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이 내리는군요." 버스 안. 검정 외투 속에 고개를 웅크리고 창 쪽으로 앉아 있는 늙은 대학생 김씨의 말에, "예, 진눈깨빈 데요." 하고 말한 것은 세무서 주사 이씨였다. 그는 멋내는 것을 좋아하여 하얀 목도리에 밤색 잠바 차림이었다. "뭐? 아, 진눈깨비! 참 그렇군." 하고 그들 뒤에서 말한 것은 털실로 짠 감색 고깔 모자를 귀밑에 푹 눌러쓴 박씨였다. 그는 군대 기피자로서 국교 선생을 사직했다. 박씨 곁 창문 쪽에는 살찐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외투 속에 웅크리고 있는 김씨는 진눈깨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신용산에서 입대할 때도 진눈깨비가 내렸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입대할 사람은 약 스무 명이었는데, 환송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태극기도 없었으며, 진눈깨비만 내리고 있었다.
고깔 모자를 쓴 박씨는 문득 자신이 기피자라는 사실을 떠올리며, 창문 쪽으로 기울였던 몸을 반듯하게 앉았다. 그리고는 옆에 있는 여자에게 "어디까지 가세요?" 하고 물었다. 불쾌감에서 빨리 벗어나기 위해서였다. 여자는 부끄럼을 타며 "군하리까지 가요." 하고 말했다. 모자를 쓴 박씨는 여자 쪽으로 조금 다가앉으며, "그래요? 그것 참 재미있게 되었는데! 우리도 거기까지 가거든요." 하고 말했다. 잠바를 입은 이씨는 "아, 이눔의 버스는 떠날 줄을 모르나!" 하고 울적하게 말했다. 그는 승강구 쪽을 흘겨보지만, 차장은 점심이라도 먹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버스는 예정 시간보다 30분이나 늦게 출발했다. 고깔 모자를 쓴 박씨와 박씨의 집에서 하숙을 하는 검정 외투를 입은 김씨 그리고 하얀 목도리에 밤색 잠바 차림인 이씨는 군하리의 친구 결혼식에 가는 길이었다. 박씨는 옆에 앉은 여자와 급속도로 친해졌다.
그 여자의 집이 원래 인천이었으나, 지금은 엄마하고 언니하고 셋이서 군하리에 산다는 사실까지 알아냈다. 그리고 이씨는 여차장의 엉덩이가 크다고 생각하며, 그녀와 노닥거리고 있었다. 오직 김씨만 묵묵히 창 밖의 진눈깨비를 감상할 뿐이었다. 차는 세시가 겨워 군하리에 도착했다. 그들 세 사람과 또 몇 사람이 차에서 내렸다. 차에서 내린 그 여자가 저만치 달아나자, 박씨는 서둘러 쫓아갔다. 김씨와 이씨도 박씨의 뒤를 따라가 보았다. 그 여자는 '서울집'이라는 옥호가 엷은 송판에 아무렇게나 씌어져 걸려 있는 집으로 들어갔다. 세 사람은 발길을 돌려 군하리의 소박한 풍경을 즐기면서, 돌촌 김자방의 혼삿집을 물어서 갔다. 그 길을 곧장 반 마장 정도 내려가서, 왼편으로 위치한 곳에 50여 호의 돌촌 마을이 있었다. 그날 밤 열시께, 그들은 술에 크게 취해서 돌 마을을 빠져나왔다.
이씨, 박씨, 김씨의 순서로 서서 혀꼬부라진 소리를 하며 서울집으로 향했다. 그들은 "술 파시오." 하고 고함을 지르면서 주먹으로 문짝을 쳤다. 그러자 대문짝 비슷하게 생긴 여러 문짝들 중 맨 가엣 것이 삐걱 소리를 내며 열리더니, 사람의 머리가 하나 쑥 나타나며, "이 다음 집에 가보슈, 여긴 여인숙이오." 하고 말했다. 그들은 취중에 다른 집 문을 두드린 것이다. 그러나 김씨는 벌써 집안으로 들어가며, "난 한숨 자고 싶은데." 하였다. 침구를 가지고 방에 들어온 여인숙 집 아이는 가슴에 반장이라는 명찰을 붙이고 있었다. 그 아이는 일등을 했다고 자랑했다. 김씨는 아이를 방에서 내보내며 자신의 과거를 생각해 보았다. 나는 동네의 천재였던 아이가 가난과의 싸움에서 피곤한 낙오자로 전락하는 과정을 회상하였다.
밖에는 눈이 소복히 내려 쌓이고, 김씨는 잠속으로 빠져들어 이내 코를 골기 시작했다. 한편 서울집에서는 박씨와 이씨가 낮에 만났던 여자와 함께 술상을 차려 놓고 있었다. 이씨가 박씨의 품에 있는 여자의 손목을 잡아끌었다. 박씨는 무슨 일에든지 자신감이 있는 세무서 주사 이씨를 바라보며, 알 수 없는 열등 의식과 질투심에 잠겨 있었다. 서울집의 여자는 이씨 품에 안겨 김씨가 늙은 대학생이라는 말을 유심히 듣고 있었다. 서로 말을 주고받으며 어느새 박씨도 이씨도 방바닥에 녹아 떨어져 있었다. 여자는 조용히 방문을 여닫고 밖으로 나갔다. 남폿불이 펄럭였다.
밖으로 나온 여자는 눈이 하얗게 쌓였고 또 소리 없이 내리는 것을 보고, "아, 신부는 좋겠네. 첫날밤에 눈이 쌓이면 부자가 된다는데. 복두 많지!" 하고 중얼거렸다. 그녀는 오늘 돌 마을에 시집온 신부의 얼굴을 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모든 신부들은 똑같은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 것 같았다. 그것은 행복, 기대, 불안, 또는 그 전부…….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눈은 길 위에도 쌓이고 있었다. 그녀는 옆집 여인숙의 샛문께로 가서 비사리 사이로 손을 넣어 사립문을 열었다. 그녀는 손님을 받는 두 개의 방 중에 불이 켜져 있는 방으로 다가가 창호지 틈으로 방안을 들여다보고는 문을 열고 방안으로 들어섰다.
김씨는 등을 굽히고 새우잠을 자고 있었다. 여자는 그 얼굴을 바라다보았다. 대학생! 그녀는 김씨의 어깨를 밀어 바로 눕게 했다. 츳츳, 옷두 벗지 않구. 가엾기도 해라. 그녀는 김씨의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되었다. 넥타이를 풀고, 이불을 젖혀서 바지를 벗기고, 와이셔츠를 벗기고, 요를 바로 펴고……. 그를 안아서 요 위에 눕게 하고, 이불을 덮어 준 뒤, 그대로 엎드려서 그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대학생! 그녀는 남폿불을 껐다. 밖에서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그녀가 남겨 논 발자국을 하얗게 지우면서.
- 사이버 문학광장 참고
갈래 : 단편소설
배경 : 1960년대 눈 내리는 겨울, ‘군하리’로 가는 버스 안과 시골 ‘군하리’ 일대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성격 : 사실적, 서정적
문체 : 간결체
제재 : 군하리에서 만나 여러 인물들의 삶
특징
① 압축과 생략, 간결한 문체로 세련된 느낌을 줌
② 묘사와 대화를 통해 인물의 심리를 암시적으로 드러냄
③ 낯설게 하기 등의 시적 기법을 사용함
④ 과거 회상을 통해 잃어버린 꿈에 대한 비감을 나타냄
⑤ 현재형 문장을 사용하여 장면을 생동감 있고 구체적으로 표현함
등장인물
김씨 – 늙은 대학생. 가난 때문에 좌절을 맞본 이상주의자. 겉으로 잘 내색하지 않는 우울한 패배주의자
이씨 – 세무서 주사. 농담을 즐기며 속물근성이 다분한 인물
박씨 – 전직 교원(초등학교). 김씨, 이씨의 하숙집 주인. 세상을 자기 식으로 살아간다고 자부하나, 그 행동이 비애감 즉, 페이소스(pathos)를 느끼게 한다.
여자 – 술집 작부. 버스에서 세 사내를 만난다. 신부(新婦)의 꿈을 꾸는 여자.
구성
- 발단 : 버스 안. 혼삿집에 가는 세 사내와 그들과 동석한 술집 여자.
- 전개 : 그들의 회상 속에 인간적 면모가 암시되며, 각자의 기질이 드러난다.
- 위기 : 밤늦게 혼삿집에 다녀온 세 남자는 술집에 모인다. 깊은 침묵에 빠지는 김씨, 삶의 낙오자임을 되뇐다.
- 절정 : 홀로 여인숙에 투숙한 김씨. 공부 잘하는 소년을 통하여 삶의 전락 과정을 회상한다.
- 결말 : 신부의 꿈을 꾸는 술집 여인은 대학생 김씨에게 순수한 사모의 감정을 지난다.
주제 : 소외된 삶을 살아가는 소시민들의 비애(이상과 꿈을 상실한 현대인의 좌절감과 방황 의식)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세 명의 남자와 한 명의 여자가 군하리에서 보낸 하루를 이야기하는 내용으로,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누어져 있다. 전반부는 군하리로 가는 버스 안을 배경으로 작품에 등장하는 네 인물의 외양과 성격이 소개된다. 등장인물은 ‘김 씨’, ‘이 씨’, ‘박 씨’로 각각 ‘늙은 대학생’, ‘세무서 직원’, ‘초등학교 선생’이다. 이들이 버스 창밖으로 내리는 진눈깨비를 바라보며 나누는 짧은 대화에서 그들 각자의 심경과 삶의 내밀한 사연이 드러난다. 진눈깨비에 의해 흐릿해진 풍경 속에서 등장인물들의 남루한 생의 초상이 오히려 또렷하게 드러나면서 쓸쓸한 아름다움을 만들어낸다.
후반부는 1960년대 ‘군하리’라는 시골 소읍의 스산하고 후줄근한 풍경을 배경으로 김 씨의 내면을 좀 더 선명하게 보여 준다. 김 씨는 자신이 묵을 여인숙에서 ‘반장’ 훈장을 달고 있는 소년을 보며 자신의 과거를 쓰라린 상실감 속에서 본다. 즉, 시골 학교에서 천재였던 그가 사회에서 열등생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대해 회의하는 모습으로 쓸쓸한 비애감을 엿볼 수 있다. 한편, 이날 밤 버스에서 만났던 여자는 대학생 신분의 김 씨에 대한 환상에 젖어 김 씨의 방으로 찾아간다. 작품의 마지막은 함박눈이 여자의 발자국을 덮는 장면으로 묘사된다.
시적 암시와 잔잔한 여운으로 한국 단편 소설의 백미로 꼽히는 이 작품은 간결하면서도 함축적인 현재형 문장으로 장면 장면이 긴장감과 참신한 탄력성을 가지고 있다.
- 지학사 T-Solution 문학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1) 1968년 <창작과 비평> 9월호에 실린 <강>은 서정인의 초기 작품에서처럼 삶의 현실적 상황을 상징 또는 환상으로 포착하면서 자의식의 분열을 추적하지만, 진실을 찾지 못한 채 방황하는 지식인의 고민을 그린 작품으로서 단아한 문장과 정확한 구성력을 통해 내적 체험을 초현실적 수법으로 묘사하고 있다. <강>은 단편 문학으로는 크게 성공했다는 호평을 듣는 작품이다.
서정인의 작품 세계의 특징은 극적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 전개가 이루어지지 않고 주인공들의 인간적 존재 의식을 표출시키는 데 있다. 이 <강>에서도 현실적 삶의 무게에 짓눌린 인물들의 인간 관계, 특히 늙은 대학생 김씨와 서울집 작부의 만남을 통해서 인간 관계 속의 개인의 실존적 내면적 의식을 잘 드러내고 있다.
2) 1960년대 시골 '군하리'의 눈 내리는 날을 배경으로 소시민들의 얘기가 간결한 문체로 잔잔하게 그려져 있는 작품이다. 김씨는 늙은 대학생으로 점차 자신감을 잃어 가는 인물이다. 인간은 성장하면서 꿈을 잃어버리고 소시민이 되어 가며, 그 소시민은 자신의 소시민성을 감추기 위해서 허풍·오기 따위의 위선의 세계에 뿌리를 내리게 된다는 것을 그는 알고 있다. 여관집에서 만난 공부 잘 하는 소년 ―반장 표찰을 붙인, 조금은 뻔뻔스러운 소년을 통해서 그러한 깨달음을 확인한다. 박씨는 국민학교 교사를 그만둔 사람인데, 제 나름대로 삶을 즐기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서서히 자신감을 상실해 감을 감추지 못한다. 세무서 주사 이씨 역시 일상(日常)을 유쾌하게 대하고 있지만, 그가 드러내는 속물 근성은 소시민적 페이소스(pathos)를 심화시킬 뿐이다.
이 소설의 백미(白眉)는 후반부에 표현될 술집 여자의 태도이다.
그녀는 버스에서 세 사내를 만난 후 혼삿집까지 따라 갔다가 박씨, 이씨와 어울려 술자리에 앉는다. 그러다 '대학생'이라는 말에 자극되어 옆집 여인숙에 투숙한 김씨의 방으로 들어간다. 그 이유를 작가는 해명하지 않는다. 그저 김씨가 대학생이라는 상황 설정뿐이다. 이것은 아마 그녀의 신분적 열등감이 대학생 사모(思慕)라는 보상책을 통하여 아름다운 만남을 한 순간이나마 얻으려는 꿈꾸는 자의 행위이리라.
'대학생'은 세상 모르고 잠들어 있으며, '술집 여자'는 연인으로서가 아니라 '누나가 되고 어머니가 된' 보호자의 입장에서 대학생과 한 방에 드는 것이다. 방금 전 그녀가 꿈꾸었던 눈 오는 밤의 신부(新婦)가 되그는 불가능하더라도 그 신부와 같은 첫날밤을 대학생과 함께하려는 것이다. 인간과 인간 사이, 특히 '대학생'과 '술집 작부'의 만남은 특히 그녀에게는 우연 이상의 의미를 지닌다. '밖에서는 눈이 소복소복 쌓이고 있다. 그녀가 남겨 논 발자국을 하얗게 지으면서'란 아름다운 마지막 문장이 그녀가 찾았던 꿈이 결코 허망한 것이 아니었음을 이야기해 준다.
- 글동산 현대소설3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인물 호명 방식에 나타난 작가의 의도
이 작품은 소설의 도입부에서 작중 인물들이 이름 대신 외적 특징으로 호명되고 있다. ‘외투 속에 웅크리고 있는 사람, ‘점퍼를 입은 사람’, ‘고깔모자의 사나이’ 등이 그러하다. 서술자는 인물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고 그들의 외모 묘사를 통해 호명하는 것이다. 이후 버스에서 하차할 때 즈음해서 각 인물의 호칭이 ‘늙은 대학생 김씨’, ‘세무서 직원 이씨’, ‘초등학교 선생 박씨’ 등의 직업적 정보를 함축한 호칭으로 변화되며 인물이 더욱 선명하게 드러난다. 이로써 서술자는 객관적인 시선으로 이들의 외모를 묘사한 후 천천히 각자의 내면을 초점화함으로써 인물을 조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더불어 이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단지 성으로만 표현될 따름이다. 작가가 인물들에게 이름을 부여하지 않았다는 사실 속에서 우리는 이 인물들이 삶에 대한 주체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을 발견하게 된다. 즉, 이러한 익명성은 인물들의 삶이 현실로부터 소외된 채 고립되어 있거나 무기력하고 수동적인 자세를 나타내는 의도적 기법으로 볼 수 있다.
2. 작품 속에 나타나는 눈(진눈깨비 → 함박눈)의 의미
이 작품에서 ‘눈’은 첫 장면과 마지막 장면에 나오는 소재이다. 첫 장면에서 세 남자는 ‘눈’을 보며 감상에 젖어 과거를 회상한다. 이때 ‘눈’은 그들이 각자 자신의 내밀한 추억을 떠올리는 매개체이다. 그리고 마지막 장면에서 ‘함박눈’은 술집 작부인 ‘그녀’로 하여금 신부가 되는 듯한 환상에 빠져들게 하여, ‘그녀’가 대학생을 찾아가는 분위기를 돋우는 역할을 한다.
3. 제목인 ‘강’의 의미
이 작품은 제목이 ‘강’이지만 소설 속 어디에도 ‘강’의 의미를 유추할 만한 구체적 언급이 눈에 띄지 않는다. 이에 대해 작가는 작품의 후기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소설의 모티프는 우연히 김포 부근의 강가로 여행을 갔다가 그 풍경과 분위기를 보고 떠올렸습니다. …… 강은 흘러가는 것이므로 여행을 상기시키지 않습니까? 우리의 살림살이도 그렇게 흘러가는 여행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죠.. ‘강’이라는 제목은 그런 우의적 뜻을 지니고 있는 셈입니다.”
즉, 작품 속에 등장하는 소시민들의 삶이 제각기 애환을 지닌 채 ‘강’의 흐름처럼 덧없이 흘러감을 제목을 통해 나타낸 것이라고 짐작해 볼 수 있다.
■ 작가 소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