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5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 기출 문학 작품
■ 본문
주요 부분
나는 어디까지든지 내 방이 ─ 집이 아니다. 집은 없다. ─ 마음에 들었다. 방 안의 기온은 내 체온을 위하여 쾌적하였고, 방 안의 침침한 정도가 또한 내 안력을 위하여 쾌적하였다. 나는 내 방 이상의 서늘한 방도, 또 따뜻한 방도 희망하지는 않았다. 이 이상으로 밝거나 이 이상으로 아늑한 방은 원하지 않았다. 내 방은 나 하나를 위하여 요만한 정도를 꾸준히 지키는 것 같아 늘 내 방에 감사하였고 나는 또 이런 방을 위하여 이 세상에 태어난 것만 같아서 즐거웠다.
그러나 이것은 행복이라든가 불행이라든가 하는 것을 계산하는 것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나는 내가 행복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고, 그렇다고 불행하다고도 생각할 필요가 없었다. 그냥 그날그날을 그저 까닭 없이 펀둥펀둥 게으르고만 있으면 만사는 그만이었던 것이다.
내 몸과 마음에 옷처럼 잘 맞는 방 속에서 뒹굴면서, 축 처져 있는 것은 행복이니 불행이니 하는 그런 세속적인 계산을 떠난, 가장 편리하고 안일한, 말하자면 절대적인 상태인 것이다. 나는 이런 상태가 좋았다.
이 절대적인 내 방은 대문간에서 세어서 똑 일곱째 칸이다. 러키세븐의 뜻이 없지 않다. 나는 이 일곱이라는 숫자를 훈장처럼 사랑하였다. 이런 이 방이 가운데 장지로 말미암아 두 칸으로 나뉘어 있었다는 그것이 내 운명의 상징이었던 것을 누가 알랴?
아랫방은 그래도 해가 든다. 아침결에 책보만 한 해가 들었다가 오후에 손수건만 해지면서 나가 버린다. 해가 영영 들지 않는 윗방이 즉 내 방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볕 드는 방이 아내 방이요, 볕 안 드는 방이 내 방이요 하고 아내와 나 둘 중에 누가 정했는지 나는 기억하지 못한다. 그러나 나에게는 불평이 없다.
아내가 외출만 하면 나는 얼른 아랫방으로 와서 그 동쪽으로 난 들창을 열어 놓고, 열어 놓으면 둘이 비치는 볕살이 아내의 화장대를 비쳐 가지각색 병들이 아롱이 지면서 찬란하게 빛나고 이렇게 빛나는 것을 보는 것은 다시 없는 내 오락이다. 나는 쪼그만 ‘돋보기’를 꺼내 가치고 아내만이 사용하는 지리가미(휴지)를 끄실려 가면서 불장난을 하고 논다. 평행광선을 굴절시켜서 한 촛점에 모아가지고 그 촛점이 따근따근해지다가, 마지막에는 종이를 끄실리기 시작하고, 가느다란 연기를 내면서 드디어 구멍을 뚫어 놓는 데까지에 이르는, 고 얼마 안되는 동안의 초조한 맛이 죽고 싶을 만큼 내게는 재미있었다.
이 장난이 싫증이 나면 나는 또 아내의 손잡이 거울을 가지고 여러가지로 논다. 거울이란 제 얼굴을 비칠 때만 실용품이다. 그 외의 경우에는 도무지 장난감인 것이다. 이 장난도 곧 싫증이 난다.
나의 유희심은 육체적인 데서 정신적인 데로 비약한다. 나는 거울을 내던지고 아내의 화장대 앞으로 가까이 가서 나란히 늘어 놓인 그 가지각색의 화장품 병들을 들여다본다. 고것들은 세상의 무엇보다도 매력적이다. 나는 그 중의 하나만을 골라서 가만히 마개를 빼고 병구멍을 내 코에 가져다 대고 숨죽이듯이 가벼운 호흡을 하여 본다. 이국적인 센슈얼한 향기가 폐로 스며들면 나는 저절로 스르르 감기는 내 눈을 느낀다. 확실히 아내의 체취의 파편이다.
나는 도로 병마개를 막고 생각해 본다. 아내의 어느 부분에서 요 냄새가 났던가를…… 그러나 그것은 분명하지 않다. 왜? 아내의 체취는 여기 늘어섰는 가지각색 향기의 합계일 것이니까.
아내의 방은 늘 화려하였다. 내 방이 벽에 못 한 개 꽂히지 않은 소박한 것인 반대로, 아내 방에는 천장 밑으로 쫙 돌려 못이 박히고, 못마다 화려한 아내의 치마와 저고리가 걸렸다. 여러가지 무늬가 보기 좋다. 나는 그 여러 조각의 치마에서 늘 아내의 동체와, 그 동체가 될 수 있는 여러가지 포우즈를 연상하고 연상하면서 내마음은 늘 점잖지 못하다. (중략)
나는 어디로 어디로 들입다 쏘다녔는지 하나도 모른다. 다만 몇시간 후에 내가 미쓰꼬시 옥상에 있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거의 대낮이었다.
나는 거기 아무 데나 주저앉아서 내 자라 온 스물 여섯 해를 회고하여 보았다. 몽롱한 기억 속에서는 이렇다는 아무 제목도 불거져 나오지 않았다.
나는 또 나 자신에게 물어 보았다. 너는 인생에 무슨 욕심이 있느냐고, 그러나 있다고도 없다고도 그런 대답은 하기가 싫었다. 나는 거의 나 자신의 존재를 인식하기조차도 어려웠다.
허리를 굽혀서 나는 그저 금붕어를 들여다보고 있었다. 금붕어는 참 잘들도 생겼다. 작은 놈은 작은 놈대로 큰 놈은 큰 놈대로 다 싱싱하니 보기 좋았다. 내리비치는 오월 햇살에 금붕어들은 그릇 바탕에 그림자를 내려뜨렸다. 지느러미는 하늘하늘 손수건을 흔드는 흉내를 낸다. 나는 이 지느러미 수효를 헤어 보기도 하면서 굽힌 허리를 좀처럼 펴지 않았다. 등이 따뜻하다.
나는 또 회탁의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거기서는 피곤한 생활이 똑 금붕어 지느러미처럼 흐늑흐늑 허우적거렸다. 눈에 보이지 않는 끈적끈적한 줄에 엉켜서 헤어나지들을 못한다. 나는 피로와 공복 때문에 무너져 들어가는 몸뚱이를 끌고 그 오탁의 거리 속으로 섞여 가지 않는 수도 없다 생각하였다.
나서서 나는 또 문득 생각하여 보았다. 이 발길이 지금 어디로 향하여 가는 것인가를……
■ 전체 줄거리
지식 청년인 ‘나’는 놀거나 밤낮없이 잠을 자면서 아내에게 사육된다. ‘나’는 몸이 건강하지 못하고 자의식이 강하며 현실 감각이 없다. 오직 한 번 아내를 차지해 본 이외에는 단 한 번도 아내의 남편이었던 적이 없다. 아내가 외출하고 난 뒤에 아내의 방에 가서 화장품 냄새를 맡거나 돋보기로 화장지를 태우면서 아내에 대한 욕구를 대신한다. 아내는 자신의 매음(賣淫) 행위에 거추장스러운 ‘나’를 볕 안 드는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수면제를 먹인다. 그 약이 감기약 아스피린인 줄 알고 지내던 ‘나’는 어느 날 그것이 수면제 ‘아달린’이라는 것을 알고 산으로 올라가 아내를 연구한다.
‘나’를 죽음으로 몰고 갔을지도 모를 수면제 — 그것을 한꺼번에 여섯 알이나 먹고 일주야를 자고 깨어나서, 아내에 대한 의혹을 미안해한다. ‘나’는 아내에게 사죄하러 집으로 돌아온다. 그리고는 그만 아내의 매음 현장을 목격하고 만다. 도망쳐 나온 ‘나’는 거리를 쏘다니던 끝에 미쓰코시 백화점 옥상에 올라가 스물여섯 해의 과거를 회상한다. 이때 정오의 사이렌이 울고, ‘나’는 “날개야 다시 돋아라. ……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라고 외치고 싶어진다.
■ 핵심 정리
• 갈래 : 단편 소설, 심리주의 소설
• 배경 : 일제 강점기의 서울 거리, 18가구가 살고 있는 33번지 유곽(遊廓)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성격 : 고백적, 상징적
• 주제 : 전도된 삶과 자아 분열의 의식 속에서 본래적 자아를 지향하는 인간의 내면 의지
• 특징 :
① 자동 기술법이 쓰임
② 인간 의식의 심층부를 그림
③ 독백체에 의한 직접적 서술이 두드러짐.
■ 작품 해설 1
이상의 문학을 대표하는 전형적인 심리주의 소설로서,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자기 소모적이고 해체적인 삶을 통해 사회 현실의 문제를 심리적 의식으로 투영시킨 작품이다. 이 작품은 소위 ‘의식의 흐름’ 수법을 시도하고 주관적 내면 의식을 객관화시켜 드러내는 등, 현대 문학적인 기법을 선보임으로써 발표 당시부터 문단에 상당한 파문을 던졌고, 비평계에서는 리얼리즘에 입각한 논란을 일으켰다. 현실 도피적이고 자폐적인 내성 소설로 보는 부정적 견해와 주관적 의식 세계를 객관화하여 사실주의를 심화시켰다는 긍정적 견해가 그것이다. 등장인물인 ‘나’와 아내는 여러 관점에서 해석되고 있지만, 대체로 분열된 자아의 두 모습으로 이해한다. 그리하여 마지막 대목의 날개의 비상(飛翔)은 분열된 자아를 결합하고 자기 구제를 꾀하는 실존의 의지로 볼 수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작품은 이상의 대표작으로 현대인의 무의미한 삶과 자아 분열을 그려 낸 최초의 심리 소설로 일컬어지고 있다. 이 소설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나’와 ‘아내’의 관계가 보통의 남녀 관계와는 달리 역전(逆轉)된 형태로 그려지고 있다는 점이다. 아내에게 기생하고 있는 ‘나’의 유폐된 삶이 아내의 방과 ‘나’의 방이라는 공간적 분할과 차이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또한 하루 종일 방 안에서 빈둥대다가 거리를 쏘다니고 티 룸에 앉아 차를 마시는‘나’의 모습은 일제 강점기를 살아가는 무기력한 지식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나타낸 것이다. 그러나 ‘나’가 ‘아내’가 준 돈을 버리고 일종의 탈출의 성격을 지닌 외출을 하면서 자아의 정체성을 의미하는 ‘날개’가 돋기를 염원하는 것은 무의미한 삶의 도정에서 생의 의미 찾기를 포기하지 않았음을 드러내는 것이다.
- 천재교육, 해법 문학 현대시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방’으로부터의 ‘외출’의 의미(천재교육 참고)
억압된 자아의식을 방이라는 밀폐된 구조로 표현했다면, ‘외출’은 그러한 상태를 벗어나려고 하는 의지의 표현이다. 즉, 외출은 억압되고 폐쇄된 현실에서 벗어나 본래의 자아를 회복하려는 노력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는 마지막 장면에 등장하는 ‘날개’가 상징하는 바이기도 하다.
- 첫 번째 외출 : 어떤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님.
- 두 번째 외출 : 아내의 방에서 다시 자고 싶다는 목적이 있는 것
- 세 번째 외출 : 아내의 명령에 의한 수동적인 것
- 네 번째 외출 : 아내가 나에게 먹인 것이 수면제라는 사실에 대한 충격에서 비롯된, 의식적인 것
- 다섯 번째 외출 : 아내의 매춘을 직접 목격한 후 ‘나’의 의지로 감행한 것
2. ‘날개’의 의미는?(천재교육 참고)
대개 문학 작품에서 ‘날개’는 자유와 이상을 뜻한다. 이 소설에서도 날개가 다시 돋기를 바라는 것은 삶의 의미와 자아를 찾아 자유롭고 이상적으로 살아가기를 소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3. 작품의 첫 문장에 드러난 박제(剝製)의 의미(천재교육 참고)
이 작품의 첫 문장은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이다. 서술자인 ‘나’는 존재론적 시각에서 자신을 박제로 인식한 것인데, 자신은 잠재된 능력을 가진 천재이지만, 주체적인 의지가 없는 삶을 살고 있음을 나타낸 것이다.
4. 등장인물들의 윤리적인 문제점(천재교육 참고)
이 작품의 등장인물들은 모두 비윤리적인 모습으로 형상화되어 있다. ‘아내’는 남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매춘을 하고, ‘나’는 아내가 부도덕한 방법으로 번 돈을 받아 생활한다. 이러한 인물들의 비윤리적인 모습에는 당대의 시대적 상황에 대한 작가의 문제적 시각이 반영되어 있다. 비윤리적이고 왜곡된 모습으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정상적인 사고로는 살아갈 수 없는 당대 현실 속의 여러 결함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5. ‘날개’의 표현상 특징 - 의식의 흐름 기법(천재교육 참고)
의식의 흐름 기법은 인간의 의식을 조각조각 분리하지 않고 마치 강물이 흐르듯이 연속적으로 서술하는 소설의 기법이다. 이 작품에서 사건은 ‘나’의 의식의 흐름에 따라 전개되므로 사건 자체도 뚜렷하지 않고 사건들 사이의 연계성을 찾기 힘들다. 이러한 기법은 ‘나’가 지닌 자의식의 혼란을 그대로 옮겨 놓은 것이다.
5-1 의식의 흐름 [stream of consciousness] (Basic 고교생을 위한 문학 용어사전)
1910~1920년대에 걸쳐 영국 소설에서 사용하던 실험적 방법을 말한다. 본래 심리학에서 나온 것으로 감각이나 상념, 기억, 연상 등이 계속적으로 일어나는 것을 가리키는 말이다. 문학에서는 이러한 의식의 흐름을 어떠한 인위적인 장치 없이 인간의 정신에서 나오는 그대로 기술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데, 이를 자동 기술법이라 한다. 간단하게 말하면 자기가 겪은 일, 그 일을 통해 떠오르는 과거의 경험, 생각, 느낌 등을 떠오르는 그대로 써내려 가는 것을 말한다. 의식의 흐름 소설은 일반적으로 내적 독백의 서술적 기법을 사용한다.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제임스 조이스의 《젊은 예술가의 초상》(1916), 버지니아 울프의 《댈러웨이 부인》(1925) 등이 있다.
■ 작가 소개
■ 엮어 읽기
* 소설가 구보 씨의 일일 – 박태원
* 유예 – 오상원
* 오감도 – 이상
'문학 이야기 > 현대산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웰컴 투 동막골 - 장진 (0) | 2021.02.18 |
---|---|
겨울의 환(幻) - 김채원 (0) | 2021.02.15 |
모래톱 이야기 - 김정한 (0) | 2020.04.29 |
동행 - 전상국 (0) | 2020.04.09 |
미스터 방 - 채만식 (0) | 2020.04.08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