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만기(萬基) 치과 의원에는 원장인 서만기 씨와 간호원 홍인숙 양 외에도 거의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는 사람 둘이 있다. 그 한 사람은 비분강개파 채익준 씨요, 다른 한 사람은 실의의 인간 천봉우 씨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서만기 원장의 중학교 동창생이다. 그들은 도리어 원장보다도 먼저 나와서 대합실에 자리 잡고 신문을 읽고 있는 날도 있었다. 더구나 채익준은 간호원보다도 일찍 나오는 수가 많았다. 큼직한 미제 자물쇠가 잠겨 있는 출입문 앞에 버티고 섰다가 간호원이 나타날 말이면,
“미스 홍, 오늘은 나에게 졌구려.” / 익준은 반가운 낯으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런 날은 인숙이가 아침 청소를 하는 데 한결 편했다. 한사코 말려도 익준은 굳이 양복저고리를 벗어부치고 소매까지 걷고 나서서 거들어 주기 때문이다. 대합실과 진찰실을 합쳐도 겨우 다섯 평이 될까 말까 한 방이지만 익준은 손수 마룻바닥에 물을 뿌리고 방 구석이나 테이블 밑까지도 말끔히 쓸어 내는 것이다. 무슨 일에나 몸을 사리지 않고 앞장을 서는 그의 성품은 이런 데도 잘 나타났다. 청소가 끝나면 익준은 작달막한 키에 가로 퍼진 그 둥실한 몸집을 대합실 의자에 내던지듯 털썩 걸터앉아서 신문을 본다. 그러노라면 원장과 천봉우가 대개 전후해서 나타나는 것이다.
오늘도 간호원을 도와 실내 청소를 마치고 난 익준은 대합실에 자리 잡고 신문을 펴들었다. 아마도 세상에 그처럼 충실한 신문 독자는 없을 것이다. 이 병원에서 구독하고 있는 두 종류의 신문을 그는 한 시간 이상이나 시간을 소비해 가며, 첫줄 처음부터 끝줄 끝 자까지 기사고 광고고 할 것 없이 하나도 빼지 않고 죄다 읽어 버리는 것이다. 익준은 또한 그저 신문을 읽는 데만 그치지 않는다. 거기 보도된 기사 내용에 대해서 자기류의 엄격한 비판을 가하는 것을 잊지 않는 것이다. 지금도 익준은 신문을 보다 말고 앞에 놓여 있는 소형 탁자를 주먹으로 내리치며 격분하여 고함을 질렀다. / “천하에 이런 죽일 놈들이 있어!” <중략>
“그러지 않아두 집에서 신문을 보구 자네가 또 몹시 격분했으리라구 짐작했네.”
그러면서 담배 케이스를 열고 먼저 익준에게 권하였다. 권하는 대로 익준은 손을 내밀어서 한 대 뽑아 들었다.
“이게 나 혼자만 격분할 일인가? 그럼 자네나 딴사람들은 심상하다 그 말인가?”
“아니지, 남달리 정의감과 의분이 강한 자네니까 남보다 몇 배 격분하지 않을 수 없으리란 말일세. 그렇지만 혼자 흥분해서 펄펄 뛰면 뭘 하나!”
만기도 탄식하듯 하였다. 둘은 담배에 불을 붙여 물었다.
“정의감도 강약이 문젠가, 이 사람아. 그래 이런 극악무도한 놈들을 보구 가만 하고 있을 수 있겠나. 가슴속에서 불덩이가 치미는데 잠자쿠 있을 수 있느냐 말야!”
익준은 만기가 함께 흥분해 주지 않는 것이 불만인 모양이었다. 그때 마침 봉우가 기척도 없이 슬그머니 문 안에 들어섰다. 언제나 다름없이 수면 부족이 느껴지는 떠름한 얼굴이다.
그는 먼저 인숙이 쪽을 바라보고 다음에 만기와 익준을 번갈아 보면서 멋쩍게 씩 하고 웃었다. 그러고는 거의 자기 자리도 정해진 대합실 소파의 맨 구석 자리에 조심히 걸터앉았다. 그러자 자기의 흥분을 같이 나눠 줄 사람이 나타났다는 듯이 익준은 탁자 위에 놓았던 신문을 집어서 봉우 눈앞에 바로 가져다 댔다.
“봉우, 이거 봐. 글쎄 이런 능지처참할 놈들이 있느냐 말야!”
익준은 핏대를 세우며 다시 흥분하기 시작했다. 봉우는 선잠을 깬 사람처럼 어릿어릿한 표정으로 익준을 쳐다보았다. 희미하게 웃었다. 그리고 흥미 없는 신문을 받아들었다.
“뭐 말야?”
“뭐 말이야가 뭐야, 이런 빙충이 같은 녀석. 아 그래 자네 눈깔엔 이게 안 뵌단 말야?”
화가 동해서 견딜 수 없다는 듯이 익준은 손가락 끝으로 톱기사의 주먹 같은 활자를 찔렀다. 봉우는 강요당하듯이 제목을 입속말로 읽었다. 내용은 마지못해 두어 줄 읽다가 말았다. 이어 딴 제목들을 대강 훑어보고 나서 봉우는 도로 신문을 집어서 탁자 위에 얹었다. 그러더니 만기와 익준을 번갈아 쳐다보고 웃으려다가 말았다. 익준은 더 참을 수 없다는 듯이 고함을 질렀다.
“왜 아무 말이 없는 거야?”
봉우는 동정을 구하듯 하는 눈동자로 만기와 익준을 번갈아 보았다.
“임마, 그래 넌 아무렇지두 않단 말야? 눈뜬 채 코를 베어 먹히구두 심상하단 말야?”
“누가 코를 베어 먹혔대? 난 잘 안 봤어!”
봉우는 얼른 신문을 다시 집어 들었다. 그러자 익준은 그 신문지를 홱 낚아채서는 탁자 위에다 힘껏 동댕이를 치고 나서,
“이런 쓸개 빠진 녀석 ……. 에잇, 난 다신 자네들과 얘기 않네!”
우뚤해 가지고 홱 돌아서더니 댓바람에 문을 차고 나가 버리었다.
익준이 다시는 안 올 듯이 밖으로 사라지자 한동안 어리둥절하고 있던 봉우는 다시 신문을 집어 들고 기사 제목을 대강 더듬어 보기 시작하였다. 봉우는 언제나 그랬다. 게슴츠레한 낯으로 대합실에 나타나면 익준이가 한 자 빼지 않고 샅샅이 읽고 놓아 둔 신문을 펴들고 건성건성 제목만 되는 대로 주워 읽고 마는 것이다. 그러고 나서는 진찰을 받으러 온 환자처럼 말없이 우두커니 앉아서 시간을 보내는 것이다. 그의 시선은 자주 간호원에게 간다. 그때만은 그의 눈도 노상 황홀하게 빛난다. 그러다가 간호원과 시선이 마주치면 봉우는 당황한 표정으로 외면해 버리는 것이다. 빼빼 말라붙은 몸집에 키만 멀쑥하게 큰 그는 언제나 말이 적고 그림자처럼 조용하다. 어딘가 방금 자다 깬 사람모양 정신이 들어 보이지 않는 표정을 하고 있다. 하기는 그는 대합실 구석 자리에 앉은 채 곧잘 낮잠을 즐긴다. 봉우의 낮잠 자는 모양이란 아주 신기하다.
소파에 앉은 대로 허리와 목을 꼿꼿이 펴고 깍지 낀 두 손을 얌전히 무릎 위에 얹고는 눈을 감고 있다. 그러고 자는 것이다.
봉우 처에게 전화를 걸었더니 딴 사람이 전화를 받았지만 이내 만날 수 있게 연락을 해 주었다. 지정한 다방으로 가 보니 봉우 처가 기다리고 있었다. 앞장서 들어서는 만기를 보고 반색을 하다가, 뒤따라 들어오는 자기 남편을 보더니 여자는 놀라는 눈치였다. 마주 앉기가 바쁘게 만기는 용건부터 얘기했다. 익준이와 봉우와 자기는 중학 시절 이래 막역한 친구임을 말하고 나서 익준이네 비참한 가정 형편을 들려 주었다. 그러고는 장례 비용을 희사하거나 빌려 주기를 간청한 것이다. <중략>
“오만 환 정도라면 당장 되겠어요? 물론 현금이 좋으시겠죠.”
대답도 듣지 않고 카운터 뒤로 사라지더니 좀 뒤에 현찰을 신문지에 꾸려 가지고 돌아왔다. 만기가 치하를 하고 일어서려니까,
“이 돈 그냥 드리는 건 아니에요.”
여자가 그래서,
“알겠습니다. 이 자리에서 기일 약속은 할 수 없지만 반드시 책임지고 갚아 드리겠습니다.”
그랬더니 봉우 처는 문간까지 따라 나오며 애교 띤 농담조로,
“고지식한 양반, 그렇다면 원금만 가지고는 안 되겠어요. 적당한 이자까지 듬뿍. 아시겠어요?”
거의 아양에 가까운 교태였다. 봉우의 눈치를 곁눈질로 살피며 당황히 줄달음을 치듯 나오는 만기의 등 뒤에다 대고,
“일간 다시 들러 주세요. 선생님 일루 꼭 의논할 일이 있으니까요!”
여자는 거리낌 없이 소리를 지르는 것이었다.
하여튼 그 돈으로 간소하나마 격식을 갖추어 장례식을 무사히 치를 수 있은 것은 다행한 일이었다. 관을 사 오고, 광목을 떠다 아이들에게 상복을 지어 입히고, 고무신도 사다 신겼다. 의논해서 화장을 않고 망우리에 무덤을 남기기로 했다. 장지로 향하는 차 안에서 익준이가 없는 것을 만기가 탄식했더니,
“살아서두 남편 구실 못한 위인, 죽은 댐에야 있으나마나지!”
익준의 장모는 개의치 않았다. 그러나 좀 늦게나마 남편 구실을 못한 익준이 그날로 집에 돌아오기는 한 것이다. 거의 황혼 무렵이 되어서 산에서 돌아온 일행이 익준네 집 골목 어귀에서 차를 내렸을 때였다. 저쪽에서 머리에 흰 붕대를 감고 이리로 걸어오는 허줄한 사내가 있었다. 아들이 먼저 알아차리고,
“아, 아버지다!” <중략>
“어이구, 차라리 쓸모없는 저따위나 잡아가지 않구 염라대왕두 망발이시지!”
익준의 장모는 사위를 바라보면서 그렇게 중얼대고 인제야 눈물을 질금거리었다. 그래도 아이들이 제일 반가워했다. 일곱 살 먹은 끝의 놈은,
“아부지!” / 하고 부르며 쫓아가서 매달렸다.
“아부지, 나, 새 옷 입구, 자동차 타구, 산에 갔다 왔다!”
어린것이 자랑스레 상복 자락을 쳐들어 보여도 익준은 장승처럼 선 채 움직일 줄을 몰랐다.
■ 전체 줄거리
치과 의사인 서만기의 병원에는 중학 동창인 채익준과 천봉우가 매일 찾아와 종일토록 한담으로 소일한다. 이들은 소위 ‘잉여 인간’들이다. 익준은 사회의 부조리를 담은 신문 기사를 보면 비분강개하여 어쩔 줄 모르는 인물이고, 봉우는 매사에 무기력한 인간으로 간호사 홍인숙을 짝사랑하고 있다. 봉우의 아내는 병원 건물의 소유주로 주위의 평판이 좋지 않다. 봉우와는 필요에 의해 결혼 생활을 유지할 뿐 애정이 없다. 그녀는 가난한 치과 의사 만기를 돈으로 유혹하려 하지만 만기는 점잖게 거절한다. 만기는 일주일 이내에 병원과 시설 일체를 내어 달라는 봉우 아내의 편지를 받는다. 만기는 병원을 잃고 난 다음 어떻게 살아갈까 고민을 하고, 평소 만기를 사모하던 간호사 미스 홍은 자신이 모아둔 돈을 주려 하지만 만기는 이를 거절한다. 어느날, 익준의 아이가 찾아와 익준의 아내가 죽었다는 말을 전한다. 만기는 봉우 아내에게 장례 비용을 융통하여 장례식을 치른다. 익준 아내의 장례식을 치르고 난 후, 익준은 머리에 상처를 입고 돌아온다. 그는 상복을 입은 아들을 보고 장승처럼 선 채 움직일줄 모른다.
■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소설, 전후소설
• 성격 : 사실적, 현실 고발적
• 배경 : 시간적 - 6 · 25 전후 사회의 현실,
공간적 - 서만기 치과 병원과 그 주변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제재 : 현실에 적응하지 못하는 인물들의 불구적 삶
• 주제 : 전후 사회의 인간 소외와 그 고발
• 특징 :
① 손창섭의 작품 중 이례적으로 긍정적 인물이 등장하여 전후 상황을 극복할 가능성을 제시함
② 휴머니즘적 경향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전후 상황에서 존재할 수 있는 여러 인물 유형을 제시하고, 그를 통해 무기력하고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인간적인 모습을 지켜 나갈 수 있는 가능성을 모색하고 있다. 손창섭의 대부분의 작품이 부정적이고 불구적인 인물을 등장시킨 점에 비해, 이 작품에서는 서만기라고 하는 긍정적인 인물을 부각하여 긍정의 미학을 개척하고 있다. 이러한 인간형을 통해 병든 현실과 인간에 대한 회의주의로부터 벗어날 가능성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글은 1958년 『사상계』를 통해 발표된 단편 소설로, 전후 문학의 대표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전후의 치열한 상황에서 무기력하게 살아가는 인물을 제시하고, 그들을 통해 ‘잉여 인간’을 만들어 내는 사회를 비판하고 있다. 하지만 작가가 이전 작품에서 비정상적이고 불구적인 인물들을 등장시켜 현실의 부조리함을 고발했다면, 이 작품에서는 서만기라는 긍정적인 인물을 등장시키면서 인간성 회복의 가능성을 함께 드러내고 있다. 따라서 이 글은 전후의 암담하고 황폐한 현실에서, 그 극복 가능성을 제시했다는 데 의의를 갖고 있는 작품이다.
- 꿈을 담는 틀, 꿈틀 문학 자습서 현대산문 참고
■ 심화 내용 연구(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1. ‘잉여 인간’의 의미
‘잉여 인간’이란 ‘남아 돌아가는 인간’이라는 뜻으로, 6 · 25 전쟁의 후유증이 산재해 있는 비정상적인 사회로부터 추방당하여 불구적인 삶을 살아가는 인간 유형을 의미한다.
여기에 나오는 세 인물은 짙은 우수를 간직한 채 전후 상황에서 존재할 수 있는 잉여 인간들이다. 서만기의 합리성, 정직성, 온건함, 견인주의적 자세 등의 덕목에 천봉우와 채익준의 무력증, 무책임성, 비사회적 생각과 태도 등을 대비함으로써 이들의 병적이며 부정적인 인물 유형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나 있다. 작가는 이러한 인물들의 어두운 면을 주인공 서만기를 통해 따뜻하게 감싸 안음으로써 전쟁이 가져다준 불구성과 황폐함으로부터 탈피하여 건전한 사회를 지향하고자 하는 의도를 보여 준다.
2. 채익준과 천봉우의 성격
• 채익준: 두 종류의 신문을 꼼꼼하게 모두 읽고 부조리한 현실에 분노하며 비분강개한 모습을 보이지만 생산적 대안을 도출하지는 못한다. 한마디로 옳은 소리를 시끄럽게 떠들고만 있는 인물이다.
• 천봉우: 신문의 기사 제목을 대강 더듬어 읽는 것으로 보아 세상사에는 관심이 없고 의욕을 상실한 사람으로, 비현실적 몽환 속에서 살아가는 인간형이다.
3. 이 소설의 시점을 바꿀 경우, 달라지는 인물에 대한 묘사
• 3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꿀 경우: 서술자는 객관적인 태도로 인물의 행동이나 외부적 사실을 묘사하여 보여 줄 뿐, 인물의 사상, 감정, 심리 등을 직접 표현하지 않는다.
• ‘홍인숙’을 서술자로 하여 1인칭 관찰자 시점으로 바꿀 경우: 1인칭 서술자 ‘나’(홍인숙)의 눈에 비친 외부 세계를 다루기 때문에 인물의 성격이나 심리에 개입할 수 없으며, 해설이나 평가 없이 인물을 있는 그대로 전달하게 된다.
4. ‘병원 대합실’의 공간적 의미
• 서만기: 생계를 유지하는 장소이자 사회에 적응하지 못하는 친구들을 배려하는 장소
• 천봉우: 비현실적인 사람을 꿈꾸는 장소이자 의식과 잠 사이의 경계적 장소
• 채익준: 사회 비판의 장소이자 가정에도 직장에도 속하지 못한 그가 머무르는 경계적 장소
5. 천봉우의 애정 형태 - 사회와 단절된 박제된 사랑
천봉우의 애정은 상대에게 가까이 다가가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상대의 존재를 무시하지도 못하는 일정한 거리에서의 자기 헤맴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는 보이지 않는 벽에 갇혀서 허상에 매달려 있는 형상이다. 이러한 그의 사랑은 정신적 상처에 뿌리를 박고 있다. 그는 피란 나갈 기회를 놓치고 적 치하 3개월 동안에 서울에 숨어 빨갱이와 공습에 대한 공포감 때문에 불안한 긴장 상태로 지내던 것이 고질화되고 전란 통에 양친과 형제까지 잃게 되면서 커다란 정신적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그의 행동이 일면 수긍되기도 하지만 그것은 봉우의 성격 형성의 한 원인이 될 뿐 봉우의 생활 방식이 합리화되는 것은 아니다.
6. 손창섭의 소설의 특이성
• 결말(해결)의 부재: 소설 속의 모든 사태를 끝내 해결되지 않는 것으로 마무리하는 결말(해결)의 부재는 손창섭 문학의 기본항이다. 이는 결말을 중시하는 종래의 모든 소설에 대한 도전이다.
• 모든 인물 명칭의 한자 표기: 소설에서 제일 중요한 작중 인물의 표기 방법을 낯설게 했다는 것은 사건 또는 스토리를 거의 무시하고, 이와는 무관한 인물 자체만이 문제되는 그의 소설 세계와 대응된다. 묘사가 거의 없음도 이에 관련된다.
• ‘것이다(것이었다)’라는 특이한 종지형 서술: 소설의 인물들은 주변의 모든 것들과 어떤 관계도 성립되어 있지 않다. 손창섭은 전쟁이라든가, 그에 따른 1950년대 현실의 황폐상 등 객관적 현실의 탐구에는 전혀 관심을 두지 않았다.
• 등장인물 중 한 명은 어김없이 육체적 · 정신적 불구자이며, 다른 인물들은 현실에 적응 못하는 정신적 불구자: 모두가 아무런 의미도 찾을 수 없는 삶의 중압감에 짓눌려 살아 있음을 다만 포기하지 않을 뿐, 살려는 의욕을 완전 상실한 인물들의 세계이다.
7. ‘잉여 인간’에 나타난 새로운 인간형 개척
작가는 ‘잉여인간’을 통해 ‘비오는 날’ 등에서 보여 주었던 암울하고 음산한 분위기에서 벗어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하기 시작한다. 전쟁이라는 극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자기 자신을 지키며 꿋꿋하게 살아가는 서만기를 통해 이제 전쟁이 가져다 준 불구성과 황폐함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가능성이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8. 작가가 보여 주고자 한 잉여 인간의 모습
치과 의사인 서만기는 매력적인 외모만큼이나 가슴이 따뜻한 인간형이다. 그러나 그의 친구인 천봉우와 채익준은 서만기와는 다르다. 천봉우는 늘 실의에 빠져 있다. 유일한 낙은 매일 방문하는 서만기의 치과 병원에 근무하는 간호사 얼굴만 온종일 바라보는 것이다. 채익준은 신문에 실린 사회 문제에 대해 몹시 흥분하는 ‘비분강개형’ 인간이다. 부조리한 현실에 쉽게 흥분하지만 늘 말뿐이다. 얼핏 보면, 작가는 이 둘을 ‘잉여 인간’으로 보고 있는 듯한데 잉여 인간이 아닌 서만기는 왜 등장하는 것일까? 서만기는 많은 사람의 사랑을 받지만 서만기는 행복하지 않다.
이들이 사는 시대는 6 · 25 전쟁이 끝난 지 얼마 지나지 않은 때였다. 당시에는 무수히 많은 잉여 인간들이 존재했다. 그들 중 일부는 충분한 능력이 있는데도 적절한 환경이 갖춰지지 않아서 무기력하게 살아갈 수밖에 없었고 소수의 서만기형 인간들이 그 역할을 떠안아야 했다. 하지만, 그들은 무거운 책임감에 지쳤고, 수많은 ‘잉여 인간’은 실의에 빠져 ‘산송장’처럼 살아가야 했다.
■ 작가 소개
■ 엮어 읽기
- 안수길, ‘제3인간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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