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급품 - 김소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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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비자반(榧子盤)* 일등품 위에 또 한층 뛰어 특급품이란 것이 있다. 반재며, 치수며, 연륜이며 어느 점이 일급과 다르다는 것은 아니나, 반면에 머리카락 같은 가느다란 흉터가 보이면 이게 특급품이다. 알기 쉽게 값으로 따지자면, 전전(戰前) 시세로 일급이 2천 원(돌은 따로 하고) 전후인데, 특급은 2천4, 5백 원 —, 상처가 있어서 값이 내리는 게 아니라 되레 비싸진다는 데 진진한 묘미가 있다.
 반면이 갈라진다는 것은 기약지 않은 불측의 사고이다. 사고란 어느 때, 어느 경우에도 별로 환영할 것이 못 된다. 그 균열의 성질 여하에 따라서는 일급품 바둑판이 목침감으로 전락해 버릴 수도 있다. 그러나 그렇게 큰 균열이 아니고 회생할 여지가 있을 정도라면 헝겊으로 싸고 뚜껑을 덮어서 조심스럽게 간수해 둔다.
(갈라진 균열 사이로 먼지나 티가 들어가지 않도록 하는 단속이다.)
 1년, 이태 ― , 때로는 3년까지 그냥 내버려 둔다. 계절이 바뀌고 추위, 더위가 여러 차례 순환한다. 그동안에 상처 났던 바둑판은 제힘으로 제 상처를 고쳐서 본디대로 유착(癒着)해 버리고, 균열진 자리에 머리카락 같은 희미한 흔적만이 남는다.
 비자의 생명은 유연성이란 특질에 있다. 한번 균열이 생겼다가 제힘으로 도로 유착, 결합했다는 것은 그 유연성이란 특질을 실지로 증명해 보인, 이를테면 졸업 증서이다. 하마터면 목침감이 될 뻔했던 것이, 그 치명적인 시련을 이겨 내면 되레 한 급이 올라 특급품이 되어 버린다. 재미가 깨를 볶는 이야기다.
 더 부연할 필요도 없거니와, 나는 이것을 인생의 과실(過失)과 결부시켜서 생각해 본다. 언제나, 어디서나 과실을 범할 수 있다는 가능성 —, 그 가능성을 매양 꽁무니에 달고 다니는 것이, 그것이 인간이다.
 과실에 대해서 관대해야 할 까닭은 없다. 과실은 예찬(禮讚)하거나 장려할 것이 못 된다. 그러나 어느 누구가 ‘나는 절대로 과실을 범치 않는다’고 양언(揚言)할* 것이냐? 공인된 어느 인격, 어떤 학식, 지위에서도 그것을 보장할 근거는 찾아내지 못한다.  (중략)
과실은 예찬할 것이 아니요, 장려할 노릇도 못 된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과실이 인생의 ‘올 마이너스’일 까닭도 없다.
 과실로 해서 더 커 가고 깊어 가는 인격이 있다.
 과실로 해서 더 정화(淨化)되고 향기로워지는 사랑이 있다. 생활이 있다.
 누구나 할 수 있는 노릇은 아니다. 어느 과실에도 적용된다는 것은 아니다. 제 과실, 제 상처를 제힘으로 다스릴 수 있는 비자반의 탄력 —, 그 탄력만이 과실을 효용한다.
인생이 바둑판만도 못하다고 해서야 될 말인가.

*비자반: 윗면을 비자나무 판자로 대어 만든 바둑판.
*양언할: 공공연하게 소리 높여 말할.

 

■ 핵심 정리

• 갈래 : 중수필
• 성격 : 교훈적, 유추적
• 제재 : 비자반
• 주제 : 삶의 과실을 극복하는 의지의 필요성
• 특징 :
 ① 현실의 예화와 글쓴이의 관념을 나란히 제시함으로써 독자의 이해를 도움.
 ② 현실적 사례에서 인생의 보편적 교훈을 이끌어 내는 구성을 취함.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비자반이 우연한 사고로 생긴 균열을 특유의 유연성으로 극복하면 특급품이 되는 것처럼, 인생에 있어서도 과실(過失)을 극복할 수 있는 의지와 유연성이 필요하다는 교훈을 담고 있다. 글쓴이는 이와 같은 주제를 비자반의 예화와 다른 여러 가지 예화를 통해 현실감 있게 전달하고 있다. 제시된 부분 다음에 나오는 첫 번째 예화는 자신의 침실에 들어온 남자를 잠결에 남편으로 착각하고 동침했다가 사실을 알고 난 뒤에 자결한 부인의 경우인데, 글쓴이는 이와 같은 지조와 의기를 칭송하면서도 ‘여기 하나의 여백을 남겨 두고 싶다.’고 하여, 인생에 있어서 과실(過失)의 아픔을 딛고 꿋꿋이 살아가는 태도가 필요한 것 아니냐고 묻는다. 글쓴이는 그 다음으로 6·25 전쟁 뒤의 미망인들이 생계를 위해 할 수 없이 윤락을 하게 되는 경우를 거론하면서, 청교도적인 도덕을 앞세워 그들을 비난하기에 앞서 그들의 쓰라린 고통을 먼저 이해해야 한다고 강변한다. 그리고 마지막 예화로 납북 미망인인 한 부인의 경우를 들고 나서, 과실이 예찬할 만한 것은 아니지만 과실을 딛고 일어섬으로써 더 크고 깊어지는 인격이 있다고 하면서, ‘인생이 바둑판만도 못하다고 해서야 될 말인가.’라는 반문으로 작품을 끝맺었다. 이와 같이 이 작품은 과실을 범하기 쉬운 인간의 무력함과 어쩔 수 없이 시련을 겪게 되는 현실의 혹독함을 전제로 하여, 그와 같은 시련과 과실을 딛고 일어설 수 있다는 것이 인간의 존엄성을 진정으로 보여 주는 것이라 하였다. 인간의 무력함과 고통에 대한 글쓴이의 이해심과 따뜻한 애정을 느끼게 하는 작품이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특급품>은 번역가이자 시인인 김소운의 수필이다. 이 글은 1966년에 남향문화사에서 발간한 수필집 『건망허망』(健忘虛妄)에 수록되어 있다. 저자 김소운은 특급품으로 치는 바둑판의 특성을 설명한 뒤 인생을 이에 비유하여 설명한다. 이 글은 대상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교훈성에 주목하여 유연성이 있는 삶의 가치에 대한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기록하고 있다.
 비자목은 바둑판을 만들기에 아주 적절한 목재이다. 비자는 연하고 탄력이 있어 바둑을 두면 표면에 상처가 생기는데, 시간이 지나면 이것이 본래대로 평평해진다. 이런 유연성 때문에 비자는 바둑판의 소중한 재료로 여겨진다. 비자반에는 일등품을 넘어서는 특등품이 있는데 이 특등품은 오히려 가는 흉터가 있는 제품이다. 갈라진 비자반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균열이 치유되고 이런 비자반은 특등품으로 간주된다. 이를 인생의 과실과 연결시켜 볼 수 있다. 인간은 언제나 애정과 관련된 과실을 범할 수 있다. 사람들은 과실을 범하게 되면 죽음과 같은 극단적인 방식으로 그것을 처리하고자 한다. 하지만 자신의 과실을 죽음으로 갚으려하는 것이 만이 인생의 과실을 해결하는 방법이라 할 수는 없다. 과오를 뉘우치면서 살아가는 자들은 특급품의 예외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절개는 찬양할만한 것이나 그것이 유일한 표준이 될 수는 없다. 과실은 장려할 것은 못되지만 과실로 인해 인격이 깊어지고 사랑이 단단해질 수 있다. 비자반의 탄력으로 과실을 효용해야한다.
 <특급품>은 비자나무로 만들어진 바둑판의 특성을 통해 인생의 과실을 비유적으로 설명한다. 비자나무로 만들어진 바둑판에 상처가 있을 때 오히려 일급보다 높은 특급품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인생에 있어 유연한 태도를 강조한다. 인생에 있어서도 자신의 과실을 뉘우치고 과실로 인한 상처를 치료하려기 위해 꾸준히 노력한다면 더 나은 삶을 만들어 나갈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급품>은 이러한 교훈을 바둑판이라는 구체적인 대상을 통해 그려내고 있다는 점에 특징적이 있다.

 - 권영민, 한국현대문학대사전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특급품’에 나타난 유추
 비자나무 바둑판은 정상적인 것은 일등품이 되지만 균열이 생기고 오랜 시간을 지내며 스스로의 힘으로 유착, 결합이 되면 오히려 더 높은 가치를 평가 받는 특급품이 된다고 한다. 이는 인생도 마찬가지이다. 과실이 있어도 이를 극복하고 이겨내면 오히려 인생의 성공을 얻을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이렇게 비자나무 바둑판을 인생의 삶으로 유추하여 볼 수 있다.

2. 교술 문학의 특징과 구성(EBS 수능특강 사용설명서 참고)
 이 작품은 교술 문학의 특성을 잘 보여 주고 있으며 교술 문학을 구성하는 여러 요소를 적절하게 활용하고 있다. 
 * 작품 속의 ‘나’는 글쓴이 자신이며, 글쓴이의 자기 성찰과 사유가 분명히 드러남.
 * 개성적 안목을 바탕으로 인간의 삶을 잘 포착함.
 * 자유로운 형식과 다양한 표현 방식이 돋보임.
 * 자신의 생각을 알리기 위한 목적으로 창작되며 교훈을 전달함.

■ 작가 소개

김소운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김소운

일제강점기 「신조」 등을 저술한 시인. 수필가·번역문학가. [개설] 본명 김교중(金敎重). 개명은 김소운(金素雲). 호는 소운(巢雲), 필명은 삼오당(三誤堂). 부산 출신. [생애 및 활동사항] 191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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