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의 처 - 이남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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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주요 부분

  사람들은 남편은 뛰어난 인재라고 했다. 능히 천하를 경영할 재주가 있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남편이 죽는지 사는지 아내가 모르고, 아내가 죽는지 사는지 남편이 몰라야만 뛰어난 인재가 되는 거라면 그 뛰어난 인재라는 말은 분명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라는 뜻이리라. 이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이란 성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며, 자식을 낳고, 그 자식에게 보다 좋은 세상을 살도록 해 주는 것, 그것 말고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머니는 죽고 서모는 살아남았다. 난 판단할 수 없다. 어머니는 죽어 잠시 칭송받았는지 모르나 서모는 살아남아 자식들을 키우고 집안을 돌보았다. 지금도 청안에서 윤복이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이다.

  한참 떡을 찌고 있는데 남편이 들어왔다.

  “무슨 일이 있소?”

  “친정엘 가려구요, 길양식으로 백설기를 쪘습니다.”

  “무슨 연고로? 친정에 일이 있는가?”

  “아닙니다.”

  난 여전히 외면했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시 돌아오지 않을지도 몰랐으나 구구하게 변명하고 싶지 않았다. 저녁 밥상을 물려 가려는데 남편이 불렀다.

  “잠시만 앉으오. 내가 할 이야기가 있소.”

  남편은 말 꺼내기가 어려운 듯 잠시 묵묵히 있었다.

  “나는 다시 출유하려 하오. 그러니 당신은 이 집을 정리하고 수래벌 큰 댁에 몸을 의탁해 있으시오. 이미 사촌 큰형님과 상의해 두었소.”

  “집을 판다면…… 아주 안 돌아오십니까?”

  “나도 모르오. 내 뜻이 이곳에 없으니 장담하기 어렵소.”

  “그렇다면 차라리 저와 절연하시지요.”

  “무슨 해괴망측한 소릴 하오? 우리 혼인한 사이인데, 그걸 어찌 쉽게 깨뜨린단 말이오? 사람에겐 신의가 중요한 것이오.”

  “남자들은 저 편리한 대로 신의니 뭐니 하더군요. 우리가 혼인한 것이 약속이니 지켜야 한다고 합시다. 하지만, 어찌 그 약속이 여자 홀로 지켜야 할 것입니까? 당신이 그걸 저버리고 절 돌보지 않으니 제가 약속을 지켜야 할 상대는 어디 있는 겁니까? 전 차라리 팔자를 고쳤으면 합니다.”

  “사대부 집 아녀자가 어찌 입에 담지 못할 소리를 하오. 당신이 인륜을 저버리고 예의, 염치도 모르리라곤 생각지 않소.”

  “인륜? 예의, 염치? 그게 무엇이지요? 하루 종일 무릎이 시도록 웅크리고 앉아 바느질하는 게 인륜입니까? 남편이야 무슨 짓을 하든 서속이라도 꾸어야 조석 봉양을 하고, 그것도 부족해 술친구 대접까지 해야 그게 예의라는 말입니까? 하루에도 열두 번도 더 청소하고 빨래하고 설거지하는 게 염치를 아는 겁니까? 아무리 굶주려도 끽 소리도 못하고 눈이 짓무르도록 바느질을 하고 그러다 아무 쓸모없는 노파가 되어 죽는 게 인륜이라는 거지요? 난 터무니없는 짓 않겠습니다. 분명 하늘이 사람을 내실 때 행복하게 살며 번성하라고 내셨지, 어찌 누구는 밤낮 서럽게 기다리고 굶주리다 자식도 없이 죽어 버리라고 하셨겠는가 말예요.”

  “기다리는 게 부녀의 아름다운 덕이오.”

  “덕요? 난 꼬박 오 년이나 당신을 기다렸지요. 그전엔 굶기를 밥 먹듯 한 것이 몇 해였지요? 우리가 입에 풀칠이라도 할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내 두 팔이 바삐 움직이고 두 눈이 호롱불빛에 짓물렀기 때문이에요. 그런데 전 뭔가요? 앞으로도 뒤로도 어둠뿐이에요. 당신은 여전히 유유자적 더러운 세상을 경멸하며 가슴에 품은 경륜을 뽐낼 뿐이지요. 당신은 친구들과 담화할 때, 학문이란 쓰임이 있어야 하고, 실이 없으면 안 되고, 만물은 이롭도록 운용되어야 한다고 하셨지요. 그런데 당신도 세상에 있는 소이(所以)가 없고 당신을 따르는 한 나 역시 그러해요. 그래요. 당신은 붕새예요. 그러나 난 참새여서 당신의 높은 경지를 따를 수가 없어요. 그렇지만 나는 단 한 가지를 알고 있는데 난 앞으로는 그걸 따라 살 것이에요. 나는 열 살 때 전란을 겪었고 그 와중에서 뼈저리게 느꼈어요. 당신은 무엇 때문에 십 년이나 기약하고 독서했지요? 당신은 대답할 수 없으시지요! 난 말할 수 있어요. 그건 사람이 살고 자식을 낳고 그 자식들을 보다 좋은 세상에서 살게 하려는 때문이라고요. 난 그렇게 하고 싶고, 꼭 할 거예요…….”


■ 핵심 정리

• 갈래 : 현대 소설, 단편 소설, 액자 소설, 패러디 소설, 페미니즘 소설

• 배경 : 17~18세기 후반, 서울 중심의 한반도 전역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성격 : 비판적, 풍자적, 냉소적, 여성 해방론적

• 제재 : 허생의 삶과 가부장적인 모습

• 주제 : 허생의 성공 이면에 가려진 여성의 짓밟힌 삶

• 특징

 ① 허생을 중심으로 서술되고 있는 지배 언술에 대한 공격을 하는 ‘되받아 쓰기’ 기법을 사용함.

 ② 원작과 시간적, 공간적 배경을 동일하게 설정하여 허생의 처의 시점으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냄

 ③ 원작의 끝 이야기를 첫머리로 끌어들여 허생의 처에 관한 이야기의 도입 액자로 삼음.


■ 전체 줄거리

  ‘나(연암)’는 봉원사에서 선인(仙人)의 도를 익히고 있는 윤영이라는 노인을 알게 된다. 그 노인은 허생을 비롯한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며칠 밤에 걸쳐 들려주곤 했다. 17년이 지난 어느 봄날, ‘나’는 비류강에서 우연히 그 노인을 다시 만나게 된다. 떠날 무렵 노인은 “허생의 아내 말씀이오, 참 가엾더군. 그러고도 그 여자는 여전히 굶주렸던 거요.”라고 말한다. 이에 ‘나’는 기록한다.

  ‘나’(허생의 처)는 돌아가신 어머님이 꿈에 되풀이하여 나타나자 마음이 심란하고 불안해진다. 어머니는 ‘나’가 열 살 때 여진족이 침입하자 정조를 지키기 위해 자결하고, ‘나’와 서모는 살아남았던 것이다.

  이튿날 아침, ‘나’는 양식이라도 얻어 올 겸 친정 행을 결심하고 노자를 마련하기 위해 이복동생을 찾아간다. 입덧 중인 동생은 한때 중인에게 시집가는 자신의 처지를 원망하며 선비 가문에 시집가는 ‘나’를 부러워했다고 고백한다. ‘나’는 글만 읽는 가난한 선비를 남편으로 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며 동생에게 찾아온 용건을 말한다. 동생은 허생이 5년 전에 변 부자에게 만 금을 꾸어 가서 십만 금으로 되갚았다는 소문을 전하고 ‘나’는 큰 충격에 휩싸인다. 그리고 5년 만에 집에 돌아온 남편이 그동안 무엇을 했느냐는 ‘나’의 질문에 조그맣게 한 가지를 시험했을 뿐이라고 답했던 일을 회상한다.

  ‘나’는 부족한 노자를 충당하기 위해 큰집을 찾아가나 시할머니에게 꾸지람만 듣게 된다. 전날 허생이 큰집에 와서 자신은 집을 정리할 테니 ‘나’를 맡아 달라고 부탁하면서 곧 집을 떠나겠다고 말했다는 것이다. 시할머니는 허생이 밖으로만 나도는 것, 자식 하나 없는 것 등이 모두 ‘나’의 탓이라며 크게 질책한다. 아주버님은 허생이 보장된 벼슬길마저 피하려 드는 걸 안타까워하며 ‘나’에게 허생을 설득해 달라고 부탁한다. ‘나’는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같은 일을 하는 농사꾼 부부를 보고 부러워하며 서로의 생활을 공유하지 못하는 자신과 남편을 되돌아본다.

  신혼 초부터 허생은 기본적인 생활도 돌보지 않고 독서에만 몰두하였으나 ‘나’는 남편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남편의 높은 뜻을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집에 정착하지 않는 허생의 삶에 대한 책임만을 강요당하고, 허생이 변 부자에게 돈을 꾸어 큰돈을 벌었다는 사실을 비로소 알게 된다. 5년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온 허생은 ‘나’에게 다시 떠날 것이니 큰댁에 의탁하라고 말하지만, ‘나’는 허생과 절연하고 팔자를 고치겠다는 의도를 밝히고, 인륜을 위해 기다리는 부녀자의 미덕을 발휘하도록 허생의 말에 항변한다.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원작인 ‘허생전’을 여성의 시각에서 본 것으로, 허생의 처의 삶을 작품의 중심으로 끌고 와서 페미니즘의 입장에서 패러디한 소설이다. 즉, 원작 ‘허생전’에서 허생의 처는 사회적으로 큰 재목인 남편이 글공부하는 것에 바가지나 긁는 부정적인 인물로 그려진 데 반해, 이 작품에서는 허생의 처가 주인공으로 등장하여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속에서 희생당하며 주변인으로 살고 있는 여성의 입장을 토로함으로써 예전에는 무시되었던, 짓밟히고 굴레 지워진 여성의 삶을 대변하고 실존적인 측면에서 파헤쳐 주체로서의 삶을 촉구하고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연암 박지원의 소설 ‘허생전’을 원작으로 한 패러디 소설로, 원작에서 주변 인물이었던 ‘허생의 처’를 중심인물로 설정하여 아내를 무시하고 가부장적이며 봉건적인 삶을 살았던 허생, 경세제민의 이상만 추구했던 허생을 비판하고 있다. 원작에서는 ‘허생’의 삶을 긍정하고 옹호하면서 허생의 실학적인 면모를 강조한 것에 반해 이 작품은 남성 중심의 가부장적 사회로부터 소외받고 주목받지 못한 여성의 삶을 강조하면서 ‘허생’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강하게 담고 있다. 현실에 순응하고 남편을 따르며 수동적이었던 허생의 처가 비판적인 의식으로 현실을 바라보고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모습을 통해 페미니즘적 소설로서의 면모도 충분히 보여주고 있다.

 - 디딤돌, 현대시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작품의 구성

 액자 밖 이야기 – 도입 : ‘연암’은 ‘운영’이라는 노인에게 ‘허생의 처’ 이야기를 들음

 액자 안 이야기 

 <허생> : 가부장적, 이상적인 삶을 추구, 아내의 희생을 강요

 <허생의 처> : 적극적이고 주체적인 여성, 실질적 경제 활동 중시, 가정의 행복을 추구


2. 이 글에 드러나 여성 주의(페미니즘)

 여성 주이란 여성의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을 말한다. 이 글에 드러난 여성 주의는 <허생전>의 주인공 허생의 숨겨진 이면을 발견하는 새로운 관점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그동안 허생은 당대 사회를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진보적인 인물로 파악되었다. 그런 관점에서 볼 때 허생의 아내가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하는 것은 허생이 세상에 나와 자신이 가진 생각을 실험해 보게 하는 계기에 불과했다. 하지만 여성 주의적 관점은 이런 허생이 아내의 경제적 희생을 강요하는 가부장적이고 보수적인 인물인 점을 볼 수 있게 만들어 주었다. 그의 공부가 가능했던 것은 허생의 처가 오랜 기간 가사 노동과 경제 활동을 떠맡아 왔기에 가능한 것이었다는 것이다.

 - 꿈을 담는 틀, ‘교과서 전 작품 꿈틀 문학 자습서’


3. ‘허생전’과 ‘허생의 처’의 공통점과 차이점

 원작 ‘허생전’과 ‘허생의 처’는 모두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이데올로기의 모순을 드러내고 그로 인해 고통 받는 사람들에 대해 관심을 보이며, 그 해결책을 제시한다는 공통점이 있다.

 ‘허생전’은 ‘허생’이라는 선비를 내세워 조선 후기 사회의 문제점을 신랄하게 풍자하고 비판한 작품이다. 그런데 ‘허생의 처’에서는 바로 그 허생이 비판의 대상이 된다. 허생의 처를 주인공으로 설정하여 그녀의 삶과 가치관을 전면에 내세워 원작과 다른 대상을 비판하는 것이다. ‘허생의 처’에서 비판하는 대상은 남성 중심의 이데올로기이며, 이는 현재에도 여전히 존재하고 있다.


4. ‘허생의 처’의 주체적 여성으로서의 자아

 주변적이고 소외된 여성으로서의 삶을 살던 ‘허생의 처’는 작품 후반부에서 주체적 여성으로 변모하게 된다.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하찮은 물건 취급을 받는 자신이나, 그와 같이 비인간적 대접을 하면서 그것을 당연한 양 생각하고 있는 남편의 삶이 모두 참다운 인간의 삶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리고 자신이 겪은 일련의 사건을 통해 주체적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자아에 눈뜨기 시작한다. 이런 의식의 변화는 자신을 되돌아보는 기회이면서 ‘나’를 찾고자 하는 욕망이다. 욕망이 적극적으로 변화하는 태도는 시대에 대한 도전이며, 가부장적이고 봉건적인 사회와 맞부딪쳐 어려움을 이겨 내려는 적극적인 삶의 자세이다.


■ 작가 소개

이남희 - 한국여성문학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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