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세전 - 염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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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주요 부분

  그러나 요새로 와서 나의 신경은 점점 흥분하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보면 적개심이라든지 반항심이라는 것은 보통 경우에 자동적 · 이지적이라는 것보다는 피동적 · 감정적으로 유발되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일본 사람은 지나치는 말 한마디나 그 태도로 말미암아 조선 사람의 억제할 수 없는 반감을 끓어오르게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타락에서 스스로를 구하여야 하겠다는 자각을 주는 가장 긴요한 원동력이 될 뿐이다. <중략>

  촌뜨기는 차차 침이 괴어 오는 수작이다.

  “그러나 밑천이 아주 안 드는 것은 아니지요. 우선 얼마 안 되지만 보증금을 들여놓아야 하고, 양복이나 한 벌 장만하여야 할 터이니까……. 그러나 당신이야 형님이 헌병대에 계시다니까 신분은 염려 없을 테니 보증금은 없어도 좋겠지.”

  제 딴은 누구를 큰 직업이나 얻어 주는 듯싶이, 더구나 보증금은 특별히 면제하여 주겠다는 듯이 오만한 태도로 어깨를 뒤틀며 호기만장이다. 일편 촌뜨기는 양복 신사가 돼야 하는 직업이라는 데에 속으로 헤에 하는 기색이다. 그러나 정작 그 직업의 종류가 무엇인가는 좀처럼 가르쳐 주지 않는다. 실상 곁에서 엿듣고 앉았는 나 역시 궁금하지만, 이러한 소리를 듣는 시골 궐자는 더 한층 호기의 눈을 번쩍이며 앉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을 토설치 않는 것은 나와 그 외의 두세 사람이 들을까 꺼리어서 그리하는 것 같기도 하고, 또는 그 시골뜨기가 좀 더 몸이 달아 덤비며 자기의 부하가 되겠다는 다짐까지 받고서야 이야기하려는 수단 같기도 하다.

  “그래 그런 훌륭한 직업이 무엇인데, 어데 있단 말요?”

  이번에는 그 시골자의 동행인 듯한 사람이 가만히 듣고 있다가 욕탕에서 시뻘겋게 단 몸뚱어리를 무거운 듯이 끌어내며 물었다. 그자도 물속에서 불쑥 일어서서 수건을 등 뒤로 넘겨서 가로잡고 문지르며 한번 목욕탕 속을 휘돌아다보고, 다른 사람들이 자기네의 이야기에는 무심히 이 구석 저 구석에서 멱을 감는 것을 살펴본 뒤에, 안심한 듯이 비로소 목소리를 낮추며 입을 벌린다.

  “실상은 누워 떡 먹기지. 나두 이번에 가서 해 오면 세 번째나 되오마는, 내지의 각 회사와 연락해 가지고 요보들을 붙들어 오는 것인데……, 즉 조선 쿨리〔苦力〕말씀요. 농촌 노동자를 빼내오는 것이죠. 그런데 그것은 대개 경상남북도나, 그렇지 않으면 함경, 강원, 그다음에는 평안도에서 모집을 해 오는 것인데, 그중에도 경상남도가 제일 쉽습넨다. 하하하.”

  그자는 여기 와서 말을 끊고 교활한 웃음을 웃어 버렸다.

  나는 여기까지 듣고 깜짝 놀랐다. 그 불쌍한 조선 노동자들이 속아서 지상의 지옥 같은 일본 각지의 공장과 광산으로 몸이 팔리어 가는 것이, 모두 이런 도적놈 같은 협잡 부랑배의 술중(術中)에 빠져서 속아 넘어가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나는 다시 한 번 그자의 상판때기를 치어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 전체 줄거리

 동경 W 대학 문과 유학생 이인화는 어느 날 아내가 위독하다는 김천 큰형님의 전보를 받고 학기말 시험을 포기한 채 조선으로 귀국할 준비를 한다. 연락선 안에서 조선인이 멸시당하는 것을 보며 식민지 백성의 비애를 느끼며 부산에 도착한 이인화는 조선이 일본인들의 소굴이 된 것에 분개하고, 김천역에 마중 나온 형님 댁에 잠시 들른다.

  서울행 기차 안에서 비굴한 노예가 되어 있는 조선의 현실을 절감하고, 구더기 무덤이라고 절규한다. 시모노세키와 부산, 김천을 거쳐 서울에 이르는 여정을 통해 이인화는 일본 제국주의의 지배 밑에서 비참한 생활을 영위하고 있는 조선 민중의 현실을 발견한 것이다. 집에 도착한 며칠 후 결국 아내가 죽자, 이인화는 일본에서 사귀던 카페 여급과의 관계도 청산하고 공동묘지 같은 세상에서 진실 된 삶을 찾기로 결심하고 새로운 출발을 위해 다시 동경행 열차에 오른다.


■ 핵심 정리

• 갈래 : 중편 소설, 여로형 소설, 사실주의 소설

• 배경 : 1918년 겨울, 동경과 서울, 그리고 오가는 열차 안

• 시점 : 1인칭 주인공 시점

• 성격 : 사실적, 현실 비판적

• 주제 : 지식인의 눈으로 바라본 식민지 조선의 암담한 현실,

• 특징 :

 ① 3 · 1 운동이 일어나기 직전의 한국의 현실을 사실적이며 객관적으로 제시함

 ② 여로형 원점 회귀 구조의 작품임

 ③ 자조, 혐오의 어조가 드러남

 ④ 개인과 사회의 갈등이 주된 양상임.


■ 작품 해설 1

 ‘묘지(墓地)’라는 제목으로 발표했다가 2년 후 단행본 ‘만세 전(萬歲前)’으로 개제(改題)하여 완결되었다.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3 · 1 운동이 일어나기 전 서울과 동경을 배경으로, 한 지식 청년의 눈에 비친 사회상의 기록이라 할 수 있다. 즉, 무단 정치라는 식민지 정책 하에서 조선인의 자아비판, 사회의 본질과 생태를 냉철하게 분석한 작품이다. 작가는 일제 강점 아래 3 · 1 운동 직전의 현실에서 일제로부터 탄압을 받아 궁핍하고 암울한 조선의 모습을 구더기가 들끓는 공동묘지라는 상징적인 표현으로 나타내었다. 또, 조선의 젊은이들을 일본의 고장이니 광산에 팔아넘기는 것, 즉 값싼 노동력의 착취를 나타내었다. 한편, 주인공은 아내 위독의 전보를 받고도 곧장 귀국하지 않았고, 귀국 중에 민족의 현실에 분노와 울분을 느끼기도 하지만 아내가 죽자 눈물조차 흘리지 않고 동경으로 떠나고 만다. 또, 당시 조선의 상황을 공동묘지로 파악하면서 무덤 속을 빠져나간다고 하며 현실에서 탈출하려고 한다. 이러한 작가 의식은 다분히 허무주의적 성격을 띠고 있음을 말하는 것으로, 이 허무주의는 일본의 수도인 동경을 탈출구로 삼는 한계는 있으나, 우리 민족의 현실에 대한 인식을 내포하고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글은 발표 당시 제목을 <묘지>라고 한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작가는 당대의 상황을 무덤으로 인식하고 일제 강점기하에서 신음하던 우리 민족의 암담한 현실을 냉철하게 비판하고 있다.

 주인공은 조선의 현실을 ‘무덤’이라고 규정한다. 구더기가 끓는 무덤, 조선의 총체적 절망을 뼈저리게 느끼는 것이다. 그가 무덤이라고 말한 순간 그의 의식에서 새 빛을 기대하기는 어렵다. 그리고 그 무덤이 ‘공동묘지’로 인식된다면 민족 전체가 죽은 것이나 다름없는 상태로 문제는 심각한 것이 되고 만다. 그래서 그는 어찌할 수 없는 절망감에 그 묘지로부터 벗어나려고만 한다. 즉, 자기 자신은 무덤 바깥에 있다는 식민지 지식인의 허위의식을 드러내는 것이다.

 이 글에서 주인공의 현실 인식이 변화해 가는 과정은 여로형 구조를 통해 효과적으로 드러나며, 다시 동경으로 돌아가는 원점 회귀형 구조는 현실 도피적인 주인공의 모습을 단적으로 나타내는 결말 방식이라 할 수 있다.

 - 꿈을 담는 틀, 꿈틀 문학 자습서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무덤’의 상징적 의미

 작중에서 주인공(이인화)은 조선인의 실상을 보며 ‘이것은 무덤이다’라고 외친다. 이 외침은 3․1운동 직전의 조선 사회가 얼마나 비참한 지경이었는지를 사실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볼 수 있다.

 주인공은 비록 조선인이기는 하지만, 동경에서 유학 중인 상류층의 지식청년이기에 조선 사회의 실상에 대해 어두운 인물이다. 따라서 오랜 만의 귀국길에 비친 조선의 모습이 그에게는 충격으로 다가온다.

 ‘무덤’이란 삶의 생기를 잃어버린 식민 치하의 노예적 삶과 그러한 삶을 만들어 가는 분위기에 아무런 저항도 못하는 주인고으이 처참한 의식 세계를 반영하는 것이다. ‘무덤’이라는 표현에는 그의 절망적 인식과 아울러 허무주의자로서의 면모도 함께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허무주의자의 모습은 식민 현실과 대조되는 공간인 동경으로 황급히 달려가는 모습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2. 주인공의 체험과 의식 성장

 주인공 ‘나’는 작품 속에 나타난 몇 가지 체험을 통해서 의식의 각성을 하게 되고, 이는 자신의 성격과 결합하여 행동을 유발한다.

 ․ 비자발적 조혼의 체험 : 주인공인 ‘나’는 아내가 자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결혼한 구식 여성이기 때문에 그에 대해 무관심한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 일본인의 조선이 멸시 : ‘나’는 서울로 오는 길에 식민지 현실의 참담한 모습을 확인하면서 의식의 각성을 겪는다. 그러나 그러한 의식의 각성을 실천적 차원으로 발전시키지 못한 채 일본으로 간다.


3. 염상섭의 초기 단편과 ‘만세전’의 차이점

 염상섭은 초기 단편들에서 일제 식민 통치에 절망하고 허무주의에 빠진 젊은이들의 자아 탐구를 ‘표본실의 청개구리’ 등에서 볼 수 있듯이 다소 졸렬하게 묘사하였다. 그러나 ‘만세전’에 이르러서는 그러한 개인적 상태의 묘사에서 어느 정도 벗어나 몰락해 가는 민족 현실을 묘사하는 데에 눈을 돌리게 된다. 주인공의 시선을 통해 일제 강점하의 현실, 즉 차별과 착취에 신음하는 민중의 실상, 그리고 구시대적인 관습으로 고통 받는 자신과 그로 인해 죽어간 아내의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함으로써 이후 ‘삼대’ 등 거대한 사실주의적 장편 소설로 나아가는 초석을 마련한 것이다.


4. 사실주의 소설로서 ‘만세전’의 한계

 이 작품은 염상섭 소설에 있어 초기의 개인적 자아 탐구에 국한된 자연주의적 성향에서 현실과 사회로 눈을 돌리는 사실주의로의 이행을 보여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지식인을 주인공으로 한 식민지 현실에 대한 날카로운 분석과 비판을 통해 잘 드러난다. 하지만 이 작품은 그 이상으로 나아가지는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진다. 즉 사회를 변혁하고 이끌 주체로서의 지식인 주인공은 현실의 비참함에 조소하고 환멸을 느끼지만 그러한 현실을 변화시키고자 어떠한 노력이나 행동을 보여 주지는 않는다. 오히려 현실에 대한 환멸은 주인공의 도피로 이어진다. 이는 당대 지식인들의 실상을 보여 주는 동시에, 염상섭 소설의 전망 부재라는 한계점을 노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 작가 소개

염상섭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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