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대 - 염상섭




■ 본문

  덕기는 조부의 꾸지람이 다른 데로 옮아간 틈을 타서 사랑으로 빠져나왔다.

  머리가 텁수룩하고 꼴이 말이 아니라는 조부의 말눈치로 보아서 김병화가 온 것이 짐작되었다.

  “야 —그러지 않아도 저녁 먹고 내가 가려 했네.”

  덕기는 이틀 만에 만나는 이 친구를 더욱이 내일이면 작별하고 말 터이니만큼 반갑게 맞았다.

  “자네 같은 부르주아가 내게까지! 자네가 작별하러 다닐 데는 적어도 조선은행 총재나…….”

  병화는 부옇게 먼지가 앉은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딱 버티고 서서, 이렇게 비꼬는 수작을 하고서는 껄껄 웃어 버린다.

  “만나는 족족 그렇게도 짓궂이 한마디씩 비꼬아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겠나? 그 성미를 좀 버리게.”

  덕기는 병화의 ‘부르주아, 부르주아.’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먹을 게 있는 것은 다행하다고 속으로 생각지 않는 게 아니나 시대가 시대이니만큼 그런 소리가— 더구나 비꼬는 소리는 듣고 싶지 않았다.

▶반갑게 병화를 맞는 덕기

  “들어가세.”

  “들어가선 무얼 하나. 출출한데 나가세그려. 그년의 하숙 노파의 눈칫밥 먹으러 들어가고도 싶지 않은데……. 군자금만 대게, 내 좋은 데 안내를 해 줄게!”

  “시원한 소리 한다. 내 안내할게 자네 좀 내 보게.”

하며 덕기는 임시 제 방으로 쓰는 아랫방으로 들어갔다.

  “여보게, 담배부터 하나 내게. 내 턱은 그저 무어나 들어오라는 턱일세.”

하며 병화는 방 안을 들여다보고 손을 내밀었다.

  “나 없을 땐 온통 담배를 굶데그려.”

  덕기는 책상 위에 놓은 피존 갑을 들어 내던지며 웃다가,

  “그저 담배 한 개라도 착취를 해야 시원하겠나. 자네와 나와는 착취와 피착취의 계급적 의식을 전도시키세.” / 하며 조선옷을 훌훌 벗는다.

  “담배 하나에 치를 떠는— 천생 그 할아버지의 그 손자다!”

  병화는 담배를 천천히 피워서 맛이 나는 듯이 흠뻑 빨아 후 뿜어내면서,

  “여보게, 난 먼저 나가서 기다림세. 영감님이 나와서 흰 동자로 위아랠 훑어보면 될 일도 안 될 테니까!” / 하고 뚜벅뚜벅 사랑문 밖으로 나간다.

  아닌 게 아니라 덕기도 조부가 나오기 전에 얼른 빠져나가려던 차이다. 조부는 병화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다만 양복 꼴이나 머리를 텁수룩하게 하고 다니는 것으로 보아 무어나 뜯으러 다니는 위인일 것이요, 그런 축과 어울려서 술을 배우고 돈을 쓰러 다닐까 보아서 걱정을 하는 것이었다. 

<중략>

▶병화의 권유로 외출 준비를 하는 덕기


  “놀라 자빠지지 말라던 여자가 지금 그 여자인가?”

  덕기는, 병화가 주부가 들어가기도 전에 그 큰 컵을 들고 벌떡벌떡 다 켜기를 기다려 물어보았다.

  병화는 오뎅을 반이나 덤뻑 떼 물어서 우물우물 씹느라고 미처 대답을 못하다가 반씩 반씩 씹는 말로,

  “아니, 참 물어볼걸.”

하고 입으로는 여전히 씹으면서 손뼉을 친다. 병화는 먹기에 정신이 팔린 것은 아니다. 덕기에게 말은 그렇게 했어도 실상 이 집에 미인이 있고 없는 데에 그리 마음이 쓰이는 것이 아닌지라 이때껏 무심하였던 것이다.

  주부가 오니까 병화는 씹던 것을 이제야 겨우 삼키고,

  “그 사람 어디 갔소?” / 하고 묻는다.

  “예, 지금 막 목욕 갔어요. 곧 오겠지요.” / 하며 중턱에 서서 상긋 웃고는 시선을 덕기에게 준다.

▶주점에 온 두 친구

  주부의 눈에 비친 덕기는 해끄무레하고 예쁘장스러운 똑똑한 청년이었다. 이 여자에게는 조선이라는 경멸하는 마음은 벌써 없으나, 그 해끄무레하고 예쁘장스러운 데다가 학생복이나마 값지고 조촐하게 입은 양으로 보아서, 어느 부잣집 아기거니 하는 생각이 들어서 약간 경멸하는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한편 손님(병화)이 그동안 두어 번 보았어도 허술한 위인은 아닌 모양인데, 그런 사람하고 추축이 되면 저 청년(덕기)도 그런 부잣집 귀동아기로만 자라난 모던 보이 같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이 여자는 올가을에 처음으로 이 장사를 벌인 터이라, 드나드는 손님이 하도 많지만, 이런 장사에 찌들어서 여간 것은 눈에 띄지 않을 만큼 신경이 굳어지지 못한 탓이라 할까, 여하간 여염집 여편네의 호기심으로 처음 보는 남자마다 유난히 호기심을 가지고 인금 나름을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어쩐 일인지 별안간 머릿속에 정자 생각이 떠올라 왔다. 정자란 조선에 와 있는 ××지방 재판소 오 판사의 맏딸이다. 성은 오(吳)가라도 일본말로 ‘구레’라고 하는 일본 사람이다. 이 주인 여편네가 ××시에서 도(道) 자혜 병원에서 간호부장 노릇을 할 때에 오정자가 무슨 병으로든가 입원한 후로 자연히 가까워졌던 것이다.

  그러나 왜 지금 그 정자의 생각이 났는가? 어쩐지 덕기에게서 받은 인상이 그 정자와 남매 같다고 생각하는 것이었다. 남매 — 가당치도 않은 생각이다. 민족이 다른 사람이다.

  그러나 그보다도 정자가 퍽 새로운 생각을 가지고 사회 비평이나 정치 비평을 도도히 할 때마다, 이 집주인은 상긋상긋 웃으면서 다만 귀엽게 들어 주기도 하고 장단을 맞추어 주기도 한 일이 있어서, 자기 역시 비교적 신지식에 어둡지 않다고 생각하는 터이다. 그러므로 머리 텁수룩한 청년(병화)이 친구들과 와서 일본 말로 저희끼리 떠드는 소리를 귓결에 들을 때도 소위 ‘마르크스 보이’로구나 하고 반은 비웃음 섞인 친근한 감정을 느꼈기 때문에 지금 보는 덕기도 한 종류려니 하는 생각도 부지중에 나서 ‘마르크스 걸’인 정자가 불시에 연상된 듯도 싶다.

▶주부의 눈에 비쳐진 덕기


■ 핵심 정리

․ 갈래 : 장편소설, 가족사 소설. 

․ 배경 : 1920년대의 서울 

․ 경향 : 사실주의 

․ 시점 : 3인칭 전지적 작가 시점 

․ 문체 : 치밀하고 묘사적 문체 

․ 의의 : 사실주의 소설의 대표작 

․ 주제 : 식민지 현실 속에서의 세대간, 계층간의 갈등 

․ 인물 : 조 의관(할아버지) - 조씨 가문의 가장(家長). 구시대의 고루한 사고방식과 인습에 젖어 있는 봉건주의 자. 재산을 노린 후취 ‘수원집’의 일당에 의해 독살당함. 

        조상훈(아버지) - 조 의관의 아들. 덕기의 아버지. 미국 유학을 다녀온 기독교 신자이자 개화주의자이 나 축첩과 노름을 일삼는 위선적 인물. 

        조덕기(아들) - 조상훈의 아들. 일본 유학생. 할아버지와 아버지 사이에서 중도적 입장을 취한다. 사회 주의 운동의 심정적 동조자. 

        김병화 - 덕기의 친구. 사회주의자. 신념과 의지를 가지고 인간다운 삶의 길을 추구함. 

․ 구성 : 발단 - 유학생 덕기가 방학차 다니러 왔다가 떠나며, 조부·아버지와 첩·병화 등이 등장함. 

        전개 - 집안의 뒤엉킨 인간 관계를 알게 되는 덕기. 

        위기 - 조 의관의 위독과 수원집의 모략. 

        절정 - 조 의관의 사망 후 집안의 갈등 심화. 어수선해지는 사회 환경으로 주요 인물 피검(被檢). 

        결말 - 덕기는 무혐의로 풀려나 앞으로 살 길을 모색.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1931년 1월 1일부터 9월 17일 까지 “조선일보”에 연재 발표된 가족사 소설로, 조 의관(1세대)과 그의 아들 조상훈(2세대) 그리고 손자 조덕기(3세대) 3대에 걸친 가족의 파란만장한 삶을 통해 당대 현실을 구체적으로 그려 내었다. 이 세 인물은 각각 구세대, 개화기 세대, 식민지 지식인 세대의 가치관을 드러내는 인물들이다. 작가는 이 세 인물과 이들 주변의 인물들이 빚는 사상, 애정, 재산을 둘러싼 갈등을 통해 봉건적 허위의식(조 의관)과 인간의 도덕적 타락(조상훈)을 비판하는 동시에 억압적이고 혼란스러운 시대의 돌파구가 될 수 있는 가치관 정립을 조덕기와 김병화와 같은 새로운 세대에게서 찾고자 하는 희망을 내비치고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1931년 <조선일보>에 연재된 장편소설. 1920년대의 서울을 배경으로 하여, 만석꾼인 조씨 일가의 할아버지, 아버지, 아들 3대가 각기 다른 가치관 아래서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그린 장편소설이다. 작품 속에서의 사건은 비교적 짧은 기간에 일어나고 있지만, 세대간의 서로 다른 모습을 그렸다는 점에서 가족사 소설의 성격을 지닌다.

 이 소설의 중심 인물 3인은 제각기 문제점을 지닌 인물인데, 할아버지 ‘조 의관(議官)’은 봉건제도의 전형적 구세대 인물이며 20대의 후처(수원집)에게 아들을 낳기를 바라는 탐욕적 인간으로 나타난다. 아들 ‘상훈’은 신문물과 기독교에 기울어진 신사이지만 애욕과 축첩(蓄妾)의 이중 생활에서 재산만 탕진하는 무기력·무의지의 과도기적 인물이다. 아들 ‘덕기’는 선량한 인간성을 지니고 있으나, 이러한 불협화음 밑에서 재산을 지키는 데 한정되고, 적극성을 가지지 못한 미적지근한 순응형이다.

 <삼대>의 인간 드라마는 조부의 죽음을 둘러싸고 재산 상속욕에 불이 붙으면서 주변 인물들의 추악성이 절정에 이르고, ‘병화’가 추구하는 인간에의 길, ‘필순 아버지’의 혁명가로서의 불행한 일생 등에서는 대조적으로 새로운 삶을 전개하려는 안간힘을 엿볼 수 있다.

 <삼대>에서 작가는 새로운 세대인 ‘덕기’, ‘병화’ 등의 미래상을 제시하고 있지는 않지만 이것은 일제의 식민지 상황에서 어쩔 수 없는 한계였으리라 생각된다. 몇 가지 한계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사회적 계층간의 갈등도 치밀하게 그려 내고 있다. 역사적·사회적 변동 속에서 세대 교체의 실상을 분명하게 보이고 있다. 


■ 심화 내용 연구

1. ‘삼대’의 사회 · 문화적 배경

• 봉건적 가치관의 잔존: 조 의관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족보’와 ‘사당’이다. 이것들은 봉건적 가치관을 상징하는 것으로서, 근대 사회로 변모하는 과정에서 아직도 봉건 시대의 낡은 신분관과 출세관을 고수하는 인물이 존재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 자본주의 사회로 전환: ‘삼대’에서 모든 인간 관계와 사회적 문제의 중심 고리로 작용하는 것은 ‘돈’이다. ‘돈’을 둘러싼 인물들의 욕망과 갈등은, 그 시대가 이미 자본주의 체제로 편입되고 있다는 사실을 전형적으로 보여 준다.

• 축첩 제도의 잔존: 조 의관의 후처인 수원집이 사실상 첩이나 다를 바 없는 존재라는 점, 개화 문명의 세례를 받은 조상훈이 홍경애와 김의경을 첩으로 둔 사실에서 아직도 축첩 제도가 남아 있음을 알 수 있다.

• 사회주의 이념의 유행: 1920년대 초반에 유입된 사회주의 이념은 일제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지하 운동으로 전환한다. 당시 ‘마르크스 보이’로 불렸던 김병화, 피혁, 장훈 등의 사회주의자들의 활동상에서 이러한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 남아 선호 사상의 잔재: 조 의관은 칠순 노인으로, 수원 댁과의 사이에서 네 살배기 딸까지 두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산을 물려줄 아들을 하나 더 두기를 희망한다. 이러한 점에서 남아 선호 사상이 남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2. 조덕기와 김병화의 관계

  두 인물은 중학교 동창지간이지만, 조덕기는 중산층의 보수의적 관점을 지니고 있고, 김병화는 급진적 사회주의자이기 때문에 사상적으로 융합할 수 없어 갈등의 불씨를 안고 있는 관계이다.


3. ‘삼대’에 등장하는 새로운 세대의 인물들

  이 작품에는 김병화, 홍경애, 장훈과 같은 새로운 세대의 인물들이 등장한다. 이들은 모두 당대 식민 사회의 부조리와 모순에 저항하며,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이상주의자들이다. 이들은 모두 식민 체제의 장벽으로 고통받는 당대의 민족적 현실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으로 사회주의 사상을 옹호하고 있다. 결국, 1930년대라는 시대 상황 속에서 이들이 옹호하고 있는 사회주의 사상은 이념적인 사회주의라기보다는 식민지 체제에 대한 저항의 수단이라고 볼 수 있다.


■ 작가 소개

 염상섭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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