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 김수영

 

■ 본문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
저 왕궁(王宮) 대신에 왕궁(王宮)의 음탕 대신에
오십 원짜리 갈비가 기름 덩어리만 나왔다고 분개하고
옹졸하게 분개하고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한테 욕을 하고
옹졸하게 욕을 하고

 

한번 정정당당하게
붙잡혀 간 소설가를 위해서
언론의 자유를 요구하고 월남(越南) 파병(派兵)에 반대하는
자유를 이행하지 못하고
삼십 원을 받으러 세 번씩 네 번씩
찾아오는 야경꾼들만 증오하고 있는가.

 

옹졸한 나의 전통은 유구하고 이제 내 앞에 정서(情緖)로 가로놓여 있다.
이를테면 이런 일이 있었다.
부산에 포로수용소의 제사십(第四十) 야전 병원(野戰病院)에 있을 때
정보원이 너어스들과 스폰지를 만들고 거즈를 개키고 있는 나를 보고 포로 경찰이 되지 않는다고
남자가 뭐 이런 일을 하고 있느냐고 놀린 일이 있었다.
너어스들 옆에서

 

지금도 내가 반항하고 있는 것은 이 스폰지 만들기와
거즈 접고 있는 일과 조금도 다름없다.
개의 울음소리를 듣고 그 비명에 지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애놈의 투정에 진다.
떨어지는 은행나무 잎도 내가 밟고 가는 가시밭

 

아무래도 나는 비켜서 있다. 절정(絶頂) 위에는 서 있지
않고 암만해도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다.
그리고 조금쯤 옆에 서 있는 것이 조금쯤 비겁한 것이라고 알고 있다!

 

그러니까 이렇게 옹졸하게 반항한다.
이발쟁이에게
땅 주인에게는 못하고 이발쟁이에게
구청 직원에게는 못하고 동회 직원에게도 못하고
야경꾼에게 이십 원 때문에 십 원 때문에 일 원 때문에
우습지 않느냐 일 원 때문에

 

모래야 나는 얼마큼 작으냐.
바람아 먼지야 풀아 나는 얼마큼 작으냐.
정말 얼마큼 작으냐…….

 

■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비판적, 자조적, 반성적
• 제재 : 부조리한 권력과 사회현실
• 특징 :
 ①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함.
 ② 대조적 상황을 제시하여 화자의 처지를 드러내고 주제를 부각함.
• 주제 : 억압적인 정치 권력에 대적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 의식의 폭로

 

■ 작품 해설 1

 이 시는 작가가 1965년 11월 4일 고궁 나들이를 다녀오고 나서 쓴 작품이다. ‘왜 나는 조그만 일에만 분개하는가’라는 시적 진술에서 드러나듯이 그는 역사와 현실의 불합리, 부조리에 대해서는 저항하거나 비판하지 못하고 일상의 사소한 일에만 화를 내는 자신의 소시민적 태도에 대해 비판하고 있다. 4·19 혁명으로 한층 부풀었던 자유와 사랑과 양심에의 희망이 5·16 군사 쿠데타로 일순간에 물거품이 된 상황에서 김수영은 소시민으로서 살아가는 일만이 가능한 자신의 처지를 조롱함으로써 한때 그가 소리 높여 외쳤던 자유, 사랑, 혁명이 좌절된 현실을 우회적으로 비판하고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시에서 화자는 자신의 소시민적 행동을 고백하고 있다. 화자는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 ‘땅 주인’, ‘구청 직원’, ‘동회 직원’과 같이 가진 자, 힘 있는 자에게는 반항하지 못하면서, ‘이발쟁이’, ‘야경꾼’과 같이 가지지 못한 자, 힘없는 자에게는 사소한 일로 흥분하는 자신의 모습을 돌아본다. 커다란 부정과 불의에는 대항하지 못하면서 사소한 것에만 흥분하고 분개하는 자신의 모습을 반성함으로써 화자는 자기모멸의 감정에 빠지게 된다. 또한 절정 위에서 조금쯤 옆으로 비켜서 있는 자신의 방관자적 자세를 확인하고 보잘것없는 자신의 존재를 비판하고 반성하게 된다.
 시인은 이 시를 통해 아무 죄 없는 소설가를 구속하고 자유를 억압하는 정치 권력에 정면에서 대적하지 못하고 방관하는 지식인의 무능과 허위의식을 폭로하며 진지한 자기반성을 하고 있는 것이다.

 - 천재교육, 해법문학 현대시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자조적 표현을 통한 효과(천재교육, 해법문학)

 이 작품은 부끄러운 소시민의 삶을 살아가는 화자의 자조적인 태도가 시 전체를 지배하고 있다. 특히 7연에서는 자신의 왜소한 모습을 미비한 자연물에 대조시키는 극단적인 자기 비하를 보이고 있는데, 이러한 자조적인 표현은 독자들에게 화자를 책망하기에 앞서 오히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2. 표현상의 특징(천재교육, 해법문학)

- 비속어의 사용 : ‘설렁탕집 돼지 같은 주인 년’ - 화자 자신의 속된 모습을 언어 표현으로 노출함.
- 독백적 어조 : 시 전체에서 나타남 – 자기 고백과 반성의 진정성과 진솔함을 드러냄.
- 일상적 시어 사용 : ‘50원짜리 갈비, 20원, 스펀지, 거즈, 개 울음소리, 애놈의 투정, 은행나뭇잎’ - 일상의 실제적 삶을 사실적, 구체적으로 보여 줌.


3. 대조적 상황에서 드러나는 화자의 태도(천재교육, 해법 문학)

 이 시에서는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과 사소한 일의 대조가 드러난다. 즉, ‘언론의 자유 요구, 월남 파병 반대, 불합리한 상황과 힘 있는 권력에 대한 저항’이라는 중요하고 의미있는 일에 대조하여 ‘힘없는 자인 설렁탕집 주인, 야경꾼, 이발쟁이에게 분노하고 스펀지 만들기와 거즈 접는 일’과 같은 사소한 일이 대조적으로 표현된다. 이는 부조리한 현실과 힘 있는 궈너력에는 반항하지 못하고 사소한 일과 힘없는 자에게만 분개하는 소시민적 모습을 반성하고 자책하는 화자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 작가 소개

김수영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 엮어 읽기

․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 쉽게 씌어진 시 - 이육사

 

김수영 - 어느 날 고궁을 나오면서.pd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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