패강랭 - 이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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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앞부분의 줄거리] 평양의 한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는 친구인 ‘박’의 편지를 받고 십여 년 만에 평양에 온 ‘현’은 부벽루에서 대동강의 풍경을 보며 감회에 젖는다.


 ― 내 시간이 반이 없어진 것은 자네도 짐작할 걸세. 편안하긴 허이. 그러나 전임으론 나가 주고 시간으로나 다녀 주기를 바라는 눈칠세. 나머지 시간이라야 그리 오래 지탱돼 나갈 학과 같지는 않네. 그것마저 없어지는 날 나도 그때 아주 손을 씻어 버리려 아직은 지싯지싯 붙어 있네.

하는 사연을 읽고는 갑자기 박을 가 만나 주고 싶었다. 만나야만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손이라도 한번 잡아 주고 싶어 전보만 한 장 치고 훌쩍 떠나 내려온 것이다.

 정거장에 나온 박은 수염도 깎은 지 오래어 터부룩한 데다 버릇처럼 자주 찡그려지는 비웃는 웃음은 전에 못 보던 표정이었다. 그 다니는 학교에서만 지싯지싯 붙어 있는 것이 아니라 이 시대 전체에서 긴치 않게 여기는, 지싯지싯 붙어 있는 존재 같았다. 현은 박의 그런 지싯지싯함에서 선뜻 자기를 느끼고 또 자기의 작품들을 느끼고 그만 더 울고 싶게 괴로워졌다.

 한참이나 붙들고 섰던 손목을 놓고, 그들은 우선 대합실로 들어왔다. 할 말은 많은 듯하면서도 지껄여 보고 싶은 말은 골라낼 수가 없었다. 이내 다시 일어나 현은,

 “나 좀 혼자 걸어 보구 싶네.”

하였다. 그래서 박은 저녁에 김을 만나 가지고 대동강가에 있는 동일관(東一館)이란 요정으로 나오기로 하고 현만이 모란봉으로 온 것이다.

 오면서 자동차에서 시가도 가끔 내다보았다. 전에 본 기억이 없는 새 빌딩들이 꽤 많이 늘어섰다. 그중에 한 가지 인상이 깊은 것은 어느 큰 거리 한 뿌다귀에 벽돌 공장도 아닐 테요 감옥도 아닐 터인데 시뻘건 벽돌만으로, 무슨 큰 분묘(墳墓)와 같이 된 건축이 웅크리고 있는 것이다. 현은 운전사에게 물어보니, 경찰서라고 했다.

 또 한 가지 이상하다 생각한 것은, 그림자도 찾을 수 없는 여자들의 머릿수건이다. 운전사에게 물으니 그는 없어진 이유는 말하지 않고,

 “거, 잘 없어졌죠. 인전 평양두 서울과 별루 지지 않습니다.”

하는 매우 자긍하는 말투였다.

 현은 평양 여자들의 머릿수건이 보기 좋았었다. 단순하면서도 흰 호접과 같이 살아 보였고, 장미처럼 자연스런 무게로 한 송이 얹힌 댕기는, 그들의 악센트 명랑한 사투리와 함께 ‘피양내인’들만이 가질 수 있는 독특한 아름다움이었다. 그런 아름다움을 그 고장에 와서도 구경하지 못하는 것은, 평양은 또 한 가지 의미에서 폐허라는 서글픔을 주는 것이었다.

 현은 을밀대(乙密臺)로 올라갈까 하다 비행장을 경계함인 듯, 총에 창을 꽂아 든 병정이 섰는 것을 발견하고는 그냥 강가로 내려오고 말았다. 마침 놀잇배 하나가 빈 채로 내려오는 것을 불렀다. 주암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오자니까 거기는 비행장이 가까워 못 올라가게 한다고 한다. 그럼 노를 젓지는 말고 흐르는 대로 동일관까지 가기로 하고 배를 탔다.

 나뭇잎처럼 물 가는 대로만 떠가는 배는 낙조가 다 꺼져버리고 강물이 어두워서야 동일관에 닿았다.

 이 요릿집은 강물에 내민 바위를 의지하고 지어졌다. 뒷문에 배를 대고 풍악 소리 높은 밤 정자에 오르는 맛은, 비록 마음 어두운 현으로도 적이 흥취 도연해짐*을 아니 느낄 수 없다.

 ‘먹을 줄 모르는 술이나 이번엔 사양치 말고 받아먹자! 박을 위로해 주자! ’ 생각했다.

(중략)

 “그런데 박 군? 어째 평양 와 수건 쓴 걸 볼 수 없나?”

 “건 이 김 부회 의원 영감께 여쭤 볼 문젤세. 이런 경세가(經世家)들이 금령을 내렸다네.”

 “그렇다더군 참! ”

 “누가 아나 빌어먹을 자식들…….”

 “이 자식들아, 너희야말루 빌어먹을 자식들인 게…… 그까짓 수건 쓴 게 보기 좋을 건 뭬며 이 평양부내만 해두 일 년에 그 수건값허구 당기값이 얼만지 알기나 허나들?” 

하고 김이 당당히 허리를 펴고 나앉는다.

 “백만 원이면? 문화 가치를 모르는 자식들…….”

 “그러니까 너희 글 쓰는 녀석들은 세상을 모르구 산단 말이야.”

 “주제넘은 자식…… 조선 여자들이 뭘 남용을 해? 예펜네들 모양 좀 내기루? 예펜넨 좀 고와야지.”

 “돈이 드는걸…….”

 “흥! 그래 집 안에서 죽두룩 일해, 새끼 나 길러, 사내 뒤치개질해…… 그리구 일 년에 당기 한 감 사 매는 게 과하다? 아서라, 사내들 술값, 담뱃값은 얼만지 아나? 생활 개선, 그래 예펜네들 수건값이나 당기값이나 졸여 먹구? 요 푼푼치 못한 경세가들아? 저흰 남용할 것 다 허구…….”

 “망할 자식, 말버릇 좀 고쳐라…… 이 자식아, 술이란 실사회선 얼마나 필요한 건지 아니?”

 “안다. 술만 필요허냐? 고유한 문환 필요치 않구? 돼지 같은 자식들…… 너희가 진줄 알 수 있니…… 허…….”

 “히도오 바가니 수르나 고노야로(사람 깔보지 마라 이 자식)…….”

 “너희 따윈 좀 바가니시데모 이이나(깔봐도 좋다)…….”

 “나니(뭐라구)? ”

 “나닌 다 뭐 말라빠진 거냐? 네 술 좀 먹기루 이 자식, 내 헐 말 못 헐 놈 아니다. 허긴 너헌테나 분풀이다만…….”

하고 현은 트림을 한다.

 “이 사람들 고걸 먹구 벌써 취했네들그려.”

 박이 이쑤시개를 놓고 다시 잔을 현에게 내민다. 김은 잠자코 안주를 집는 체한다.

 오래 해먹어서 손님들 기분에 눈치 빠른 영월은 보이를 부르더니 장구를 가져오게 하였다. 척 장구채를 뽑아 잡고 저쪽 손으로 먼저 장구 전두리를 뚱땅 울려 보더니,

 “어―따 조오쿠나 이십―오―현 탄―야월…….”

하고 불러 내기 시작한다. 현은 물끄러미 영월의 핏줄 일어선 목을 건너다보며 조끼 단추를 끌렀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상머리를 뚜드려 본다. 그러나 자기에겐 가락이 생기지 않는다.

 “에―헹―에― 헤이야 ―하 어― 라 우겨― 라 방아로구나…….”

하고 받는 사람은 김뿐이다. 현은 더욱 가슴속에서만 끓는다. 이런 땐 소리라도 한마디 불러내었으면 얼마나 속이 시원하랴 싶어진다. 기생들도 다른 기생들은 잠잠히 앉아 영월의 입만 쳐다본다.

소리가 끝나자 박은,

 “수고했네.”

하고 영월에게 술 한 잔을 권하더니 가사를 하나 부르라 청한다.

영월은 사양치 않고 밀어 놓았던 장구를 다시 당기어 안더니,

 “일조―오― 나앙군…….”

 불러 낸다. 박은 입을 씻고 씻고 하더니 곡조는 서투르나 그래도 꽤 어울리게 이런 시 한 구를 읊어서 소리를 받는다.

“각하 ― 안 ― 산 ― 진 수궁처…… 임 ― 정― 가고옥 ― 역난 위를…….”

박은 눈물이 글썽해 후 ― 한숨으로 끝을 맺는다.

 자리는 다시 찬비가 지나간 듯 호젓해진다. 김은 보이를 부르더니 유성기를 가져오라 했다. 재즈를 틀어 놓더니 그제야 다른 두 기생은 저희 세상인 듯, 번차 김과 마주 잡고 댄스를 추는 것이다.


■ 핵심 정리

갈래 : 단편소설

배경 : 1930년대, 평양 대동강가

시점 : 전지적 작가시점

주제 : 식민지 시대를 살고 있는 예술가의 비애

등장인물

 - 현 : 옛것에 대한 향수를 버리지 못하고 애착을 가지는 소설가. 돈과 명예는 없으나 자존심을 굽히지 않는 성격이다.

 - 박 : 조선어 교사. 전임에서 강사로 대우가 나빠져 버릴 상황에 처한다. 현실 조건이란 면에서는 ‘현’이 동질감을 느끼는 인물이다. ‘현’과 ‘김’ 사이의 갈등에 중재자 역할을 한다.

 - 김 : 부회 의원을 지내며 출세한 친구. 실질적인 것을 강조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어서 ‘현’과 대결한다.

 - 영월 : 현을 따르던 기생. 세월의 흐름과 시류에 의해 성격이 다소 현실적으로 변화됨을 볼 수 있다.


■ 전체줄거리

 현은 십 여년 만에 찾게 된 평양을 바라보며 부여의 낙화암과 백마강도 그러했듯이 왜 조선의 자연은 이렇듯 슬퍼 보일까 하는 생각을 한다. 현은 평양이 십여 년 만이다. 소설에서 평양 장면을 쓰게 될 때마다, 이번에는 좀 새로 가 보고 써야, 스케치를 해 와야, 하고 벼르기만 했지, 한 번도 그래서 와 보지는 못하였다.

 소설을 위해서 뿐아니라 친구들도 가끔 놀러 오라는 편지가 있었다. 학창 시절의 친구인 박의 놀러 오라는 내용이 아닌 현재의 위태로운 자기 입장을 밝힌 편지를 받고 그를 위로하기 위해 평양에 온 현은, 평양 시내의 변화에 약간의 서글픔을 맛 본다.

 현은 혼자 걸어 보구 싶다면서 모란봉을 찾았다. 차를 타고 지나면서 시가지를 내다보니 예전에 없던 경찰서 건물이 분묘처럼 웅크린 모습을 하고 있는 것이나, 평양 여자들의 흰 머릿 수건이 보이지 않은 모습에서 서글픔 마저 느낀다.

 을밀대라도 올라 볼까 하다 포기하고 내려오다 빈 채로 내려오는 놀잇배를 불러 탄다. 박과 만나기로 한 동일관에 나뭇잎처럼 물 가는 대로 가는 배를 타고 도착하자 박은 또 다른 친구 김과 함께 벌써 자리를 잡고 앉아 있었다.

 부회 의원인 김과 현은 만나자 마자 언쟁을 벌이다가, 문뜩 생각난 듯이 현이 예전에 평양에서 함께 놀았던 기생 영월을 찾게 된다. 아직까지 이곳에 있다는 소식을 듣게 되고 12년 전에 함께 했던 시간들을 떠올린다. 그 때도 현이 서울서 내려와서 이 세 사람이 능라도에 어죽놀이를 차렸다. 한 기생이 특히 현을 따라, 그 때만 해도 문학 청년 기분이던 현은 영월의 손수건에 시를 써 주고 둘이만 부벽루를 배경으로 하고 사진을 다 찍고 하였었다. 이름도 가물거리지만 만나보고 싶은 생각에 그 자리에 당장 와 달라는 요청을 한다.

 방에 들어온 영월은 어느 정도 세월이 묻어난 모습이지만, 현은 알아본다. 그렇지 않아도 평양 거리에 하얀 머리수건이 보이지 않은 것을 섭섭하게 생각했던 현은 하얀 나비같은 수건을 부녀자들이 쓰지 않은 것과 평양 사투리를 잘 쓰지 않은 것으로 김과 현은 문화 가치를 모르는 자식들이라는 말과 글 쓰는 녀석들은 세상을 모르고 산다는 말들을 하며, 시비가 일어나고 이 분위기를 바꾸기 위한 영월의 소리가 시작된다. 유성기까지 합세하면서 재즈가 흘러 나오고, 음악에 맞춰 서양 댄스까지 추며 분위기는 절정에 이른다.

 영월이의, 기생일수록 돈을 모아야 한다는 말을 듣자 친구 박은 자기같은 사람은 돈가진 기생을 얻는 수 밖에 없다며 자신의 현실을 비관한다. 김의 현실성 짙은 발언으로 한바탕 현의 소란이 일어나고 그 자리를 박차고 나온 현은 대동강가를 거닐며 주역의 말을 떠올린다. 이상견빙지.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얼음이 올 것을 각오하라는... 현은 술이 확 깨인 것을 느끼며 담배를 피우려 하지만 성냥이 없었다. 저고리 섶을 여미지만 찬 기운은 현의 품속에서 사무치고, 밤 강물은 시체와 같이 차고 고요하기만 했다.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조선이 일제의 대륙 침략을 위한 병참 기지로 전락하고, 조선어에 대한 교육과 조선어를 통한 저작 활동마저 위축되어 가던 일제 강점기 말의 암울한 현실과 지식인의 고뇌를 다룬 소설이다. 이태준은 실속을 차리기 위한 방향 전환을 강조하는 부회 의원 ‘김’처럼 일제의 정책에 동조하는 이들과, 조선어 교육 위축으로 설 자리를 잃어 가는 교사 ‘박’, 민족의 현실을 비애에 젖어 바라보는 작가 ‘현’ 같은 이들을 대비하여 당시의 사회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이 작품을 통해 “이런 말과 이런 글자로 글을 쓰는 우리의 어두워지는 심사를 어설프게나마 나타내 보고 싶었던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던 이태준은 본모습을 잃고 폐허가 되어 버린 평양의 풍경과, 작중 인물 ‘현’이 읊조리는 ‘이상견빙지’라는 말을 통해, 조선 전체가 처한 위기 상황을 암시하려 한 것이라 볼 수 있다.

- EBS 수능완성 해설 참고


■ 작품 해설 2

 1938년 《삼천리 문학》에 발표된 작품으로, ‘현’이라는 인물을 통해 사라져 가는 풍속에 대한 안타까움과 시대적 흐름에서 소외된 자의 아픔을 그리고 있다. 작품 서두에서 작가는 배경을 통해 서술자의 쓸쓸한 마음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근대화되어 가는 평양을 둘러보면서 평양 또한 서울과 마찬가지로 폐허가 되었다는 판단에서 비롯된다. 평양을 방문한 ‘현’은 예전 평양 여인들에게서 보았던 머릿수건이 사라진 것에 매우 안타까움을 느끼고, ‘김’과 같은 인물들이 금지령을 내려 사라졌다는 것을 알고는 분노한다. 돈과 권력과 같은 물질적 가치를 앞세우는 ‘김’과 정신적 ․ 문화적인 가치를 강조하는 ‘현’ 사이의 갈등은 작가가 그리려고 하는 주제의식이며, 사라져 가는 조선의 풍속에 대한 안타까움을 증폭시키는 역할을 한다.

 - 디딤돌, 현대소설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애상감과 비애

 이태준 소설의 특징은 소외된 자의 설움을 잔잔하게 그린다는 데 있다. 잔잔한 페이소스(애상감)가 드리워지면서 생활의 애환이 드러나는 것이다. 이 작품에서도 ‘현’이라는 주인공이 오랜만에 평양을 찾아와, 거기서 삶의 비애를 느낀다는 줄거리를 통해 그러한 일면이 드러나고 있다. 작품의 서두에서 주인공 ‘현’은 평양 대동강 부근의 경관을 바라보며 ‘유구한 맛’을 느끼게 하지만 서글픈 풍경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서글픈 풍경이라는 ‘현’의 감상에는 상실의 아픔이 느껴진다. ‘현’의 정체성은 분명히 과거의 삶에서 형성되었으나, 그 과거의 삶이 현재는 너무나 미력하다. 머릿수건이 사라지고 기생이 퇴조하는 것을 가슴 아프게 생각한 ‘현’의 내면은 옛것에 대한 아련한 향수에 젖어 있음을 말하는 것이고, 그러한 옛것의 격조를 퇴색케 하는 시대적 흐름에 그는 슬픔을 느낄 수밖에 없는 것이다.


2. ‘이상견빙지’의 상징적 의미

 ‘김’과 다툰 후 강변을 거닐면서 ‘현’은 ‘주역’에 나오는 ‘이상견빙지’란 글귀를 문득 떠올리는데, 풀이하면 ‘서리를 밟거든 그 뒤에 올 얼음을 각오하라’는 말이다. 지금의 상황이 서리라면 앞으로 서리보다 더한 얼음의 참담함이 온다는 것이다. 그 말을 생각하는 ‘현’의 가슴은 더 짙은 비애감에 잠긴다. 대동강 물이 언 것처럼 그의 마음과 세상이 얼어가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이상견빙지’는 ‘현’의 비애감만이 아니라 당시 조선의 현실을 은유적으로 표현하는 상징성을 지닌다고 볼 수 있다.


■ 작가 소개

이태준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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