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내가 알고 있는 건 거기까지뿐이었다.
노인이 그 후 어떻게 길을 되돌아갔는지는 나로서도 아직 들은 바가 없었다. 노인을 길가에 혼자 남겨 두고 차로 올라선 그 순간부터 나는 차마 그 노인을 생각하기가 싫었고, 노인도 오늘까지 그날의 뒷얘기는 들려준 일이 없었다. 그런데 노인은 웬일로 오늘사 그날의 기억을 끝까지 돌이키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장터거리로 들어서서 차부가 저만큼 보일 만한 데까지 가니 그때 마침 차가 미리 불을 켜고 차부를 나오더구나. 급한 김에 내가 손을 휘저어 그 차를 세웠더니, 그래 그 운전사란 사람들은 어찌 그리 길이 급하고 매정하기만 한 사람들이더냐. 차를 미처 세우지도 덜하고 덜크렁덜크렁 눈 깜짝할 사이에 저 아그를 훌쩍 실어 담고 가 버리는구나.”
“그래서 어머님은 그때 어떻게 하셨어요?”
잠잠히 입을 다문 채 듣고만 있던 아내가 모처럼 한마디 끼어들었다.
나는 갑자기 다시 노인의 이야기가 두려워졌다. 자리를 차고 일어나 다음 이야기를 가로막고 싶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그럴 수가 없었다. 사지가 말을 들어 주지 않았다. 온몸이 마치 물먹은 솜처럼 무겁게 가라앉고 있었다. 몸을 어떻게 움직여 볼 수가 없었다. 형언하기 어려운 어떤 달콤한 슬픔, 달콤한 피곤기 같은 것이 나를 아늑히 감싸 오고 있었다.
“어떻게 하기는야. 넋이 나간 사람마냥 어둠 속에 한참이나 찻길만 바라보고 서 있을 수밖에야……. 그 허망한 마음을 어떻게 다 말할 수가 있을 거나…….”
노인은 여전히 옛얘기를 하듯 하는 그 차분하고 아득한 음성으로 그날의 기억을 더듬어 나갔다.
“한참 그러고 서 있다 보니 찬바람에 정신이 좀 되돌아오더구나. 정신이 들어 보니 갈 길이 새삼 허망스럽지 않았겄냐. 지금까진 그래도 저하고 나하고 둘이서 함께 헤쳐 온 길인데 이참에는 그 길을 늙은 것 혼자서 되돌아서려니……, 거기다 아직도 날은 어둡지야……, 그대로는 암만해도 길을 되돌아설 수가 없어 차부를 찾아 들어갔더니라. 한 식경이나 차부 안 나무 걸상에 웅크리고 앉아 있으려니 그제사 동녘 하늘이 훤해져 오더구나……. 그래서 또 혼자 서두를 것도 없는 길을 서둘러 나섰는데, 그때 일만은 언제까지도 잊힐 수가 없을 것 같구나.”
“길을 혼자 돌아가시던 그때 일을 말씀이세요?”
“눈길을 혼자 돌아가다 보니 그 길엔 아직도 우리 둘 말고는 아무도 지나간 사람이 없지 않았겄냐. 눈발이 그친 그 신작로 눈 위에 저하고 나하고 둘이 걸어온 발자국만 나란히 이어져 있구나.”
“그래서 어머님은 그 발자국 때문에 아들 생각이 더 간절하셨겠네요.”
“간절하다뿐이었겄냐. 신작로를 지나고 산길을 들어서도 굽이굽이 돌아온 그 몹쓸 발자국들에 아직도 도란도란 저 아그 목소리나 따뜻한 온기가 남아 있는 듯만 싶었제. 산비둘기만 푸르르 날아올라도 저 아그 넋이 새가 되어 다시 되돌아오는 듯 놀라지고, 나무들이 눈을 쓰고 서 있는 것만 보아도 뒤에서 금세 저 아그 모습이 뛰어나올 것만 싶었지야. 하다 보니 나는 굽이굽이 외지기만 한 그 산길을 저 아그 발자국만 따라 밟고 왔더니라.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너하고 둘이 온 길을 이제는 이 몹쓸 늙은 것 혼자서 너를 보내고 돌아가고 있구나!”
“어머님, 그때 우시지 않았어요?”
“울기만 했겄냐. 오목오목 디뎌 논 그 아그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돌아왔제. 내 자석아, 내 자석아, 부디 몸이나 성히 지내거라. 부디부디 너라도 좋은 운 타서 복 받고 살거라……. 눈앞이 가리도록 눈물을 떨구면서 눈물로 저 아그 앞길만 빌고 왔제…….”
노인의 이야기가 거진 끝이 나 가고 있는 것 같았다. 아내는 이제 할 말을 잊은 듯 입을 조용히 다물고 있었다.
“그런디 그 서두를 것도 없는 길이라 그렁저렁 시름없이 걸어온 발걸음이 그래도 어느 참에 동네 뒷산까지 당도해 있었구나. 하지만 나는 그 길로는 차마 동네를 바로 들어설 수가 없어 잿등 위에 눈을 쓸고 아직도 한참이나 시간을 기다리고 앉아 있었더니라…….”
“어머님도 이젠 돌아가실 거처가 없으셨던 거지요.”
한동안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아내가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듯 갑자기 노인을 채근하고 나섰다. 그 목소리가 울먹임 때문에 떨리고 있었다.
나 역시 더 이상 노인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나마 노인을 가로막고 싶었다. 아내의 추궁에 대한 그 노인의 대꾸가 너무도 두려웠다. 노인의 대답을 들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 역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불빛 아래 눈을 뜨고 일어날 수가 없었다. 사지가 마비된 듯 가라앉아 있는 때문만이 아니었다. 졸음기가 아직 아쉬워서도 아니었다. 눈꺼풀 밑으로 뜨겁게 차오르는 것을 아내와 노인 앞에 보일 수가 없었다.
그것이 너무도 부끄러웠기 때문이다. 아내는 이번에도 그러는 나를 알고 있었던 것 같았다.
“여보, 이젠 좀 일어나 보세요. 일어나서 당신도 말을 좀 해 보세요.”
그녀가 느닷없이 나를 세차게 흔들어 깨웠다. 그녀의 음성은 이제 거의 울부짖음에 가까웠다. 그래도 나는 일어날 수가 없었다. 뜨거운 것을 숨기기 위해 눈꺼풀을 꾹꾹 눌러 참으며 내처 잠이 든 척 버틸 수밖에 없었다.
음성이 아직 흐트러지지 않고 있는 건 오히려 노인뿐이었다.
“가만두거라. 아침 길 나서기도 피곤할 것인디 곤하게 자고 있는 사람 뭣하러 그러냐.”
노인은 일단 아내의 행동을 말려 두고 나서 아직도 그 옛얘기를 하는 듯한 아득하고 차분한 음성으로 당신의 남은 이야기를 끝맺어 가고 있었다.
“그런디 이것만은 네가 잘못 안 것 같구나. 그때 내가 뒷산 잿등에서 동네를 바로 들어가지 못하고 있었던 일 말이다. 그건 내가 갈 데가 없어 그랬던 건 아니란다. 산 사람 목숨인데 설마 그때라고 누구네 문간방 한 칸이라도 산 몸뚱이 깃들일 데 마련이 안 됐겄냐. 갈 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침 햇살이 활짝 퍼져 들어 있는디, 눈에 덮인 그 우리 집 지붕까지도 햇살 때문에 볼 수가 없더구나. 더구나 동네에선 아침 짓는 연기가 한참인디 그렇게 시린 눈을 해 갖고는 그 햇살이 부끄러워 차마 어떻게 동네 골목을 들어설 수가 있더냐. 그놈의 말간 햇살이 부끄러워져서 그럴 엄두가 안 생겨나더구나. 시린 눈이라도 좀 가라앉히자고 그래 그러고 앉아 있었더니라…….”
■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순수 소설, 액자 소설, 귀향 소설
• 배경 : 어느 해 겨울, 시골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성격 : 회상적, 상징적
• 주제 : 눈길에서의 추억을 통한 인간적인 화해
• 특징 :
① 대화를 통해 사건을 전개함
② 상징을 통해 대상의 함축적 의미를 전달함
③ 역순행적 구성 방식임.
■ 줄거리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함께 증오감을 갖고 있는 ‘나’는 휴가를 맞아 아내와, 형수와 조카들과 함께 살고 계신 시골의 노모(老母)를 찾아간다.
장남인 형의 노름과 주벽으로 집안이 파산을 겪은 후부터, 그리고 형이 조카와 노모를 맡기고 세상을 떠난 뒤로 노모와 나는 거의 남남으로 살아왔다. 노모는 남은 세상이 얼마 길지 못하리라는 체념 때문에도 그랬지만, 그보다 아들에게 아무것도 주장하거나 돌려받을 것이 없는 자신의 처지를 감득하고는 아들에게 어떠한 부탁도 하지 않았다.
이러했던 노모가 마을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지붕 개량 사업으로 인해 엉뚱한 꿈을 꾼다. 즉, 노모는 은근히 자신의 집도 개량하고 싶은 소망을 내비친다. 노모의 이러한 마음을 알고도 ‘나’는 이것을 애써 외면하려 한다. ‘나’는 애초에 노모에게 빚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가 외면하려 했던 것은 지붕 개량이 아니라 그것 때문에 불거져 나온 예전 이야기이다. ‘나’는 계속 피하려 했으나 아내는 자꾸 노모에게 예전 아들을 떠나 보낼 때의 심경을 캐묻는다. ‘나’는 그러한 이야기를 애써 피하려고 한다. 아내는 집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으로 예전 집을 팔게 된 사연과 남의 집이 된 그 시골집에서 마지막 밤을 지내게 해 준 그날의 심경을 듣고자 노모에게 그때의 일을 캐묻는다.
노모는 그날 새벽 매정한 아들을 그렇게 떠나보내고 하얀 눈길을 돌아오면서 아들에 대한 사랑으로 눈물을 흘렸으며, 아들의 발자국마다 한도 없는 눈물을 뿌리며 아들의 앞길이 잘 되길 빌면서 돌아왔었음을 말해 준다.
결국, 아들에게 한 번도 해 주지 않았던 그날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심한 부끄러움과 함께 아내가 ‘나’를 세차게 흔들어 깨우는 것에도 불구하고 내처 잠이 든 척 버틸 수밖에 없었다. 노모의 사랑을 느끼며 뜨거운 눈물을 흘린다.
■ 작품 해설
이 소설은 노모(老母)의 사랑을 애써 외면하던 주인공 ‘나’가 그것을 뒤늦게 확인하게 되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즉, 고향에 대해 그리움과 함께 증오감을 갖고 있는 주인공이 어떤 일로 인해 고향을 방문하게 되고, 고향에서의 특수한 체험을 통해 인간적 화해에 도달하게 되는 귀향형 소설의 구조로 되어 있다.
이 작품은 자수성가했다고 자부하는 ‘나’와, 집안의 불행이나 재앙을 자신의 부덕함과 박복에다 돌리는 어머니, 그리고 화해에 도달하게 하는 매개 인물로서의 ‘아내’를 중심으로 이야기가 전개된다. 결국, 이 작품에서 가장 중요한 장면인 잠자리에서 노모와 자신의 아내가 이야기를 나누는 부분에서, 그동안 외면했던 어머니의 사랑을 뒤늦게 깨닫게 되면서 심정적으로 화해하게 되는 주제 의식을 표출시키고 있다.
언젠가 찾아올 아들을 위해 집주인에게 양해를 얻어 빈집을 지키는 노모, 아들이 혹시 서먹함을 느낄까 봐 이불 한 채와 옷궤 하나는 그냥 남겨 두는 어머니의 세심함, 아들에게 저녁밥 한 끼 지어 먹이고 새벽 눈길을 걸어 읍내까지 바래다 주고는 눈 쌓인 산길을 혼자 넘어오는 어머니의 모습 등을 상상하면 저절로 눈물이 고인다. 한없이 강인하면서도 연약한 어머니, 희생과 인고의 세월을 묵묵히 견뎌 온 우리들의 어머니가 바로 이런 모습이다. 이 작품은 그러한 어머니의 사랑을 학창 시절 물질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이유로 애써 외면하면서, 인정하지 않고 살아온 ‘나’의 굳은 마음이 ‘아내’라는 매개자로 하여금 녹아내리는 아름다운 회복의 소설, 귀향형 소설이다.
이 소설 속에 나오는 ‘눈길’이 주는 이미지는 ‘나’와 ‘어머니’에게 각기 따로 작용한다. ‘나’에게 ‘눈길’은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의 쓰라린 추억과 몰락해 버린 집안과 스스로 자수성가해야만 하는 운명을 의미한다. 그리고 ‘어머니’에게 ‘눈길’은 자식에 대한 사랑을 스스로 확인하게 되는 상징물로서, 스스로 받아들여야 하는 혹독한 시련이면서도 따스한 자식에 대한 사랑의 이미지를 의미한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눈길의 의미
작품의 결말 부분에서 모자의 기억 속에 교차되며 회상되고 있는 <눈길>은 작품의 서사적 의미의 핵심이다. 아직 깜깜한 새벽길, 급히 상경하는 자식이 안쓰러워 자식과 함께 나선 눈길, 그러나 자식이 상경하고 난 뒤 눈물을 흘리며 돌아서는 눈길은, 몰락한 집안의 '어머니'가 겪어온 인고의 생애 전체를 포괄하는 의미를 지닌다.
2. 빛의 대조적 의미
자식이 떠난 뒤에 시린 눈으로 차마 보지 못했던 과거 속의 '아침 햇빛'과 부끄러워서 '나'로 하여금 차마 눈을 뜨지 못하게 하는 '전등 불빛'이 묘한 대조를 이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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