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이제 바라보노라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눈길을
온 겨울을 떠돌고 와
여기 있는 낯선 지역을 바라보노라.
나의 마음속에 처음으로
눈 내리는 풍경.
세상은 지금 묵념의 가장자리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로서 덮이노라.
바라보노라.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을.
눈 내리는 하늘은 무엇인가
내리는 눈 사이로
귀 귀울여 들리나니 대지의 고백.
나는 처음으로 귀를 가졌노라.
나의 마음은 밖에서는 눈길
안에서는 어둠이노라.
온 겨울의 누리를 떠돌다가
이제 와 위대한 적막을 지킴으로써
쌓이는 눈더미 앞에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
■ 핵심 정리
• 갈래 : 서정시, 자유시
• 성격 : 명상적, 관념적, 상징적, 관조적
• 제재 : 눈 내리는 풍경
• 주제 :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 오랜 방황의 시기를 지내고 얻은 마음의 평화
• 특징 :
① 종결형 어미 ‘~노라’의 반복
② 차분하고 명상적인 관조적 어조를 보임
■ 작품 해설 1
이 시는 작가가 허무주의적 세계에 탐닉하던 시절의 작품으로, 눈 덮인 길을 바라보며 오랫동안 계속된 방황과 고괴를 가라앉히고 명상에 잠겨 무념무상의 경지를 느끼게 된 체험을 노래하고 있다. 화자는 눈이 가득 내리는 한 겨울의 풍경을 보며 지난날의 고통과 번뇌가 정화된, 마음 속의 평화를 느낀다. 삶의 고통과 방황 끝에서 그러한 모든 것들을 덮고 있는 ‘눈길’을 보며 벅찬 감격과 실렘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정화된 세계의 발견으로 화자는 평화로운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를 느낀다. 이 시는 ‘눈’이라는 상징적 사물을 통해 마음 속의 평온을 노래한 명상적이고 관념적인 작품이다.
■ 작품 해설 2
이 시는 작가가 역사(歷史)와 민족(民族)의 문제로 시야를 확대하기 이전에 창작한 작품으로 허무주의적인 시적 경향을 띠던 등단 초기의 작품이지만, 작품 속에는 이미 허무주의적인 시적 경향을 넘어서려는 내면적 지향이 나타나고 있어서 주목된다.
눈은 시인에 따라서 받아들이는 시적 이미지가 대조적이다. 그래서 흔히들 시에서 사용되는 '눈'의 시어는 고통과 시련과 같은 이미지가 있지만 여기서의 눈(雪)은 그 흰 빛깔로 인해 정화(淨化)의 이미지를, 모든 것을 감싸안는다는 의미에서 관용 또는 포용의 이미지를 가진다. 이 작품의 눈 역시 이러한 이미지를 보여 준다.
이 시에서 눈길은 '지난 것이 다 덮여 있는' 즉 지난날의 고통과 고뇌를 정화시켜 포근히 감싸안는 평온한 상태의 표현이다. 그러한 상태는 시인이 '온 겨울을 떠돌고'에서와 같은 오랜 방황과 번민(煩悶)의 구도(求道) 생활 끝에 '나의 마음 속에 처음으로' 벅찬 감격으로 받아들이게 된 경지이다. 이 경지를 작자는 '설레이는 평화'라고 표현했다. 그러한 경지에서 그는 '온갖 것의 보이지 않는 움직임'이 보이고 '대지의 고백'이 들리는 듯한 새로운 정신 세계가 열리는 것을 체험한다.
이렇게 그 동안의 번민과 방황에서 벗어난 명상의 정신 상태를 작자는 '나의 마음은 어둠이노라'는 구절에 압축했다. 여기서의 '어둠'은 절망적인 암흑이 아니라 모든 욕심, 후회, 애증(愛憎) 따위를 지워 버린 무념 무상(無念無想)의 경지를 은유적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것은 곧 '위대한 적막(寂寞)'이며, '지나온 어느 나라에도 없었던 설레이는 평화'인 것이다.
■ 심화 내용 연구
1. ‘눈’의 상징성
눈은 그것의 자연적인 속성, 즉 ‘깨끗함’, ‘차고 하얌’, ‘하늘에서 내림’, ‘지상의 것을 다 덮음’과 같은 고유한 성격에 의해 긍정적이고 희망적인 상징성이 결합된다. 이 시에서도 마찬가지로 ‘눈’, 또는 ‘눈길’은 정화(淨化), 포용(包容), 너그럽게 감싸 안음 등의 함축적 의미를 내포한다고 할 수 있다.
2. 이 시의 비유적인 의미
‘눈길’과 ‘어둠’은 그 색채 이미지가 서로 대립되며, ‘어둠’은 ‘절망적 암흑’과 같은 부정적인 이미지를 강하게 연상시킨다. 그러나 이 시에서 화자는 어둠에 대한 통상적인 관념, 정형화된 사고에서 벗어나 ‘어둠’을 ‘눈길’과 같은 의미를 지니는 시어로 새롭게 창조했다.
■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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