와 추리의 기법으로 주제를 부각시킴.
③ 여운을 주는 결말 처리 방식을 사용함.
④ 순수 우리말을 사용함
⑤ 토속적 어휘의 사용으로 토속적 분위기를 조성함
• 인물의 특징
- 허생원 : 떠돌이 장돌뱅이로, 성 서방네 처녀와 하룻밤을 보낸 추억이 유일한 추억으로 남아 있어 항상 이 이야기만 하는 인물이다. 여자와의 인연이 별로 없는 고독한 인물로, 유랑하는 떠돌이 인생의 원형적 모습을 가지고 있다.
- 동이 : 젊은 장돌배이로, 의붓아버지의 난폭함이 싫어 집을 나와 떠돌며 산다. 허 생원의 친자식으로 암시되는 인물이다.
- 조선달 : 장돌뱅이로, 여러 번 들은 허 생원의 추억을 귀찮아도 들어주고 이에 호응해 주는 원만한 성격의 소유자이다.
• 구성 :
- 발단 : 장돌뱅이 허 생원과 조 선달은 봉평장을 거두고 대화장으로 떠나는데 애송이 동이가 동행을 하게 됨
- 전개 : 달밤에 길을 걸으며 허 생원은 동이에게 봉평에서 만나 하룻밤을 보냈던 성 서방네 처녀 이야기를 들려줌
- 위기 : 동이는 달도 안 찬 애를 낳고 집에서 쫓겨나 제천에 살고 있는 어머니 이야기를 함
- 절정 : 동이는 어머니의 원래 고향이 봉평이라고 말함
- 결말 : 허 생원은 같은 왼손잡이라는 사실까지 확인하고 동이에게서 말로 설명하기 힘든 정서적 유대감을 느낌
■ 작품 해설 1
강원도 봉평에서 대화에 이르는 산길을 배경으로, 두 개의 이야기가 교차하면서 사건이 진행되고 있다. 하나는 늙은 장돌뱅이 허 생원의 평생, 특히 그에게 생명보다도 소중한 단 한 번의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를 전개한 것이고, 또 하나는 허 생원, 조 선달, 동이가 봉평 장에서 대화 장으로 옮겨 가는 과정을 그린 것이다. 이 두 이야기를 통해 길 위에서 보내는 장돌뱅이 생활의 애환과 인간의 자연스럽고 신비로운 혈육의 정을 다루고 있다. 작가는 허 생원과 동이의 갈등 해소 과정을 치밀하게 계산하여 과거와 현재의 사건을 구조적으로 배치하고, 공간적 배경을 활용하여 주제를 효과적으로 드러내고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남녀이합(男女離合)’과 ‘친자 확인’의 화소(話素)를 바탕으로 메밀꽃이 하얗게 핀 여름밤의 자연 속에서 인간과 자연이 혼연 일체를 이루는 신비스러운 삶의 모습을 서정적으로 보여 주는 작품이다. 강원도 봉평 장터에서 대화 장터에 이르는 팔십 리를 공간적 배경으로 삼아, 그 길을 가는 세 인물의 과거사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본연적 사랑을 드러내고 있다. 늙고 초라한 장돌뱅이 허 생원이 20여 년 전에 정을 통한 처녀의 아들 동이를 친자로 확인하는 과정에는 푸른 달빛에 젖은 메밀꽃이 깨알깨알 흐르러지게 피어 있는 밤길 묘사에 젖어들어 시적인 정취가 짙게 풍겨 나온다.
서정주의적 경향이 많으며 암시와 추리를 통해 주제를 간접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다. 대화 형식으로 플롯이 진행되며 반복되는 지명(地名)으로 의식과 감정을 고조시킨다. 낭만주의적인 경향이 많으나 파장 무렵의 시골 장터의 모습이나, 주인 허 생원을 닮은 나귀의 모습이ㅏ,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의 묘사 같은 것은 뚜렷한 사실성을 가지고 서술 되었다.
허 생원이 동이가 친자(親子)라는 것을 확인한 후의 모든 기쁨은 독자의 상상력에 유보되어 있다. 물론 확인하는 과정의 중요한 단서가 된 ‘왼손잡이’가 과연 유전이냐 하는 의문은 걷어치우고라도 허 생원과 친자로 예상되는 동이가 모두 장돌뱅이라는 사실은 부전자전(父傳子傳)의 동일성을 확인해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모티브는 김동리의 ‘역마’에도 나타나 있다.
- 윤희재의 현대소설 참고
■ 심화 내용 연구(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1. ‘나귀’의 상징성
나귀는 허 생원과 동반자적 관계로서 외양이나 행동 양상이 서로 흡사하다. 또한, 허 생원과 정서적으로 융합하는 대상으로 제시되고 있다. 특히, 작품의 말미에서는 ‘나귀-나귀새끼’의 관계를 ‘허 생원-동이’로 치환하여 상상하도록 만들고 있다.
2. ‘달밤’의 의미와 역할
이 작품에서 아름다운 달빛이 비친 메밀밭은 시각적 이미지와 후각적 이미지, 공감각적 이미지를 통해 달밤의 정경을 서정적으로 묘사함으로써 달빛의 고요함과 원시적 신비를 강조하여 서정적 분위기를 자아내면서 사건의 필연성을 부여하는 배경이다. 또한, 허 생원으로 하여금 회상과 추억의 공간에 머무르게 하는 역할을 한다.
3. 결말 부분을 통해 알 수 있는 허 생원의 심리
허 생원은 자신과 연을 맺은 성 서방네 처녀를 다시 만나지 못한다면 계속해서 장돌뱅이 생활을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런데 결말에서 허 생원은 동이에게 함께 제천으로 갈 것을 권유하고 동이가 자신처럼 왼손잡이라는 점을 눈여겨본다. 이를 통해 허 생원은 동이가 자신의 아들일지 모른다는 기쁨과 기대감을 갖게 되는 한편, 성 서방네 처녀와의 재회를 기대하고 있다고 추측할 수 있다. 이러한 허 생원의 심리는 ‘걸음도 해깝고 방울 소리가 밤 벌판에 한층 청청하게 울렸다.’에서 ‘해깝고(가볍고)’와 ‘청청하게(맑고 깨끗하게)’ 등의 어휘를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나고 있다.
4. ‘메밀꽃 필 무렵’의 표현
• 사실적 문체: 파장 무렵의 시골 장터 풍경 제시, 나귀의 묘사, 메밀꽃이 하얗게 핀 산길의 묘사
• 시간 교차에 의한 서술: 과거와 현재가 교차하면서 미묘한 심리적 분위기 조성. 과거의 시간은 주로 요약에, 현재의 시간은 장면 제시에 의함.
• 대화에 의한 플롯 진행
• 부자 관계의 암시
• 봉평과 제천 등의 지명을 반복 사용하여 의식과 감정을 고조시킴.
5. 배경 묘사에 나타난 문체적 특징
참신한 은유와 직유를 통해 자연의 모습을 세밀하게 묘사하고 있다. 이는 문체의 서정성과 예술성을 높임은 물론, 향토적 서정이라는 분위기를 연출하여 장돌뱅이의 고달픈 삶을 낭만적으로 표현하였다.
6. 백색의 이미지
하얀 꽃, 밝은 달, 그리고 아름다운 성 서방네 처녀의 모습을 나란히 배치하여, 어두운 밤과 대비되는 백색의 이미지를 환기함으로써 허 생원의 추억을 더욱 아름답게 느끼게 한다.
7. ‘메밀꽃 필 무렵’에 나타난 ‘길’
‘메밀꽃 필 무렵’의 이야기가 진행되어 가는 과정에는 ‘길’이 있다. 그 ‘길’은 세상살이가 잡다하게 펼쳐지는 현장을 떠나 시적인 서정성을 가득 머금은 달밤의 산길이다. 그런 까닭에 이 산길은 허 생원 일행에게는 도피처가 아닌, 삶이 전개되는 현장이다. 따라서, 이 길은 괴로운 인생사의 현장을 보여 주기보다는 삶을 아름다운 자연과 융화시킨, 승화된 서정의 세계이다. 온갖 잡배가 우글거리는 장터의 현장과는 격리된 밤의 산길은 달빛, 메밀꽃, 개울이 어우러진 낭만적인 자연 환경을 무대로 하여 늙은 떠돌이 장돌뱅이 허 생원의 애수(哀愁)가 서려 흐른다.
8. ‘메밀꽃 필 무렵’의 복선
‘복선’은 소설에서 뒤에 일어날 사건의 실마리를 제공하거나 이를 암시하는 서사적인 장치를 말한다. 이 작품에서 허 생원의 분신인 나귀가 새끼를 얻었다는 것은 동이가 허 생원의 아들임을 암시한다.
9. 산길에서 등장인물의 대열과 역할
좁은 산길에서 펼쳐지는 이야기는 허 생원이 자신의 과거를 회상하며 조 선달에게 들려줬던 성 서방네 처녀와의 인연이다. 이때 동이는 가장 뒤에 있기 때문에 허 생원의 이야기를 듣지 못한다. 큰길에서는 좁았던 길이 넓어지면서 세 사람이 나란히 늘어서게 되는데, 동이의 가족 내력이 밝혀지는 과정을 통해 두 사람이 부자 관계일지도 모른다는 점이 암시되고 있다. 개울에서는 발을 헛디딘 허 생원을 동이가 업어 주면서 두 사람의 갈등이 완전히 해소되며, 과거 성 서방네 처녀가 있을지도 모르는 제천을 향해 두 사람이 발길을 옮기게 된다.
■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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