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와 나만의 시간 - 황순원


■ 본문

  날이 밝자 또 걸었다. 어제보다도 쉬는 도수가 잦아 갔다.

  김 일등병도 군복 바지와 군화마저 벗어 버렸다. 맨발로 산길을 걷기가 힘든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우선 신발이 천근만근 무겁게 여겨져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발바닥이 터져 피가 내배었다. 그렇다고 돌부리 아닌 고운 땅만 골라 밟을 수만도 없었다.

  한결같이 눈에 뵈는 것은 인가 아닌 산봉우리와 계곡의 움직임 없는 굴곡뿐이요, 귀에는 그처럼 갈망하고 있는 아군의 폿소리 대신 한없이 먼 데까지 퍼져 나간 고즈넉함과 김 일등병의 몰아쉬는 거칠은 숨소리뿐이었다.

  그래도 주 대위는 온 신경을 귀로 모으고 있었다. 어떤 색다른 소리나마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번은 주 대위가 저리 가 물을 마시고 가자고 했다. 김 일등병은 어디 물이 있는가 싶었다. 그러나 주 대위가 말하는 데로 가 보니, 바위틈에서 샘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루 종일 걸은 것이 겨우 십릿길도 못 되었다. 그동안 두 사람은 산개구리 몇 마리를 잡아 날로 먹었을 뿐이었다.

  김 일등병의 무릎은 굽어지고 허리는 앞으로 숙여져 거의 기는 시늉이었다.

  주 대위는 김 일등병의 허리가 앞으로 숙는 각도에 따라 그만큼 자기의 생에 대한 희망도 꺾여 들어감을 느껴야만 했다.

▶두 인물의 극단적 상황과 삶에 대한 주 대위의 의지

  저녁때쯤 어느 능선을 돌아가느라니까 앞에서 까마귀 한 마리가 펄럭 하고 날아올랐다. 깎은 듯한 낭떠러지가 가로놓여 있는 것이었다.

  발길을 돌리며 김 일등병은 무심코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에 까마귀 두세 마리가 앉아 무엇인가 열심히 쪼고 있었다.

  사람의 시체였다. 그리고 첫눈에 그것은 현 중위의 시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어젯저녁 두 사람을 버리고 떠났을 때와 똑같이 위는 셔츠 바람이요, 아래는 군복 바지에 군화를 신고 있었다.

  까마귀란 놈이 시체 얼굴에 붙어서 무엇인가 쪼고 있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이쪽을 보고는 날아갈 기미를 보이다가도 그저 까욱까욱 몇 번 울 뿐, 다시 쪼기를 계속하는 것이었다.

  시체 얼굴에는 이미 눈알은 없어져 떼꾼하니 검은 구멍이 나 있었다.

  두 사람은 이쪽으로 와 아무데나 쓰러지듯이 드러누웠다. 현 중위의 시체를 보자 마지막 남았던 기운마저 빠져 버리고 만 것이었다.

  잠시 후에 김 일등병은 무엇을 생각했는지 일어나 허청거리며 벼랑 쪽으로 가더니 돌을 집어 던지기 시작했다. 그때마다 까마귀가 펄럭 하고 시체를 떠나는 것이었으나, 곧 못마땅한 듯이 까욱까욱 하며 다시 내려앉는 것이었다. <중략>     

▶현 중위의 죽음을 확인한 주 대위와 김 일등병

  “개 짖는 소리 같애.”

  개 짖는 소리라는 말에 김 일등병은 지친 몸을 벌떡 일으켜 머리 쪽으로 무릎걸음을 쳐 나갔다. 개 짖는 소리가 들린다면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인가가 있음에 틀림없었다.

  “그 등성이를 넘어가면 된다!”

  그러나 김 일등병의 귀에는 여전히 아무것도 들리지 않았다. 그는 누웠던 자리로 도로 뒷걸음질을 쳤다.

  주 대위는 김 일등병에게 무엇인가 주고 싶었다. 그리고 그것을 자기 자신도 받고 싶었다.

▶개 짓는 소리로 새로운 희망을 가지는 주 대위

  김 일등병이 드러누우며 혼잣소리로,

  “내일쯤은 까마귀 떼가 더 많이 몰려들겠지. 눈알이 붙어 있는 것두 오늘 밤뿐야.”

  이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갑자기 권총 소리가 그의 귓전을 때렸다.

  깜짝 놀라 돌아다보니 어둠 속에 주 대위가 권총을 이리 겨눈 채 목 속에 잠긴 음성치고는 또렷하게,

  “날 업어!”

하는 것이다.

  김 일등병은 무슨 영문인지 몰라 하면서도 하라는 대로 일어나 등을 돌려대는 수밖에 없었다.

  “자, 걸어라!”

  김 일등병은 자기 오른쪽 귀 뒤에 권총 끝이 와 닿음을 느꼈다. <중략>

  어젯저녁부터 혼자 업고 오느라고 갖은 고역을 다 겪으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원망이 주 대위를 향해 거듭 복받쳐 오름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걷지 않을 수 없었다. 오른쪽 귀 뒤에 감촉되는 권총 끝이 떠나지 않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권총이 비틀거리는 걸음이나마 옮겨 놓게 하는 거나 다름없었다.

  산 밑에 이르렀다.

  “오른쪽으루!”

  “그대로 똑바루!”

  그제야 김 일등병의 귀에도 무슨 소리가 들렸다. 그것이 점점 개 짖는 소리로 확실해졌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만한 거리에서인지는 짐작이 안 되었다.

  목에서는 단내가 나고, 간신히 옮겨 놓는 걸음은 한껏 깊은 데로 무한정 빠져 들어가는 것만 같았다. 그저 그 자리에 주저앉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그렇건만 쉬어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귀 뒤에 와 닿은 권총 끝이 더 세게 밀고 있는 것이었다.

  아무것도 뵈는 게 없었다. 어떻게 걸음을 떼어 놓고 있는지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는데 저쪽 어둠 속에 자리 잡은 초가집 같은 검은 그림자와 그 앞에 서 있는 사람의 그림자, 그리고 거기서 짖고 있는 개의 모양이 몽롱해진 눈에 어렴풋이 들어왔다고 느낀 순간과 동시에 귀 뒤에 와 밀고 있던 권총 끝

이 별안간 물러나면서 업힌 주 대위의 몸뚱이가 무겁게 탁 내려앉음을 느꼈다.

▶인가까지 김 일등병을 인도한 뒤 죽음을 맞이하는 주 대위


■ 핵심 정리

• 배경 : 시간적 - 6 · 25 전쟁 중,

공간적 - 인적이 없는 깊은 산속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제재 : 6 · 25 전쟁

• 주제 :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서 발현되는 인간의 의지

• 특징 : 

  ① 인물의 행동과 심리를 감각적이고도 간결한 문체로 묘사함.

  ② 전쟁을 다루지만 이념 갈등보다는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고 있음.

• 구성 :

 - 발단 : 현 중위와 김 일등병이 부상당한 주 대위를 부축하며 걸어간다.

 - 전개 : 주 대위가 자살하기를 바라던 현 중위는 혼자 길을 떠난다.

 - 위기 : 현 중위가 떠나고 얼마 후 주 대위와 김 일등병이 현 중위의 시체를 발견한다.

 - 절정 : 개 짖는 소리를 들은 주 대위가 김 일등병을 권총으로 위협하여 인가에 도착하도록 유도한다.

 - 결말 : 인가를 찾은 후 주 대위가 의식을 잃는다.

• 등장인물 :

 주 대위 : 전투에서 허벅지 관통상을 당해 부하의 부축을 받으면서도 삶에 대한 의지를 포기하지 않지만 막상 자기 때문에 남은 사람마저 위험에 빠뜨릴 것 같아 자결을 결심하는 순간 개 짖는 소리를 듣게 되고, 김 일등병을 초가집까지 가게 한 후 죽음을 맞이하지만 삶에 대한 집념이 강한 인간형

현 중위 : 현실적인 인간으로 정에 얽매이기보다는 실질적인 가능성을 향해 움직이는 인물로 낭떠러지에서 떨어져 죽는다.

김 일등병 : 부상당한 주 대위를 업고 길을 헤매다 지쳐 삶의 의욕을 상실하지만 주 대위의 마지막 명령으로 살 길을 찾는 따뜻한 인간애(人間愛)를 지니고 있는 인물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을 통해 죽음의 위협에 놓인 세 병사의 심리와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보여주고 있다. 주 대위, 현 중위, 김 일등병은 전장에서 낙오되어 죽음의 공포에 휩싸여 있지만 이들을 지배하는 것은 삶에 대한 간절한 욕구이다. 주 대위는 부상을 입은 자신이 부하들에게 짐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삶에 대한 희망을 포기하지 않는다. 현 중위는 혼자서라도 살아남기 위해 주 대위와 김 일등병을 버리고 떠나지만 결국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한다. 김 일등병은 끝까지 주 대위와 동행하며 삶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 작가는 이들의 행동과 심리를 감각적이고도 간결한 문체로 묘사하여 인간의 삶의 방식에 대한 진지한 성찰을 이끌어 내고 있다. 이는 전후의 소설이 빠지기 쉬웠던 이념의 갈등이나 한의 정서에서 벗어나 전쟁의 의미를 보다 깊이 통찰하는 수준까지 나아갔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작품은 전쟁에서 낙오와 부상으로 인해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는 세 명의 병사가 생사의 갈림길에서 보이는 다양한 반응을 통해 인물의 심리와 행동, 그들이 선택한 삶의 방식을 그리고 있는 작품으로 극한 상황에 처한 세 병사가 공통적으로 드러내는 것은 삶을 향한 본능적 욕구라는 것이다.

 ‘너와 나만의 시간’은 극한 상황 속에서는 상관과 부하라는 사회적 위계와 질서가 아무런 의미를 갖지 못하는 시간임을 의미한다. 생사를 넘나들며 인물들이 겪게 되는 일들을 통해 극한 상황은 ‘너’와 ‘나’라는 실존적 개체만이 존재하는 시간, 즉 감추어져 있던 인간의 본성이 드러나는 시간을 의미한다.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에서 현 중위는 자신의 삶을 위해 혼자 떠나지만, 비극적인 죽음을 맞게 된다. 김 일등병은 끝까지 주 대위를 버리지 않는다. 주 대위는 자신이 그들에게 짐만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끝까지 삶의 욕구를 포기하지 않는다. 주 대위가 마지막에 듣는 개 짖는 소리나 대포 소리 등은 실제의 소리라기보다는 소리는 김 일등병에게 힘을 주기 위해서, 끝까지 삶을 포기해서는 안 된다는 내부 의지의 표현에 가깝고, 주 대위가 들은 그 소리는 김 일등병에게는 새로운 희망의 소리로서, 생존에 대한 확신을 심어 주는 힘이 된다. 이 작품은 생존에의 의지, 인간에 대한 믿음 등을 통해 인간 존재의 의미를 성찰하게 한다.


■ 심화 내용 연구

1. ‘폿소리’와 ‘개 짖는 소리’의 의미와 역할

  아군의 폿소리임을 알게 되자 잠시나마 기대감을 가졌던 주 대위와 김 일등병은, 그것이 아주 먼 곳에서 들려오는 것임을 깨닫게 되면서 더 큰 좌절에 휩싸이게 된다. 하지만 뒤이어서 들리는 개 짖는 소리는 인가가 가까이 있다는 것, 그리하여 살아날 희망이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이 소리가 실제로 들렸는지 여부는 알 수 없다. 희망을 잃지 않으려는 간절한 몸부림 때문에 주 대위가 환청을 들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어쨌든 개 짖는 소리는 주 대위로 하여금 살고 싶다는 욕망을 되살리게 만든다. 김 일등병 역시 처음에는 개 짖는 소리를 못듣고, 권총을 들이밀며 힘든 길을 재촉하는 주 대위를 원망하지만, 나중에는 그 역시 개 짖는 소리를 듣고 희망의 불씨를 다시 살리게 된다.



2. 현 중위의 시체에 돌을 던지는 김 일병의 행위 속에 담긴 의미

• 자기만 살겠다고 대열을 이탈한 현 중위를 원망하지 않고, 죽은 현 중위에 대한 안타까움을 간접적으로 드러내 김 일병의 따뜻한 인간애를 돋보이기 위함.

• 까마귀가 지닌 죽음의 이미지를 물리치기 위해 돌을 던져 까마귀를 쫓는 김 일병의 행위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거부감을 드러냄.


3. 결말 처리에 담긴 작가의 의도

(1) 주 대위를 죽는 것으로 설정

  • 김 일등병의 생존에 큰 영향을 준 것은 바로 주 대위가 개 짖는 소리를 듣고 그쪽으로 김 일등병을 인도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주 대위는 끝내 죽음을 맞이함으로써 주 대위의 살신성인의 모습이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 부상으로 끝내 죽은 주 대위와 달리 김 일등병만 유일한 생존자로 설정한 데에는 어렵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끝까지 주 대위를 포기하지 않은 김 일등병에 대한 작가의 보상이라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비록 주 대위가 죽기는 했지만 김 일등병의 희생정신이 부각된다고 할 수 있다.

(2) 주 대위를 살리는 것으로 설정

  • 혼자만 살겠다고 대열을 이탈한 현 중위의 죽음과는 대비되는 것으로서, 어려운 상황에 처했을 때에는 혼자가 아닌 여럿이 힘을 합쳤을 때 더욱 좋은 결과를 가져올 수 있다는 연대 의식을 통한 문제 해결과 이에 대한 작가의 긍정적 인식이 부각될 수 있다.

  • 두 인물이 생존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삶에 대한 주 대위의 강한 집념과 총상을 입은 주 대위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김 일등병의 희생정신이라 할 수 있는데, 두 인물이 모두 생존하는 것으로 결말을 맺을 경우, 두 가지가 모두 부각될 수 있다.


4. 전쟁의 극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세 가지 인간형

- 주 대위 : 의지적인 인물 ; 극한의 상황에서도 삶의 의지를 놓지 않음

- 김 일등병 : 마음이 따뜻한 인물 ; 자신의 목숨도 위태로운 상황에서 부상당한 주 대위를 포기하지 않고, 배신한 현 중위의 시신도 수습하려 함

 - 현 중의 : 현실적이고 이기적인 인물 ; 의리보다는 현실적인 판단이 앞서며, 주 대위의 자살을 종용하다가 뜻대로 되지 않자 도망감


5. ‘너와 나만의 시간’의 의미

 이 작품의 제목인 ‘너와 나만의 시간’은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 속에서 죽음의 위기에 부딪힌 실존적 개체들의 시간으로, 그 시간의 끝은 개체의 의지에 따라 죽음의 시간이 될 수도 있고 삶의 시간이 될 수도 있다. 어떠한 시간을 선택하느냐는 실존적 개체들의 선택에 달려 있다. 이 작품에서 삶에 대한 의지를 보여 주는 인물은 주 대위로, 전쟁으로 인한 절망적이고 극한 상황에서 그 상황을 극복하는 과정을 보여주고 있다.


6. 작품 속에 삽입된 현 중위의 꿈 이야기

 현 중위가 혼자 도망가기 전에 개미 떼가 개미굴에서 나오면 왕개미가 그 개미들의 머리를 자르는 꿈을 생각한다. 그렇다면 여기서 개미 떼의 의미는 무엇이고, 왕개미의 상징적 의미는 무엇일까? 여기서 왕개미는 거대 권력, 즉 전쟁을 일으킨 존재를 상징하고, 개미 떼는 거대 권력이 일으킨 전쟁에 끌려 들어가 불행과 죽음을 맞이하는 존재들을 상징한다. 즉, 누군가가 일으킨 전쟁에 끌려 들어가 무참히 희생되는 수많은 군인들을 떠오르게 한다.


■ 작가 소개

 황순원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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