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늙어 가는 사람의 떨림이란 좀 어색하지 않습니까. 늙어 가는 사람의 떨림이라기보다 늙어 가는 여자의 떨림이란 말이 훨씬 자연스러운 것이고 제가 스스로를 언제나 사람이라고 느끼던 것에서 저의 성을 찾아 여자가 된 것이, 그 자각이 이제라도 기쁨으로 다가오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저는 비로소 여자에 눈떴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그리고 그 자각이 나 하나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내 어머니와 할머니, 이분들은 내가 실제 보았던 인물들이고, 말로만 들었던 증조할머니 그리고 더 거슬러 올라가 선조의 여자들까지도 생각해 보게 되고, 인맥을 통해 면면히 흐르는 여자로서의 숙명 같은 것도 감지하게 되었습니다.
자궁을 가진 여자로서의 숙명감,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로서의 모(母)라는 의미, 결연히 인생과 마주한 여자로서 서야 하는, 또한 그중에서도 동양의 여자, 소나무가 크고 있는 지역의 여자, 이런 의미들이 밀려 들어오는 것입니다. 그것은 복 받을 만한 서구의 자연, 그리고 그들의 깨어 있는 문화가 만들어 놓은 개인주의, 저의 한때 그 개인주의에 공감하고 그를 따르려 했습니다만 서구의 개인주의와 동양의 미덕과는 어쩔 수 없이 다를 수밖에 없다는 그런 깨달음이 망연히, 그러나 어떤 확신감을 가지고 다가오는 것입니다.
우리가 서양에서만 보던 서양의 잣나무와 솔바람을 품어 안느 소나무와는 다를 수밖에 없다는 지각, 우리가 이 시간 그리고 동양권인 이 공간 속에 태어났다는 것은 하나의 운명이기도 하지 않겠습니까. (중략)
집에는 화투 손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인원은 대개 두 사람이나 세 사람, 섰다가 아닌 민화투로서 작은 푼돈이 왔다 갔다 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판이 큰 것은 아니었습니다. 어머니는 화투를 짝짝짝 다듬어 치다가 늦은 저녁때가 되면 다락문을 열고, 부엌에서 떨고 있는 동생과 내게 소리치셨습니다. 다락문을 열어야만 부엌에 그 소리가 잘 들리기 때문입니다.
“얘 가혜야, 왜 아침에 먹던 된장찌개 있잖니? 거기다 된장을 한 숟가락 떠다가 더 풀고 두부 한 모 썰어 넣고 마늘 다져 넣고 보글보글 끓여라. 그리구 며루치도 좀 집어넣어라. 그래서 밥하구 상을 차려서 좀 가지고 들어와라, 응. 김치는 새것을 썰어라.”
부뚜막에서 졸 듯이 쪼그리고 앉아 연탄 냄새를 맡고 있던 동생과 나는 비로소 부스스 몸을 일으켜 어머니가 지시한 대로 막숟가락과 양재기를 하나 가지고 된장을 푸러 어두워진 장독대로 더듬어 갑니다.
그때 우리가 느낀 것은 손님 앞에서 큰 소리로 부엌에다 대고 소리치는, 교사까지 지낸 어머니의 교양에 대한 반감이었을까요. 더구나 신비감도 없이 아침에 먹던 된장찌개에다가, 라고 서슴없이 말하는 것은 정말 싫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불을 땐 방이라고는 화투 치는 방뿐인데, 아이들이 있을 곳이 없는 데 대한 배려는 어떻게 되는 것인가, 그런 감정들이 뒤엉켜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어머니는 바로 그 된장찌개를 이제 와서 자랑하는 것입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정말 그 된장찌개가 맛이 있었더면, 첫째는 우리 집의 장맛이 좋았을 것이고(그것은 어머니의 손이 단 데 연유했을것입니다만, 아니 그보다 할머니가 시골에서 쑤어 오신 메주에 달렸을 것입니다.), 그러고는 아침에 먹던, 의 바로 그 먹던에 원인이 있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한번 끓였던 것에다 다시 끓이면 그만큼 재로가 여러 가지 많이 들어간 결과가 되고, 아울러 푹 달우어진 맛이 우러나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음식에서 늘 영양가를 우선으로 생각했고, 또 아무리 조금 남은 것이더라도 절대로 버리는 일이 없으므로, 그런 것들이 늘 찌개에 들어가게 마련이어서 두루뭉수리 독특한 찌개 맛을 자아냈는지 모릅니다
이렇게 정의 내리듯 생각해 보지만 돌이켜 보면 어린 시절 항상 음식에 대한 아쉬움을 품고 지냈던 것 같습니다. 즉, 된장찌개에 가장 생명이라고도 할 수 있는, 마지막에 파를 썰어 넣는 일이 대개 빠져 있었습니다. 다시 말하면 어머니의 음식에서 항상 그 파와 같은 부분이 빠지는 것입니다.
음식점에서 장국밥을 처음 먹어 보던 날, 음식점 특유의 그 깔끔한 맛이 후춧가루와 깨소금, 파 같은 양념들에서 오는 것임을 알고, 후춧가루라는 처음 맛보는 양념에 거의 경의마저 품었을 지경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왜 후춧가루와 파와 같은 부분을 생략했는가. 가난했던 탓일가. 그 당시는 전후로서 모두들 대강 그냥 끓여 먹고 살던 시절이었다고 생각해 보려 해도, 그 후 이웃집이나 친구들 집이 그런 것들을 점점 갖춘 생활로 변해 감에 비해 우리 집은 항상 그대로였습니다.
오히려 점점 더 빛을 잃은 뭉뚱그려진 음식이었습니다.
어머니의 자랑을 제가 시큰둥하게 넘기게 되는 것은 바로 그런 까닭입니다. 뿐더러 어머니의 음식이 설혹 맛이 있었다 하더라도 그것이 늘 우리에게 먹게끔 해 주었던 그런 따뜻한 밥상은 아니었다는 인상 때문입니다. 누구나 늘 따뜻한 손길 같은 것을 그리워하고 있듯이 누구나 다 바로 그 따뜻한 밥상을 그리워하고 있을 것입니다.
하루 종일 그림자처럼 조용히 일만 하고 있는 여인, 조용히 묵묵히 끝도 없이 일을 하고 있는 여인, 아플 때 와서 손을 얹어 주고 물을 떠다 주고, 그리고 매일매일 밀물처럼 닥쳐오는 세 끼의 밥을 따뜻이 먹게끔 차려 주는 여인이 비치어 옵니다. 대부분의 옛 여인의 모습이 그랬을 것입니다.
어린 시절 기억에 떠오르는 할머니가 그랬으므로 실지 제가 본 생생한 여인의 모습으로 다가듭니다.
어머니와 저는 그런 여인은 아닙니다. 그런 여인이 아닐뿐더러 오히려 밥상을 깨부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은가 하는 솔직한 두려움을 느낍니다. 아니, 깨부순다는 표현이 너무 과격하다면 언제까지나 부엌과 밥상에 친해지지 않는다고 할까요. 부엌에서 찬바람 같은 것이 돈다고 할까요.
■ 전체 줄거리(한국현대문학대사전 참고)
1>
언젠가 당신은 제게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한번 써 보라고 말하셨습니다. 저는 그 얘기를 지나쳐 들었습니다, 라기 보다 글이라고는 편지와 일기 정도밖에 써 보지 못한 제가 어떻게 그런 것을 쓸 수 있을까 두려운 마음이 앞섰습니다.
저는 이제껏 마흔 세 살이라는 나이가 되도록 단 한번도 스스로를 여자로 느끼지 못했습니다. 저는 단지 여자의 흉내만을 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지금 몹시 흥분된 상태이고, 되도록 내일 새벽까지 이 글을 마쳐 보겠다는 각오 하에 펜을 들었으므로 나오는 대로 두서없이 쓸 수밖에 없겠습니다.
조금 전 마지막 산불 뉴스로 산불이 아직도 계속되고 있어 예비군이 동원되고 헬리콥터까지 소화제를 뿌리는 현장을 보았습니다. 그 산불은 오늘 할머니 묘소에서 집안 아저씨와 제가 낸 것입니다.
2>
어머니와 저의 손은 똑같이 생겼습니다. 어머니는 따뜻한 밥상을 차리지 못하는 여인입니다. 이렇게 말한다면 어머니는 펄쩍 뛰실 것입니다. 어머니는 종종 자신의 손이 달아서 반찬이 맛이 있다고 자랑을 하십니다. 어머니는 교원 생활을 오래 하셨으나 웬일로인지 잠시 방황하던 시절 화투로 날을 지새셨습니다.
어린 시절의 기억 중 아버지가 우리 집에 얼굴을 보인 적이 없는데, 아버지는 작은어머니를 얻어 생활하셨고 동생이 태어나던 해 객지에서 병사 하셨다고 듣고 있습니다. 집에는 화투 손님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3>
내 나이 서른 둘, 여자로서 절정일 때일까요? 화장을 하기 위해 거울 앞에 다가앉으면 가장 젊은 젊음이 은은히 울려 퍼지는 때 그런 나이에 저는 결혼생활 육 년 만에 구겨진 버선처럼 되어 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아이가 없는 것도 큰 이유가 되겠지요. 그러나 가장 직접적인 원인은 결혼예물 때문이려니 막연히 생각했습니다.
신혼여행 중 바닷가의 횟집에 앉아 어떻게 살고 싶은가 남편이 제게 물었습니다. 인격적으로 서로 존중하며 살고 싶다고 저는 말했지요. 제가 어떻게 그런 말을 했는지 지금 생각하면 의아스럽습니다. 홀 시아버님이 돌아가시던 때의 눈, 그 눈의 아우성을 잊을 수 없습니다. 저는 현관 가득히 벗겨져 있는 문상객들의 구두를 차례로 정돈해 놓고 있다가 눈을 들었을 때 현관문 하나 가득히 새까맣게 떨어져 내리고 있는 눈을 보았습니다.
4>
당신을 만난 것은 그 무렵이었습니다. 당신은 제게 길을 물었지요. 당신의 부름에 잠시 멈추는 순간, 길에는 아무도 없고 당신과 저 둘만 있었습니다. 길에 있는 그 많은 사람들이 갑자기 전부 멀어져 간 것입니다. 삼 일째 되던 날 우리는 다시 만났습니다. 당신의 얼굴에서 역력한 반가움의 빛을 저는 어둠 속에서도 잘 분간해 낼 수 있었습니다.
새로 생긴 동네 지하다방에서 우리는 차를 마시고 그리고 위스키를 한 잔씩 마셨습니다. 당신의 전화를 기다리기 며칠 만에 드디어 당신에게서 전화가 왔습니다. 당신의 목소리를 듣고 저는 추운 바람이 불어오는 듯 흐읍하고 떨었습니다. 당신과 저의 만남은 그렇게 시작된 것입니다. 그것이 첫 시작이었습니다. 그렇게 시작되어 어느새 3년이 지났습니다.
5>
타 버린 할머니의 묘 주위 여기저기 앉아서 마을 사람들은 아저씨가 권하는 담배를 땀을 닦으며 피웠습니다. 불길이 그만해서 다행이라고 입을 모아 말했습니다. 이것이 태백의 줄기일까, 이런 생각을 하다가 이북5도청에 등록되어 있는 단천군민묘지, 그런 고유 명사가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실향민, 그렇습니다. 어휘 자체에서부터 느껴지는 그 짙은 이북 지방의 색채, 그 중에서도 함경도. 할머니나 어머니 고향에 대해서 거의 모르고 어떤 느낌도 가지고 있다고 생각지 않다가도 함경도 사투리를 들으면 우선 반가운 마음이 듦을 어쩔 수 없습니다.
고향이란 정말 특이한 어떤 곳인가 봅니다. 이북에서 살다가 피난을 나와 갑자기 산 설로 물 설고 사람 선 모든 것이 어설픈 상황에서 빚어진 그 당시 실향민의 진면목이 들어 있는 얘기들이 있습니다. 삼촌은 평소에 얌전하다가도 술을 마시면 독째로 퍼마시며 사람이 돌변하여 걷잡을 수 없이 되었습니다. 세간을 부수고 있는 삼촌을 할머니가 말리려 하다가 냅다 마당에 내팽개쳐졌습니다. 할머니가 봉숭아 꽃 밭 위에 나가떨어졌던 장면을 제가 실제로 본 듯 합니다만 실지 보았던 것인지 아니면 얘기로 듣고 상상한 것인지 잘 분간 할 수 없습니다.
6>
6.25 때 미쳐 피난을 떠나지 못했던 우리는 아버지의 친구 분이던 군인의 도움으로 뒤늦게 피난을 떠날 수 있었습니다. 할머니는 집에 그대로 남겠다고 하셨습니다. 공산당들이더라도 늙은이 혼자 남아 있는 것을 해지지 않을 것이라고 말하셨지요. 할머니는 대문 앞에서 옷고름으로 눈물을 닦으며 우리를 태운 지프차가 모퉁이를 돌아설 때까지 서 계셨습니다. 우리를 실은 차가 안보이게 되자 울음을 터뜨리셨을 것입니다. 피난지에서 돌아온 날 밤을 상기할 수 있습니다.
칠흑 밤 속에서 우리가 두드리는 대문소리에 할머니는 한참 만에 마루 끝에 나와 서서 게 누구 왔소? 게 누구 왔소? 하고 소리치셨습니다. 할머니. 할머니... 우리가 부르는 소리에 할머니는 허겁지겁 대문을 열러 나오셨습니다. 이게 누구냐. 이것들이 살아 있었구나, 결국 살아서 보게 되는구나, 이렇게 중얼거리시면서... 할아버지는 타관에서 첩을 얻어 사시고 할머니는 일찌감치 체념하며 살아오신 것일 거예요.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여자가 딸 셋에 외아들을 데리고 그 어려운 시대를 살아온 고난의 세월을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그 후 얼마 안되어 할머니는 이를 닦으시다가 갑자기 쓰러지셨고 며칠 동안 의식 없이 누워 계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7>
어머니와 저의 싸움이 봄철에서 여름철, 가을철로 접어들었다가 겨울, 봄에 이르기까지 몇 해인가 거듭했지요. 싸우고 또 싸우는 동안 어머니는 드디어 쓰러지셨습니다. 그러던 어머니는 비교적 쉽게 입이 제자리에 돌아오고 마비도 풀렸습니다만 워낙 아프던 관절 때문에 다리에 더욱 힘을 잃고 침대에 드러눕게 되었습니다. 화장실 출입만 겨우겨우 하셨지요.
이제는 어머니와의 싸움을 화해로 이끌어 가고 싶은 기분이 조금씩 들기도 합니다. 이 화해를 하고 싶은 기분이란 당신과의 결별이라는 또 다른 의미를 내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어머니와 이제 화해를 한다고 해도 함께 산다는 것은 속박일 뿐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러나 바로 그런 삶을 제가 사는 것이겠지요. 소멸해 가는 어머니를 담당하는 것이 저의 운명이라 생각합니다. 그 옛날 어머니가 몸이 아파 조용히 있고 싶다고 할머니를 이모댁에 가시게 한 것도 바로 그런 연유가 아니었을까 지금 생각해 봅니다.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사랑하는 당신. 당신이 잃어 가는 것은 무엇인가요. 당신은 옛집을 찾아 오셨나요? 저는 이 순간 당신을 비롯한 모든 사람이 실향민이라고 느껴집니다.
■ 핵심 정리
• 갈래 : 현대소설, 중편소설
• 성격 : 고백적, 성찰적
• 어조 : 여성적, 고백적 어조
• 배경 : 서울, 겨울의 어느 날 밤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주제 : 한 중년 여성의 정체성에 대한 자각과 삶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깨달음
• 특징 :
① ‘당신’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
② 내면 심리를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
③ 할머니, 어머니, 나로 이어지는 여인 삼대의 이야기를 통해 자신의 여성적 정체성을 확인하고 있음
④ 자연의 이미지(눈)와 결부된 의식의 기술을 심리를 드러냄
⑤ 의문이나 추측의 종결어미를 활용하여 단정적인 서술을 피하고 있음
■ 작품 해설 1
1989년 8월 『현대문학』에 발표된 김채원의 중편소설로 ‘밥상을 차리는 여인’이라는 부제를 달고 있다.
1989년도 이상문학상 수상작이다. 이 작품은 나이가 들어 마흔 셋이 된 중년의 여자를 화자로 등장시켜 자신이 살아온 과정을 고백적 형식으로 서술하게 한다. '언젠가 당신은 제게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한번 써보라고 말하셨습니다.'라고 이야기가 시작된다. 여자는 마흔 셋의 나이에 들어서야 비로소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발견한다. 그 자각의 과정에 대한 담담한 고백적 진술이 소설의 내용에 해당한다. 여자의 어머니와 외할머니는 모두 남편의 사랑을 받지 못했으며, 외할머니는 제대로 모시지 않고 이모에게 보내 버렸으며, 외할머니는 거기에서 운명했다.
여자가 어머니의 불효에 대해 항의하자, 어머니도 쓰러진다. 여자는 자신도 어머니와 같은 길을 걷고 있는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여자는 이제 따뜻한 밥상을 기다리기보다 밥상을 차리는 여자가 되겠노라고 다짐한다. 이러한 이야기에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 고백한다는 것은 곧 현재의 자신과 거기에 이르는 다단했던 과거의 역정들을 되돌아 보고 성찰하는 일이다. 그러므로 여기에는 추억 속의 물상들을 둘러싸고 있는 반성과 회상의 분위기가 형성된다.
이러한 분위기는 바로 현재적 삶의 의미에 대한 물음으로 연결되며 앞으로 걸어가야 할 삶의 방향을 암시하는 데에까지 나아간다. 여자는 어머니가 할머니를 이모네 집으로 보내 버렸던 것은 점점 소멸해 가는 할머니의 형상을 더이상 감당하기 어려웠던 때문이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할 정도로 어머니를 이해하게 된다. 이제 여자에게 남은 것은 결핍된 것으로서가 아닌, 베풀어야 할 것으로서의 사랑이다. 여자가 말하는 따뜻한 밥상이라는 것도, 그리고 다시 만난 옛날 이웃 동무인 '당신'에 대한 애틋한 정도 모두 이 사랑으로 연결된다. 마흔을 넘은 여자가 가질 수 있는 그 깊은 사랑이야말로 소설의 서두에서 말한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의 실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참고
■ 작품 해설 2
할머니와 어머니, 나로 이어지는 여인 삼대의 이야기가 한국이라는 역사적 상황과 더불어 특수한 모녀간의 갈등의 양상으로 전개된다. 할머니와 어머니, 나는 젊어서 남편에게 버려지는 공통된 운명에 처한다.
할머니는 한국전쟁을 겪으며 딸 셋과 아들 하나를 키워내는데 하나뿐인 외아들마저 월북하고, 큰 딸에게서 버림받은 채 죽는다. 큰 딸인 어머니 역시 두 딸을 키우며 홀로 살아왔고, 검버섯이 핀 늙은이가 되어 이혼녀인 '나'와의 갈등 속에서 살아간다. '나'는 한 남자를 만나 사랑을 하면서 비로소 ‘나이 들어가는 여자의 떨림’을 느끼게 되고, 할머니와 어머니의 인생을 이해하게 된다.
이 작품은 세 여인의 갈등 속에서 자궁을 가진 여자로서의 숙명감, 결연히 인생과 마주한 여자로서 서야 하는 숙명에 대해 그리고 있다. 특히 내면 심리를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고 있는데, 이 ‘의식의 흐름’은 ‘눈’이라는 자연과 결부되어 있다. 어린 시절, 밤중에 동치미를 가지러 나갈 때 내리던 눈, 피난지에서 보았던 눈 내리던 벌판의 나무, 홀시아버님 장례식에서 보았던 눈은 도달할 수 없는 이상의 세계로 그려지고 있다.
할머니 산소에 난 산불을 보면서 할머니를 추억하고 같은 함경도가 고향인 ‘순쟁이’에게로, 피난시절과 외삼촌, 어머니의 기구한 인생, 나의 현재 상황에까지 의식이 자연스럽게 이어지는 고백체 양식이다.
의식의 흐름에 따라 서술하는 양식의 이 소설은 의식의 흐름을 정착시키고 내적 독백의 수법을 구사한 J.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 M.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와 같은 심리소설에 속한다.
1989년 제13회 이상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자기 몫의 삶을 새롭게 인식하기 시작하는 중년여성의 심리를 포착함으로써 인간의 운명적 쓸쓸함, 어쩔 수 없는 삶의 허망함을 드러내는 이 소설은, 또한 자연의 이미지와 결부된 의식의 기술, 삶에 때때로 필요한 환상의 포착이 이 작가의 몫임을 말해주고 있다"라고 선정 이유서는 밝히고 있다.
- 두산백과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된장찌개의 의미
‘된장찌개’는 어머니가 자신의 음식 솜씨를 자랑하는 하나의 근거이지만 과거에 서술자가 어머니에 대해 거리감을 느끼게 된 계기가 되는 소재이다. ‘나’에게 ‘된장찌개’와 같은 어머니의 음식은 자신이 동경하던 ‘따뜻한 밥상’과는 거리가 먼 것임을 지적하며 자신도 어머니와 같이 ‘부엌과 밥상’에 친해질 수 없는 유형임을 고백하고 있다.
2.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1910~1920년대에 걸쳐 영국 소설에서 사용하던 실험적 방법을 말한다. 본래 심리학에서 나온 것으로 감각이나 상념, 기억, 연상 등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학에서는 이러한 의식의 흐름을 어떠한 인위적인 장치 없이 인간의 정신에서 나오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데, 이를 자동 기술법이라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자기가 겪은 일, 그 일을 통해 떠오르는 과거의 경험, 생각, 느낌 등을 떠오르는 그대로 써내려 가는 것을 말한다. 의식의 흐름 소설은 일반적으로 내적 독백의 서술적 기법을 사용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1925) 등이 있다.
3. 등장인물
- 나(가혜) : 이 작품의 화자로 43세의 중년 여성. 이혼한 후 어머니와 함께 살고, ‘당신’과 만남을 통해 영성적 삶에 대해 성찰하게 된다.
- 어머니 : 교편을 잡고 교사 생활을 하였으나 첩에게 남편을 빼앗기고 홀로 두 딸을 키우며 화투로 소일거리를 삼는다. 외할머니의 기구한 삶과 그런 외할머니를 모시지 않고 불효를 했던 일로 ‘나’와 말다툼을 벌이다 쓰러지는 일로 거동이 불편하다.
- 외할머니 : 1남 3녀를 두었지만 남편의 첩살이와 외아들의 월북, ‘나’의 어머니인 끈 딸에게마저 버림받는다.
- 당신 : 나(가혜)의 남자친구. ‘나’와 어릴 적 한 동네에서 살던 친구였으나 이후 소식이 없다가 우연히 길은 묻는 ‘당신’을 만난다. ‘나’에게 삶의 긴장감을 불러오고 순진성과 욕망을 일깨우는 존재이다.
- 영혜 : ‘나’의 여동생. 간호원으로 서독에 파견되어 독일인과 결혼해서 독일에 살고 있다.
- 외삼촌 : 술만 먹으면 난폭해지는 사람으로 타향살이에 실패한 인물. ‘나’와 외할머니에게 행패를 일삼다가 월북한다.
- 남편 : 결혼 예물과 아이 문제로 ‘나’와 갈등하다 이혼한다. 미국으로 건너가 재혼하여 아이를 낳고 잘 살고 있다.
■ 작가 소개
김채원은 시인인 김동환, 소설가 최정희의 차녀이다. 언니는 소설가 김지원이며, 아들은 배우 백수장. 1946년 경기도 덕소에서 출생하여 1968년 이화여대 미대 회화과를 졸업하였고, 1975년 <밤인사>로 ≪현대문학≫을 통해 등단하였다. 주요 작품으로 단편 ≪얼음집≫ ≪몽수리공원에 내리는 가을≫ ≪밀월≫ ≪봄의 환(幻)≫ 등이 있으며, 작품집으로 ≪먼집 먼바다≫ ≪초록빛 모자≫ 등이 있다. ‘겨울의 환’으로 1989년 이상문학상을 수상한다.
■ 엮어 읽기
*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 박태원
* 유예 – 오상원
* 날개 - 이상
'문학 이야기 > 현대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특급품 - 김소운 (0) | 2021.02.19 |
---|---|
웰컴 투 동막골 - 장진 (0) | 2021.02.18 |
날개 - 이상 (0) | 2021.02.14 |
모래톱 이야기 - 김정한 (0) | 2020.04.29 |
동행 - 전상국 (0) | 2020.04.09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