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감나무쯤 되랴,
서러운 노을 빛으로 익어 가는
내 마음 사랑의 열매가 달린 나무는!
이것이 제대로 벋을 데는 저승밖에 없는 것 같고
그것도 내 생각하던 사람의 등 뒤로 벋어 가서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나 마지막으로 휘드려질까 본데,
그러나 그 사람이
그 사람의 안마당에 심고 싶던
느껴운 열매가 될는지 몰라!
새로 말하면 그 열매 빛깔이
전생의 내 전 설움이요 전 소망인 것을
알아 내기는 알아 낼는지 몰라!
아니,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도 몰라, 그것도 몰라!
2. 핵심 정리
• 갈래 : 서정시, 자유시
• 성격 : 감각적, 애상적, 낭만적, 영탄적
• 주제 : 임에 대한 사무치는 사랑의 한과 그리움
• 구성 :
1연: 서러운 노을빛 감처럼 익은, 임에 대한 사랑
2연: 감나무 가지로 벋어 가 저승에서라도 임에게 전하고픈 사랑
3연: 자신의 사랑을 임이 알아주기나 할지 모르는 데서 느끼는 서러움
• 특징 :
① 부재하는 대상에 대한 그리움이 나타남.
② 화자의 내면을 효과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어순을 도치함.
③ 시구의 반복을 통해 의미를 강조하고 리듬감을 형성함.
④ 시각적 이미지를 활용하여 화자의 정서를 표현함.
⑤ 자연물을 매개로 화자의 정서를 심화함.
3. 작품 해설
이 작품은 제대로 전하지 못했던 자신의 서러운 사랑을 임이 계신 저승에서라도 감나무 가지처럼 벋어 가서 전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을 드러낸 시이다. 그러나 화자는 마음속에 품은 서러운 빛깔의 사랑의 열매를 임이 보더라도 그것이 자신의 모든 서러움이자 소망이 응축된 것임을 임이 알아주리라는 확신조차 가질 수 없기에 또 서러움을 느끼고 있다. 자연물을 활용한 시각적 이미지를 통해 정서를 표현한 점, 영탄적 진술을 반복하며 애상감을 강조한 점 등이 특징적인 작품이다.
- 수능특강 해설 참고
4. 심화 내용 연구
1. 박재삼의 시 세계와 ‘한(恨)’
박재삼은 슬픔이라는 삶의 근원적인 정서에 한국적 정한의 세계를 절제된 가락으로 실어, 그 속에서 삶의 예지와 감동을 전해 준 시인이다. 그의 시는 1950년대의 주류이던 모더니즘 시의 관념적이고 이국적인 정취와는 달리, 한국어에 대한 친화력과 재래적인 정서에 대한 강한 애착을 보여 주어, 전후 전통적인 서정시의 한 절정을 이룬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그의 시에서 볼 수 있는, 독특한 구어체의 어조와 잘 조율된 율격은, 그의 시의 아름다움과 자연스러움을 보장하는 장치라고 할 수 있다.
‘한(恨)’은 전통적 주제인 이별의 정한, 승화된 체념을 노래한 작품으로, 상투성에 떨어지기 쉬운 주제를 감나무라는 상징적 매개물을 통하여 형상화함으로써 전통적 서정시의 새로운 가능성을 개척한 작품으로 평가 받는다.
- 권영민, ‘한국 현대 문학 대사전’ / 이응백 외, ‘국어 국문학 자료 사전’
2. 내 사랑은 서러운 노을빛, 감나무를 닮았네
문명이라는 것이 인간의 영역이라면 숲으로 상징되는 자연은 신의 영역이다. 우리는 숲에서 신을 느낀다. 가을은, 봄은, 계절은 도시로 오지 않고 숲으로 스미지 않던가. 숲에 들 때마다 생각나는 이름이 있다. 박재삼(朴在森). '박달나무 숲에 살다', 나는 그 이름을 이렇게 마음속으로 번역해 부르곤 했다. 그 이름이 생각날 때마다 숲에서 걸어 나오는 한 인간을 상상하곤 했다. 그렇다고 산신령 같은 이미지로서는 아니다. 그저 순한 웃음기를 온몸에 입힌, 어눌한, 그래서 간절히 순리에 입각한 한 시인. "천 년 전에 하던 장난을/ 바람은 아직도 하고 있다./ 소나무 가지에 쉴 새 없이 와서는/ 간지러움을 주고 있는 걸 보아라/ 아직도 천 년 전의 되풀이다"(〈천년의 바람〉 중)라고 노래하는 걸 보면 역시 숲의 시민, 바람의 이웃임에 분명한 시인.
사랑을 나무에 비유하면 어떤 나무가 될까? 박재삼 시인에게 사랑의 비유는 감나무다. 허나 그 감나무 여염하지 않다. '제대로 벋을 데가 저승밖에 없는' 나무다. 이승에서는 다 못할 사랑 아닌가. 게다가 그 사람의 등 뒤로나 벋어나가는 혼자의 사랑이다. 그 사람의 머리 위에서 마지막으로 '휘드려지는', 그렇게 함으로써 그 사람의 빛이 되는 사랑은 '한(恨)'에 다름 아니다. 한 치의 원망도 절망도 없는, 마음의 순리를 따라가서는 마침내 '느껴운 열매'가 되는 사랑이야말로 우리를 '성실'히 이승을 살게 하는 근원적 동력이 아니고 무엇이랴.
그러한 깊은 눈으로 얻어낸, 누구나 할 것 없이 사랑은 아픔일지 모른다는, 질문이며 동시에 독백인, "그 사람도 이 세상을/ 설움으로 살았던지 어쨌던지/ 그것을 몰라, 그것을 몰라!"라는, 리듬을 보라. '그것을 몰라,'와 '그것을 몰라!' 사이에 흐르는 침묵과, 속울음과, 아득함을, 서편제의 계면조 같은 '한(恨)'을 보라.
실은 감나무는 가장 흔한 우리네 유실수다. 그럼에도 가을 어느 하루 이웃의 마당가에 잎을 떨구며 서 있는 감나무를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우리는 느끼는 바가 있지 않을 수 없다. 그 모습은 인간의 전생애를 보여주고도 남는다. 그래서였던지. 화가 근원(近園 김용준)과 수화(樹話 김환기)가 이어 살았던 집의 이름이 '노시산방(老枾山房)'이요, 박용래의 집도 '홍시(紅枾) 있는 골목'이었다.
"마음도 한자리 못 앉아 있는 마음일 때, / 친구의 서러운 사랑 이야기를/ 가을 햇볕으로나 동무 삼아 따라가면,/ 어느새 등성이에 이르러 눈물나"(〈울음이 타는 가을강〉 중)는 가을이다. '서러운 사랑 이야기'가 골목마다, 오솔길마다, 지붕마다 '지글지글 타는' 가을이고 그 '등성이'에 우리는 지금 서 있다!
- 장석남·시인·한양여대교수, 조선일보. 2008.10.15.
5. 작가 소개
박재삼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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