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천요(夢天謠) - 윤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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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현대어 풀이

생시런가 꿈이런가 천상에 올라가니
옥황은 반기시나 뭇 신선이 꺼리는구나.
두어라 아름다운 자연에서 한가롭게 지내는 것이 나의 분수에 옳도다.

풋잠에 꿈을 꾸어 천상 십이루에 들어가니
옥황은 웃으시되 뭇 신성이 꾸짖는구나.
어즈버 백만 억 창생의 일을 어느 사이에 물어보리.

하늘이 이지러졌을 때 무슨 기술로 기워 냈는고?
백옥루 중수할 때 어떤 목수가 이루어 냈는고?
옥황께 여쭤보자 하였더니 다 못하여 왔도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연시조
• 성격 : 우국적, 우의적, 비판적
• 주제 : 연군과 우국의 정
• 특징 :
 ① 옥황과 신선을 임금과 신하에 빗대어 표현
 ② 대구와 대조를 활용하여 화자의 처지를 드러냄
 ③ 영탄적 표현과 설의적 표현을 사용하여 현재의 상황에 대한 안타까움을 드러냄
 ④ 구체적인 공간을 설정하여 화자의 바람과 좌절(천상계에서 화자의 이상이 좌절됨)을 형상화 함
• 구성 : 
 제1수 : 임금과의 만남과 안분지족의 추구
 제2수 : 백성을 향한 선정(善政)의 포부와 좌절
 제3수 : 자신의 뜻을 펼칠 수 없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

 

3.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작가인 윤선도가 효종의 아우인 인평 대군에게 보낸 전체 3수의 연시조로, 임금에 대한 변함없는 사랑과 우국(憂國)의 정을 노래하고 있다. 윤선도는 효종과 인평 대군의 사부(師傅)를 지낸 적이 있는데, 1652년 효종은 스승에 대한 예우 차원에서 66세인 윤선도를 정사품 벼슬에 임명한 지 두 달 만에 정삼품의 벼슬에 임명하였다. 그러자 이러한 인사가 불공정한 것이라며 많은 이가 탄핵 상소를 올리게 되고 결국 윤선도는 면직되는데, 이 작품은 그가 면직되고 난 뒤에 지은 것으로 추정된다.

- EBS 수능특강 해설 참고

4. 작품 해설 2

 1652년(효종 3) 윤선도(尹善道)가 지은 연장체 단가로 모두 3수. 『고산유고(孤山遺稿)』권6 하(下) 별집에 실려 있다. 「어부사시사」를 지은 이듬해 성균관 사예(司藝)로 특소(特召)되어 승지에 제수(除授)되었으나, 주위 신하들의 심한 시기와 노환으로 인하여 물러나 양주(楊州)고산(孤山)에 머물러 있을 때 지은 작품이다.
 「몽천요」에는 발(跋)과 함께 한역가가 실려 있다. 발에 보면, “무릇 내가 탄식하고 영탄하는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것이 소리로 나와 길게 말하니 동학들이 희희거리며 놀리거나 꾸짖음이 어찌 없으리요마는, 내가 진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이른바 ‘내 옛사람을 생각하여 진실로 내 마음을 알았도다’라는 것이다.”라고 하여 작품을 짓게 된 심정과 자신의 처한 환경을 적고 있다.
 제1수에서는 꿈엔지 생시엔지 올라간 백옥경에서 옥황은 자신을 반겨주나 뭇 신선은 꺼린다고 하며, 그렇다면 다 그만두고 다시 오호연월(五湖烟月: 고향의 경치가 빼어남을 말한 것)로 돌아가겠노라고 하였다. 뭇 신선의 꺼림 속에 있느니 차라리 강호 속에 묻혀 시비를 잊고 지내는 것이 훨씬 낫겠다는 것이다.
 제2수는 제1수의 부연·확장이며 은거지로 물러난 현재의 처지를 더욱 안타까운 심정으로 노래하였다. 제1수의 옥황의 반김이 웃음으로, 군선의 꺼림이 꾸짖음으로 바뀌어 태도의 강화가 드러난다. 끝 구에서는 백억만 창생에 대한 근심을 말하여 결국 옥황은 임금이고, 군선은 조정의 신하들임을 구체적으로 드러내었다.
 제3수에는 군선은 보이지 않고 옥황만 나타난다. 역시 우의적 표현으로 현실에 커다란 환란이 닥치거나 나라가 누란의 위기에 처하였을 때 어떻게 하겠느냐고 임금에게 물어보려 하였으나 채 묻지도 못하고 그냥 돌아왔다는 것이다.
 이 작품은 17년 만에 “머도록 더옥 됴타”던 인간 세상에 돌아왔으나 여전히 시기와 헐뜯음으로 그를 맞이하는 세상에 대한 허탈한 마음을 담아 노래한 것이다. 은거 끝에 현실에 돌아와서 받는 실망과 좌절감을 우의적인 언어로 잘 표현하였다. 지은이가 겪는 강호와 현실 사이에서의 이러한 갈등은 「어부사시사」에서의 강호가도(江湖歌道)의 표방과 함께 조선조 사대부들의 처사접물(處事接物: 일을 처리하고 사람을 응대하는 것)을 이해하는 데 유익한 시사를 준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5. 심화 내용 연구

1. ‘몽천요’의 창작 배경(EBS수능특강 사용설명서 참고)

 작가인 윤선도는 인조 반정 이후 42세이던 인조 6년(1628년)부터 46세이던 인조 10년(1632년)까지 봉림 대군(효종)과 인평 대군의 사부(師傅)를 맡은 적이 있는데, 그의 나이 66세이던 효종 3년(1652년) 정월에 정사품의 성균관사예로 임명되고, 이어서 3월에 특명으로 정삼품 당상관인 승정원 동부승지에 임명된다. 그러자 윤선도와 반대편에 있던 서인들은 윤선도에 대한 효종의 인사는 스승을 예우하는 사사로운 정에 얽매인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 반대하는데, 이로 인해 윤선도는 4월에 면직된다. 이후 윤선도는 서울에서 30리쯤에 있는 고산에 머무르며 ‘몽천요’를 짓고, 5월에는 다음과 같이 ‘몽천요’를 짓게 된 사정을 인평 대군에게 보낸다.

 대저 내가 탄식하고 읊조리는 나머지 나도 모르게 그것이 소리로 나와 갈게 말하니 동학들이 희희거리며 놀리거나 꾸짖음이 어찌 없으리요마는, 내가 진실로 그만둘 수 없는 것은 이른바 ‘내 옛사람을 생각하여 진실로 내 마음을 알았도다’라는 것이다.

 이처럼 ‘몽천요’는 가까이에서 임금을 모시면서 백성들을 위한 선정을 펼치고 싶으나, 자신을 반대하는 무리들로 인해 그러한 바람을 실현할 수 없는 정치 현실에 대한 윤선도의 안타가움으로 인해 탄생한 작품이다.

 

6. 작가 소개

윤선도 – 국어국문학사전

 

윤선도

조선 중기의 시조작가이자 문신. 서울 출생. 본관은 해남(海南). 자는 약이(約而), 호는 고산(孤山) 또는 해옹(海翁).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을 지낸 유심(惟深)의 아들이며, 강원도관찰사를 지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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