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평역 - 임철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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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주요 부분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별로 복잡한 내용이랄 것도 없는 장부를 마저 꼼꼼히 확인해 보고 나서야 늙은 역장은 돋보기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일어선다.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군.

  출입문 위쪽에 붙은 낡은 벽시계가 여덟 시 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다. 하긴 뭐 벌써라는 말을 쓰는 것도 새삼스럽다고 그는 고쳐 생각한다. 이렇게 작은 산골 간이역에서 제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완행열차를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탓이다. 더구나 오늘은 눈까지 내리고 있지 않은가.

  역장은 손바닥을 비비며 창가로 다가가더니 유리창 너머로 무심히 시설을 던진다. 건널목 옆 외눈박이 수은등이 껑충하게 서서 홀로 눈을 맞으며 희뿌연 얼굴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송이눈이다. 갓난아이의 주먹만 한 눈송이들은 어둠 저편에 까맣게 숨어 있다가 느닷없이 수은등의 불빛 속에 뛰어 들어 오면서 뚱그렇게 놀란 표정을 채 지우지 못한 채 땅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있다. 굉장한 눈이다. 바람도 그리 없는데 눈발이 비스듬히 비껴 날리고 있다. 늙은 역장은 조금은 근심스런 기색으로 유리창에 얼굴을 바짝 대어 본다. 하지만 콧김이 먼저 재빠르게 유리창에 달라붙어 뿌연 물방울을 만들었기 때문에 소매로 훔쳐 내야 했다. 철길은 아직까지는 이상이 없었다.

  그는 두 줄기 레일이 두툼한 눈을 뒤집어쓴 채 멀리 뻗어 나간 쪽을 바라본다. 낮엔 철길이 저만치 산모퉁이를 돌아가는 모습까지 뚜렷이 보였다. 봄날 몸을 푼 강물이 흐르듯 반원을 그리며 유유히 산모퉁이를 돌아 사라지는 철길의 끝을 보고 있노라면 마치도 모든 걸 다 마치고 평온하게 죽음을 맞이하는 어느 노년의 모습처럼 그것은 퍽이나 안온하고 평화로운 느낌을 주곤 하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 철길은 훨씬 앞당겨져서 끝나 있다. 수은등 불빛이 약해지는 부분에서부터 차츰 희미해져 가다가 이윽고 흐물흐물 녹아 버렸는가 싶게 철길은 더 이상 볼 수가 없다. 그 저편은 칠흑 같은 어둠이다. 어둠에 삼키워져 버린 철길의 끝이 오늘 밤은 까닭 없이 늙은 역장의 가슴 한구석을 썰렁하게 만든다. 그는 공연히 어깨를 떨어 보며 오른편 유리창 쪽으로 몸을 돌린다. 그쪽은 대합실과 접해 있는 이를테면 매표구라고 불리는 곳이다.

  역장은 먼지 낀 유리를 통해 대합실 안을 대충 휘둘러본다. 대합실이라고 해야 고작 국민학교 교실 하나 정도의 크기이다. 일제 때 처음 지어졌다는 그 작은 역사 건물은 두 칸으로 나누어져서 각각 사무실과 대합실로 쓰이고 있는 터였다. 대개의 간이역이 그렇듯이 대합실 내부엔 눈에 띌 만한 시설물이라곤 거의 없다. 유난히 높은 천장과 하얗게 회칠한 사방 벽 때문에 열 평도 채 못 되는 공간이 턱없이 넓어 보여서 더욱 을씨년스런 느낌을 준다. 천장까지 올라가 매미마냥 납작하니 붙어 있는 형광등의 불빛이 실내 풍경을 어슴푸레하게 드러내 주고 있다.

  지금 대합실에 남아 있는 사람은 모두 다섯이다. 한가운데에 톱밥 난로가 놓여져 있고 그 주위로 세 사람이 달라붙어 있다. 난로는 양철통 두 개를 맞붙여서 세워 놓은 듯한 꼬락서니로, 그나마 녹이 잔뜩 슬어 있어서 그간 겨울을 몇 차례나 맞고 보냈는지 어림잡기조차 힘들다. 난로의 허리께에 톱날 모양으로 촘촘히 뚫린 구멍 새로는 톱밥이 타들어 가면서 내는 빨간 불빛이 내비치고 있다. 하지만 형편없이 낡아 빠진 불빛이 그 난로 하나로 겨울밤의 찬 공기를 덥히기에는 어림도 없을 듯싶다.

  난롯가에 모여 있는 셋 중 한 사람만 유일하게 등받이 없는 의자에 앉아 있는데, 그러고 있는 것도 힘겨운지 등 뒤에 서 있는 사람의 팔에 반쯤 기댄 자세로 힘없이 안겨 있다. 그는 아까부터 줄곧 콜록거리고 있는 중늙은이로. 오래 앓아 오던 병이 요즘 들어 부적 심해져서 가까운 도회지의 병원을 찾아가려는 길이라는 것을 역장도 알고 있다. 등을 떠받치고 있는 건장한 팔뚝의 임자는 바로 노인의 아들이다. 대합실에 있는 다섯 사람 가운데에서 그들 두 부자만이 역장에겐 낯익은 인물들이다.

  그 곁에서 난로를 등진 채 불을 쬐고 있는 중년의 사내는 처음 보는 얼굴이다. 마흔은 넘었을까 싶은 사내는 싸구려 털실 모자에 때 묻은 구식 오버를 걸쳐 입었는데 첫눈에도 무척 음울해 뵈는 표정을 지니고 있다. 길게 자란 턱수염이며, 가무잡잡한 얼굴 그리고 유난히 번뜩이는 눈빛이 왠지 섬뜩하다. 오랜 세월을 햇볕 한 오라기 들지 않는 토굴 속에 갇혀 보낸 사람처럼 사내의 눈은 기묘한 광채마저 띠고 있다.

  그 셋 말고도 저만치 벽을 따라 길게 붙어 있는 나무 의자엔 잠바 차림의 청년 하나가 웅크리고 앉아 있다. 그리고 청년으로부터 약간 떨어진 곳에는 미친 여자가 의자 위에 벌렁 누워 있다. 닥치는 대로 옷을 껴입은 여자는 속을 가득 채운 걸레 보퉁이마냥 몸집이 퉁퉁하다.

  청년은 추운지 호주머니에 두 손을 찔러 넣은 채 어깻죽지를 잔뜩 웅크리고 있으면서도 무슨 까닭인지 난로 곁으로 갈 생각은 하지 않는 눈치다. 뭔가 골똘히 생각하는 표정으로 청년은 들여다볼 만한 것이라곤 아무것도 없는 시멘트 바닥을 뚫어져라 내려다보고 있다.

  톱밥이 부족할 것 같은데…….

  창 너머 그들을 하나하나 둘러보다가 문득 난로 쪽을 슬쩍 쳐다보며 늙은 역장은 중얼거리다. 불을 지핀 게 두어 시간 전이니 지금쯤은 톱밥이 거의 동이 났을 것이다.

  톱밥은 역사 바깥의 임시 창고에 저장해 놓고 있었다. 월동용 톱밥이 필요량의 절반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는 사실을 역장은 아까서야 알았다. 미리미리 충분한 톱밥을 확보해 두는 것은 김 씨가 맡은 일이었지만 미처 확인하지 못한 자신에게도 책임은 있다고 역장은 생각한다. 역원이라고 해야 역장이 자신까지 합해 기껏 세 명뿐이니 서로 책임을 확실히 구분 지을 수 있는 일 따위란 애당초 있을 턱이 없었다. 하필 이날따라 사무원인 장 씨는 자리를 비우고 없는 참이었다. 아내의 해산일이라고 어제 아침 고향인 K시로 달려갔으므로 그가 돌아올 때까지는 역장은 김 씨와 둘이서 고대로 야근을 해야 할 처지였다.

  하지만, 톱밥은 우선 당분간 창고에 남아 있는 것으로 이럭저럭 견디어 낼 수 있으리라. 대합실 난로는 하루 두 차례씩만 피우만 되니까.

  역장은 웅크렸던 어깨를 한번 힘차게 펴 보기도 하고 두 팔을 앞뒤로 흔들어 보기도 한다. 역시 춥긴 마찬가지다. 그새 손발이 시려 오기 시작했으므로 역장은 코를 훌쩍이며 엉금엉금 책상 앞으로 되돌아간다. 그러고는 사무실용으로 쓰고 있는 석유 난로를 마주하고 앉아 손발을 펼쳐 널었다.


■ 전체 줄거리

 역장은 30분이 지나도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며 대합실을 둘러본다. 대합실에는 모두 다섯 명이 기다리고 있다. 농부는 눈 오는 날에 병원에 가자는 아버지에게 짜증이 나다가도 죄스러운 마음이 든다. 중년의 사내는 감방에 있었던 허 씨가 생각난다. 청년은 얼마 전 학교에서 제적 처분을 받았다. 서울말을 하는 뚱뚱한 중년 여자와 화장이 짙은 처녀, 행상(行商)을 하는 아낙네 둘이 대합실로 들어왔다. 중년의 사내는 허 씨의 부탁으로 그의 칠순 노모를 찾으러 왔으나 이미 죽은 지 5년이 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뿐이었다. 청년은 집안의 희망이어서 부모와 형제들 앞에서 퇴학당했다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춘심이는 청년을 보면서 대학생이란 존재를 부러워한다. 서울에서 음식점을 하는 중년 여자는 주방에서 일하다 없어진 사평댁을 찾으러 왔는데, 사평댁은 남편이 죽어 아이들이 거지 신세가 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내려왔다고 했다. 중년 여자는 오히려 지니고 있던 돈을 다 주고 온 길이었다. 결국 열차는 두 시간이 지나서야 도착했다.

  대합실에 있던 승객들은 반가움보다는 차라리 피곤함과 허탈감에 젖은 모습으로 열차에 올라탔다. 역장은 열차가 출발할 때 아직 들어가지 않고 열차 난간에 위태로운 자세로 기대어 서 있는 오씨 아들을 보았다. 역 안에는 미친 여자가 난로 옆에서 자고 있었고, 역장은 톱밥을 더 가져다가 난로에 부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하며 사무실로 돌아가고 있었다.


■ 핵심 정리

• 갈래 : 현대 소설, 단편 소설

• 배경 : 1970~80년대 가상의 시골 간이역인 사평역 대합실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성격 : 서정적, 회상적, 성찰적, 현실 반영적

• 주제 : ① 산업화 시대의 다양한 인간 군상의 삶의 현실

          ② 소외된 인물들의 쓸쓸하고 고단한 삶과 그에 대한 따뜻한 애정

• 특징 : 

 ① 중심 인물을 따로 설정하지 않고 인물군을 통해 내면 풍경을 제시함

 ② 시골 간이역이라는 공간적 배경이 분위기와 주제를 암시함

 ③ 각각의 인물들의 시선과 회상으로 인물 형상을 제시함


■ 작품 해설 1

 이 소설은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읽은 작가가 그 시를 토대로 하여 쓴 작품이다. 시를 작품의 첫머리로 인용하고 있는 이 작품은 시와 동일한 공간에 여러 인물들을 등장시키고 이들의 사연을 통해 이야기를 진행시키고 있다. 이 작품은 가상의 공간이 사평역을 배경으로, 그곳 대합실에서 막차를 기다리는 아홉 사람의 쓸쓸한 내면 풍경을 그리고 있다. 기침을 하는 늙은 노인과 그의 아들인 삼십대 중반의 농부, 12년 만에 교도소에서 출감한 중년의 사내, 시위를 주도하다가 학교에서 제적당한 대학생, 서울에서 음식점을 운영하는 뚱뚱한 여자, 화장이 짙은 술집 작부, 행상(行商)하는 아낙네 둘, 그리고 미친 여자가 바로 그들이다. 추위를 녹이기 위해 형편없이 낡은, 작은 톱밥 난로 주위에 몰려든 사람들은 이 사회에서 소외되거나 버림받은 자들이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고 있는 이들은 1970~1980년대 우리나라의 산업화, 민주화의 과정에서 고통스러운 삶을 살아가는 이들의 전형일 것이다. 이러한 인물들의 어둡고 우울한 삶의 양상들은 하얀 눈발과 함께 소설의 암울한 배경을 잘 형상화하고 있다. 언제 올지 모를 막차를 기다린다는 설정 역시 인물들의 허무한 인생살이를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에서 기차역은 이중의 의미를 띤다. 즉, 어디론가 가기 위한 역이지만, 동시에 그것은 사람들마다 지나쳐온 과거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장소인 것이다. 이 작고 퇴락한 역을 덮치는 추위 속에서 웅크리며 옹송그리는 사람들에게 고향으로 가기 위한 막차는 편안한 휴식을 위한 마지막 바람과도 같은 것이다. 밤이 깊어 가면서 기다림은 지쳐 간다. 사람들은 저마다 과거의 삶에 대한 회한에 젖어든다. 각자의 삶을 돌아보는 시간은 난로의 불꽃과 창밖에 내리는 눈으로 깊은 내면성을 얻는다. 이 고단한 삶들을 위해 이들은 작은 불꽃만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하늘에서 내리는 눈은 이 가난함을 위로하는 듯한 분위기를 만들어 낸다. 이 소설의 마지막에서 기차는 이들에게 너무 늦게 온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소설은 1981년 《중앙일보》 신춘 문예 당선작인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소설로 형상화한 작품으로, 한 시골 간이역에서 막차를 기다리며 모여든 사람들을 잔잔한 어조로 서술하고 있다. 삶의 애환을 노래하는 쓸쓸하고 서정적인 시의 어조는 소설에서도 동일하게 나타나고 있다. 특별한 주인공이 있는 것이 아니라 난롯가에 모여 앉은 외롭고 서글픈 사람들 전체를 대상으로 하여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연민과 사랑의 감정이 화자의 시선을 통해 애틋하게 드러나고 있는 점도 같다. 시에서는 시적 화자 ‘나’를 통해, 소설에서는 간이역 ‘역장’의 시선을 통해 그 쓸쓸함과 고단함이 잘 배어나오고 있다.

 막차와 간이역이라는 소재는 서정적인 풍경과 이미지를 환기시키는 소재들이다. 막차에 의해 연상되는 시간적인 소멸감, 간이역에 의해 연상되는 외로움과 쓸쓸함이 소설 전체를 이끌고 가고 있기 때문이다. ‘눈 내리는 밤의 간이역’이야말로 쓸쓸하고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유발하며 각양각색의 소박한 인물들의 삶이 그 안에 녹아들어 있다. 기다려도 오지 않는 막차를 기다리는 아홉 명의 인물들을 통해 작가는 ‘산다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그들이 대합실 난롯가에 모여 앉아 각자 자신의 상념에 잠기며 고단한 삶을 되돌아보는 것은 1970년대에서 1980년에 사이 우리 사회의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받은 이웃들에 대한 연민이기도 하다.

 12년 동안이나 감옥에 있었던 중년 사내, 누가 자신을 알아볼까 두려워하는 술집 여자, 돈을 벌기 위해 식당을 운영하는 과부, 대학에서 제적당한 운동권 학생, 웅크리고 잠만 자는 미친 여자, 시골 마을마다 물건을 팔러 다니는 행상 아낙네들, 병든 아버지를 모시고 병원에 가는 농부 등의 모습은 우리네 삶이 현실적으로 매우 고단하고 복잡하다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그러나 무겁고 어두운 이들의 삶이 낯설고 서정적인 배경 속에 놓여짐으로써 얻어지는 아름다움은 이 작품이 가지는 독특한 효과이다. 운동권의 삶이든 술집 여자의 삶이든 모두 동등하게 가치 있는 것이라는 작가의 휴머니즘도 다소 무거운 주제를 부담스럽지 않게 독자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이는 작가의 서정적인 문체 덕분인데 이러한 문체는 작가의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과 서정적인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데 크게 기여한다.

 - 타임기획, 소설119플러스 6권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간이역’의 의미

 소외된 다양한 인물들이 힘겹게 삶을 살아가는 고안, 또는 힘겨운 삶의 과정에서 잠시 지난 삶을 성찰하는 공간으로 작용한다. 독자들에게는 이들의 이런 삶을 돌아보게 하면서 사회적으로 소외된 사람들의 삶에 대해 한번쯤 생각하게 해 주는 기회를 마련하는 공간이다.


 2. ‘눈’의 기능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분위기를 조성하는 일반적인 경우와는 달리, 막차를 연착하게 하는 장애 요인으로 작용하고 등장인물들의 마음을 더욱 춥고 쓸쓸하게 하며, 대합실 안 사람들에게 대합실 안과 밖에 대한 공간적 거리감을 느끼게 한다.


 3. ‘열차’의 상징적 의미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간절한 기다림의 대상으로서, 등장인물의 삶의 행복, 또는 삶의 목표 성취에 대한 기다림이라는 의미의 상징물이다. 


■ 작가 소개

임철우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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