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앞부분의 줄거리] 화가인 ‘나’는 혜인의 이별 통보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뿐 그녀와의 관계는 별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 의사인 형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형이 수술하던 한 소녀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인 타격을 입은 다음부터이다. 소설에서 형은 6·25 전쟁 중에 동료를 살해한 경험에 대해 그리고 있다.
형의 소설은 끝이 달라져 있었다. 형은 내가 쓴 부분을 잘라 내고 자신이 끝을 맺어 놓은 것이었다. 형의 경험은 이 소설 속에서 얼마만큼 사실성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혹은 적어도 이 끝부분만은 형의 완전한 픽션인지도 모른다. 형은 나의 추리를 완전히 거부해 버린 것이었다.
‘나’는 관모가 나타날 때까지 동굴을 들락날락하고만 있다. 드디어 관모는 동굴까지 올라왔다. 그 얼굴이 어둠 속에서 땀에 번들거렸다. 그는 대뜸 ‘동강 나간 팔 핑계만 하고 드러누워 처먹고만 있을 테냐’고 하며, ‘오늘은 네놈도 같이 겨울 준비를 해야겠다’면서 김 일병을 일으켜 끌고 동굴을 나간다. ‘내’가 불현듯 관모의 팔을 붙잡는다. 관모가 독살스러운 눈으로 ‘나’를 쏘아본다. ‘나’는 아무 말도 못 하고 고개를 떨어뜨린다. ‘넌 구경이나 하고 있어……’ 타이르듯 낮게 말하고 관모는 김 일병을 앞세워 산을 내려간다. 말끝에서 나는 ‘이 참새가슴아’ 하고 말하고 싶어 하는 관모의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뜻밖에 기동을 해서 발걸음이 침착하게 걷고 있는 김 일병은 단 한 번 길을 내려가면서 ‘나’를 돌아본다. 그러나 그 눈에는 아무것도 찾아볼 수가 없다. 둘은 눈길에 검은 발자국을 내며 골짜기로 내려갔다. 그리고 그들이 골짜기의 잣나무 숲으로 아물아물 숨어 들어가 버릴 때까지 ‘나’는 거기에 못 박힌 듯 붙어 서 있기만 했다. 어느덧 눈은 그치고 눈 위를 스쳐 온 바람이 관목 사이로 기분 나쁜 소리를 내며 빠져나갔다. 드문드문 뚫린 구름장 사이로는 바쁜 별들이 서쪽으로 흐르고 있었다. 조금 뒤에 골짜기에서는 한 발의 총소리가 적막을 깼다. 그 소리는 골짜기를 한 바퀴 돌고 난 다음 남쪽 산등성이로 긴 꼬리를 끌며 사라졌다. ‘나’는 비로소 잠에서 깨어난 듯 깜짝 놀란다. ‘그 총소리는 나의 가슴속 깊이 어느 구석엔가 숨어서 그 전장의 수많은 총소리에도 지워지지 않고 남아 있었던 선명한 기억 속의 것이었다. 어린 시절, 노루 사냥을 갔을 때의 설원에 메아리치던 그 비정과 살의를 담은 싸늘한 음향이었다.’
그러자 ‘나’의 눈앞에는 그 설원에 끝없이 번져 가는 핏자국이 떠올랐다. 그때 또 한 발의 총소리가 올랐다. ‘나’는 몸을 부르르 떨고 나서 동굴 구석에 남은 한 자루의 총을 걸어 메고 그 ‘핏자국’을 따라 산을 내려갔다. ‘오늘은 그 노루를 보고 말겠다. 피를 토하고 쓰러진 노루를’, ‘날더러는 구경만 하라고? 그렇지. 잔치는 언제나 너희들뿐이었지’ 이런 말들이 ‘내’가 그 ‘핏자국’을 따라가는 동안에 수없이 되풀이되고 있었다.
<중략>
“기껏해야 김 일병이나 죽인 주제에…… 임마, 넌 이걸 다 읽고 있었다. ……불쌍한 김 일병을…… 그 아가씨가 널 싫어한 건 당연하다.”
순서는 뒤범벅이었지만 무엇을 이야기하려는 것인지는 분명했다. 나는 형을 쏘아보았으나, 그때 형도 나를 마주 쏘아보았기 때문에 시선을 흘리고 말았다. 형은 나를 쏘아본 채 손으로는 계속 원고를 뜯어 불에 넣고 있었다.
“임마, 넌 머저리 병신이다. 알았어?”
형이 또 소리를 꽥 질렀다. 그리고 그것은 지극히 당연한 말이었다는 듯이 머리를 두어 번 끄덕이고 나서는,
“그런데 말야…….”
갑자기 장난스럽게 손짓을 했다. 나는 가까이 다가갔다. 형은 손에서 ㉣고 뭉치를 떨어뜨리고 나의 귀를 잡아끌었다. 술 냄새가 호흡을 타고 내장까지 스며들 것 같았다. 형은 아주머니까지도 들어서는 안 될 이야기나 된 것처럼 귀에다 입을 대고 가만히 속삭이는 것이었다.
“넌 내가 소설을 불태우는 이유를 묻지 않는군…….”
너무나 정색을 한 목소리여서 나는 형의 얼굴을 보려고 했으나 형의 손이 귀를 놓아 주지 않았다.
“그런데 너 또 읽었겠지만, 거 내가 죽인 관모 놈 있지 않아. 오늘 밤 나 그놈을 만났단 말야.”
그러고는 잠시 말을 끊고 나를 찬찬히 살펴보고 있었다. 그 눈은 술에 젖어 있었으나, 생각이 멀리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결코 술 때문만은 아닌 것 같았다. 그러나 형은 이제 안심이라는 듯 큰 소리로,
“그래 이건 쓸데없는 게 되어 버렸지…… 이 머저리 새끼야!”
하고는 나의 귀를 쭉 밀어 버렸다.
다시 원고지를 집어 사그러드는 불집에 집어넣었다.
“한데 이상하거든…… 새끼가 날 잘 알아보지 못한단 말이야…… 일부러 그런 것 같지도 않았는데……?”
불을 보면서 형은 계속 중얼거렸다.
“내가 이제 놈을 아주 죽여 없앴으니 내일부턴…… 일을 하리라고 생각하고 자리를 일어서서 홀을 나오려는데…… 그렇지 바로 문에서 두 걸음쯤 남았을 때였어. 여어, 너 살아 있었구나 하고 누가 등을 탁 치지 않나 말야.”
형은 나를 의식하고 이야기하는 것 같기도 하고 혼자 중얼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놀라 돌아보니 아 그런 그게 관모 놈이 아니냔 말야. 한데 놈이 그래 놓고는 또 영 시치밀 떼지 않나. 이거 미안하게 됐다구…… 두려워서 비실비실 물러서면서…… 내가 그사이 무서워진 걸까…… 하긴 놈은 내가 무섭기도 하겠지. 어쨌든 나는 유유히 문까지는 걸어 나왔지. 하지만…… 문을 나서서는 도망을 했어……. 놈이 살아 있는데 이게 무슨 소용이냔 말야.”
형은 나머지 원고 뭉치를 마저 불집에 던져 넣고 나서 힐끗 나를 보았다.
“이 참새가슴 같은 것, 뭘 듣구 있어. 썩 네 굴로 꺼져!”
소리를 꽥 지르는 통에 나는 방으로 쫓겨 들어오고 말았다.
비로소 몸 전체가 까지는 듯한 아픔이 전해 왔다. 그것은 아마 형의 아픔이었을 것이다. 형은 그 아픔 속에서 이를 물고 살아왔다. 그는 그 아픔이 오는 곳을 알고 있는 것이다. 그리하여 그것은 견딜 수 있었고, 그것을 견디는 힘은 오히려 형을 살아 있게 했고 자기를 주장할 수 있게 했다.
■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액자 소설
• 배경 : 6 · 25 전쟁 중 강계의 어느 시골(내부 이야기), 6 · 25 전쟁 종전 10여 년 후의 도시(외부 이야기)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및 관찰자 시점
• 성격 : 사변적, 논리적, 심리적, 철학적, 추리적
• 제재 : 전쟁의 체험과 개인의 삶을 구성하는 관념
• 주제 : 두 형제의 서로 다른 삶의 방식을 통한 아픔과 그 극복의 의지
• 특징 :
① 원인을 추적해 가면서 서서히 밝혀 주는 논리적, 추리적 문체를 사용함
② 고도의 상징성을 보임
③ 작가의 감정 개입이 거의 없음
• 구성 :
발단 : 의사인 형이 병원 일을 그만 두고 소설을 쓰기 시작함
전개 : ‘나’는 그 소설을 훔쳐보며 형의 아픔의 근원을 찾으려 하다가 형 대신 소설의 결론을 쓰게 됨
위기 : ‘나’는 혜인으로부터 절교의 편지를 받음
절정 : 형이 다시 고쳐 쓴 소설의 결말을 읽게 됨
결말 : 형이 병원 일을 다시 시작하고, 나는 아픔이 없는 환부의 근원을 자문해 봄
• 등장 인물 :
- 형(의사) : 소설 쓰기를 통해 능동적으로 아픔을 극복하는 행동주의적 유형(부작용에도 불구하고 실천해야 한다고 믿음). 아픔이 어디서 비롯되는지를 알고 환부를 치유해 가는 인물 유형
- 동생(화가) : 자기 아픔의 상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는 인물로서 형을 통해 자신을 확인하고 반성함. 현실 문제에 완벽한 대응이 서지 않으면 실천하지 않고 완벽해질 때까지 기다리며 생각하는 완벽주의자이면서 회의주의적(懷疑主義的) 인간 유형
- 혜인 : ‘나’의 애인이었지만 다른 남자와 결혼함
- 오관모 : 인간의 이기심과 생존 욕구
- 김 일병 : 암담한 현실에서 고통 받으며 사라지는 힘없는 사람
■ 전체 줄거리
‘나’는 화가다. 나는 사랑하는 여자 혜인의 청첩장을 앞에 두고 고민한다. 형 친구의 소개로 한때 화실에 나왔던 혜인은 가난한 화가인 나보다 장래가 확실한 의사를 택했고 나는 혜인을 붙잡지 못했다. 나는 혜인의 모습을 그림 속에서 실현하려 한다. ‘나’의 형은 본래 의사이다. 그는 6 · 25 전쟁 때 의무병으로 참전했으며, 적의 수중에 낙오되었던 쓰라린 기억을 가지고 있다. 지금 형은 그 경험을 소설로 쓰는 중이다. 그와 함께 낙오된 인물들은 표독하고 잔인한 오관모와 그 잔인함의 희생양이었던 김 일병이다. 김 일병은 팔이 잘려 나가 썩어 가고 있다. 그들은 동굴 속에 숨어 살았다. 오관모는 김 일병을 남색의 대상으로 삼았다. 김 일병의 상처에서 나는 역한 냄새로 그것이 불가능하게 되자, 오관모는 이제 김 일병이 무용지물이라며 입을 줄이기 위한 명목으로 그를 죽이려 한다. 첫눈이 오는 날 죽이겠다고 한다. 마침내 첫눈이 내렸다. 그리고 형의 소설은 거기에서 멈춰져 더 이상 진전이 되지 않는다. 형의 소설을 몰래 읽던 나는 형의 원고를 가져와 형이 김 일병을 죽여 버리는 것으로 끝내 버린다. 형은 그것을 읽고 동생을 병신이라고 욕한다. 그는, 오관모가 김 일병을 죽이고 뒤따라간 자신이 오관모를 죽이는 것으로 끝맺는다. 그리고 불태워 버린다. 소설을 다 쓰고 외출했던 형은 집으로 돌아온 후 생생하게 살아 있는 바로 그 오관모를 혜인의 결혼식에서 만났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나에게 병신, 머저리라고 비난한다.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전쟁의 한가운데를 가로질러온 형과, 그것을 경험하지 못한 아우가 겪는 서로 다른 근원의 아픔을 형상화해 내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6 · 25 전쟁의 체험 앞에서 자연주의적이거나 관념적인 태도를 취할 수밖에 없었던 1950년대 전후 소설을 뛰어넘어 새로운 소설적 지평을 열어 놓았다. 형은 참전 세대이기에 6 · 25 전쟁의 체험을 생생한 아픔으로 간직하고 있다. 그러나 동생은 그러한 체험의 절실함도 없으면서 무기력하게 자신을 포기한 상태이다.
혜인을 붙잡지 못하고 대신 그림으로 자신의 억눌린 욕구를 표현하고자 하는 ‘나’와 극한 상황의 비인간성 속에서 자신에 대한 극도의 환멸을 맛보았으며, 그 환멸에 대한 분출구로서 소설 쓰기를 택한 ‘형’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보고 있는 형국이다. 이로써 이 둘은 서로에게 반성적 계기가 되며, 그 아픔을 바탕으로 새로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힘이 된다. 그것은 자기 자신에 대한 비판적 계기가 생에 대한 긍정적 힘으로 승화되는 순간이다. 이 작품은 이러한 주제 의식과 아울러, 액자 소설 양식이라는 독특한 형식, 논리적이고 정확하게 구사되는 문체 등으로, 그 이후의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작품은 과거 한국 전쟁은 직접 체험하고 현재는 의사라는 직업을 가진 형과, 절실한 체험도 없이 무기력하게 1960년대를 살아가는 화가인 동생을 대비시켜 전쟁의 의미를 되묻고 있다. 기존의 전후 소설이 한국 전쟁의 비극에 대해 단순히 체험적이거나 혹은 관념적인 태도를 취한 것과 달리 ‘병신과 머저리’는 개인의 내면을 파고들어 한 차원 높은 경지게 도달한 전후 소설이라 할 수 있다. 전쟁을 체험한 사람의 내면이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이후 세대(여기서는 4.19세대)에까지 이어지고 있음을 이 소설은 말하고 있다.
상처의 원인이 전쟁의 체험이 준 아픔인 것을 아는 형은 결국 소설 쓰기를 통해 그 상처를 치유하고 생활인으로 돌아간다. 반면 동생은 상처의 원인을 알지 못하기에 그저 관념적으로 아픔을 되새기고 치유 방법도 모른 체 무기력할 뿐이다. 작가는 이런 나에게 ‘머저리’라는 이름을 붙여 주며 전쟁을 체험하지 않은 세대가 오히려 더 심각한 아픔을 겪고 있음을 고발한다. 한국 전쟁을 체험하고 전쟁으로 인한 정신적 상처를 스스로 깨닫는 형의 세대는 ‘병신’의 특성을 갖고 있기에 얼마든지 극복 가능하다. 반면 ‘머저리’쪽은 극복 가능성이 낮다. 이 두 세대가 갖는 각각의 갈등은 경험과 관념의 차이에 기인하지만 각자 다른 시대의 아픔을 겪었고 동시에 그 치유책을 모색한다는 점에서 1960년대와 한국 전쟁을 새로운 시각에서 해석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개별적 체험을 여러 각도로 분석해 전체적으로 뚜렷한 가치를 드러내려 한 작가의 의도는 액자 소설이라는 구성을 취한 데서도 드러난다. 하나의 이야기 속에 여러 개의 내부 이야기를 배치함으로써 보다 비판적인 시각을 제공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이 소설은 ‘무겁고 진지한 자기 구제의 길’을 걸어간 작가 이청준의 특성이 그대로 드러난 작품이라 할 수 있다.
- 타임기획, 소설119 플러스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병신과 머저리’의 두 개의 대립축
동인 문학상 수상작인 이 작품은 1950년대 전후(戰後) 소설의 허무주의적이고 난삽한 작품 세계를 뛰어넘어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두 개의 대립이 작품의 주제를 이루고 있다. 6·25 세대인 형과 ‘나’와의 대립이 그것인데, 이 대립은 경험과 관념의 마찰이라는 문제로 나타난다. 작품의 모티프로서 주어지고 있는 6·25 동란 때의 전장에서의 살인 행위는 형에게는 직접의 경험을 이루고 있지만, ‘나’에게 있어서는 다만 관념인 것이다. 의사인 형은 있을 수 있는 환자의 죽음 이후 자신을 지키지 못하는데, 그러한 자기 동요는 스스로 쓴 소설이라는 관념을 통해 전장에서의 동료 살해를 확인함으로써 수습된다.
기존 소설에서 보여 준 두 가지 대립은 한쪽만의 일방적인 승리로써 그 대립은 해소된다. 그러나 이 작가는 항상 복잡한 구성을 통해 그러한 안이한 해소를 방지한다. 바로 이것이 이청준이 같은 세대의 다른 작가와 다른 점이다. 이 소설은 작가의 감정 개입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논리적인 문체와 액자 소설 양식 등이 보여 주는 형식적 완결서의 추구가 그 이후의 작가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2. 액자 형식과 서술 시점의 특징
이청준 소설의 기술 양식상 특징은 액자 소설적 방법의 사용이다. 그의 소설에서는 한 인물이 자신의 사고의 질서에 의해서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아니라, 항상 타인들에게 관찰당하고, 그 관찰의 결과가 종합됨으로써 존재할 뿐이다. 다시 말하자면 '작가는 한 인물에게, 그 인물에게 합당하다고 알려진 의식 체계를 부여하는 대신에 그 인물을 둘러싼 관찰·보고를 종합함으로써 그를 존재하게 한다. 그의 소설 속의 인물들은 그런 의미에서 생성하는 것이 아니라 생성된다. '병신과 머저리' 역시 이야기 속에 하나 또는 여러 개의 비교적 짧은 내부 이야기를 내포하는 소설 구성 방식을 채택하고 있는데, 액자 소설은 이야기의 외부에 하나의 서술자의 시점이 설정되는 한편, 내부 이야기에서는 동생인 '나'가 다른 화자의 서술 시점을 대표하여 층위가 다른 서술 구조를 가진다. 이러한 형식을 통해 '형'의 세계관과 그것을 바라보는 '나'의 세계관을 동시에 파악할 수 있다.
- 구인환, 김흥규 저 문학교과서 참고
3. ‘병신과 머저리’의 문학사적 의의
이 작품은 6·25라는 전쟁의 한복판을 체험했고, 지금은 의사라는 직업을 갖고 있는 '형'과, 절실한 체험도 없이 아픔의 껍데기만을 간직한 채 무기력하게 살아가고 있는 화가인 '나'를 통해 한 시대를 살면서도 서로 다른 아픔을 안고 사는 이들의 이야기를 형상화하고 있다. 형은 소설 쓰기라는 방법을 통해 자신의 상처를 치유하지만 나는 애인도 잃고, 그림도 못 그리는 무기력 속에서 '병신과 머저리'로서의 삶만을 영위한다. 이청준의 소설이 대부분 그렇듯이 이 작품 역시 당대의 역사적 의미나 이념적 성격을 문제삼기보다는 인간 내부에 도사리고 있는 실존적 의미를 날카롭게 질문하고 있는 작품이다.
4. 제목의 의미
소설 속에서 형은 6.25 전쟁의 체험을 통해 생생한 상처로 간직한 명확한 아픔을 지녔지만, 이와는 달리 동생은 자신의 아픔은 명료하지 않다고 생각하며 무기력하게 살아간다. 결국 ‘병신’은 정신적 상처가 무엇인지 알고 있는 형을, ‘머저리’는 정신적 상처의 원인조차 알지 못하는 동생을 의미한다. 형은 상처를 소설을 쓰면서 능동적으로 극복하고, 동생은 형을 통해 삶을 반성한다.
5. 이청준 소설의 인물형과 주제 의식
이청준적 인물은 유년 시절에 가족 관계의 비정상 때문에 정신적 외상을 입어 타인과의 관계를 원활하게 이끌어 나가지 못한 인간의 분신들이다. 이들은 사회적·문화적 변동 때문에 그들의 삶을 지탱해 나갈 재래의 관습·질서 체계를 잃는다. 거기에서 그들의 불안은 시작되고, 그 불안은 그들의 사회의 변두리로 내몬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들의 불안은 변동의 의미를 부인하려는 안일주의자들에 대한 뚜렷한 비판이 된다. 즉, 시효가 지난 것 같은 이청준적 인물들의 불안은 아노미 현상 중의 하나여서 과거의 질서 체계에 대한 회의와 새로운 세계에 대한 혐오를 동시에 표상한다. 보다 더 문화사적인 표현을 한다면 이청준적 인물들은 몰락해 가는 질서 체계와 새로이 흥기되는 질서 체계 사이에 있어서 그 어느 것도 선택할 수 없는 것 때문에 자신을 그 어느 편에도 속하지 않은 기인으로 만든다. 그 기인은 새로운 체계 속에서 본다면 복고주의자이며, 과거의 체계 속에서 본다면 유일한 생존자이다. 그 기인들은 그들이 서식하고 있는 사회의 구조적 모순의 한 척도이다.
- ‘장인(匠人)의 고뇌 : 이청준과 그의 작품’에서
■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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