묘비명 - 김광규


■ 본문

한 줄의 시는커녕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은 바 없이

그는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며

많은 돈을 벌었고

높은 자리에 올라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 

그리고 어느 유명한 문인이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여기에 썼다.

비록 이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불의 뜨거움 굳굳이 견디며

이 묘비는 살아남아

귀중한 사료(史料)가 될 것이니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


■ 핵심 정리

• 갈래 : 서정시, 자유시

• 성격 : 비판적, 풍자적

• 제재 : 묘비명

• 주제 :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지배하는 현실에 대한 비판

• 특징 :

 ① 대립적 소재의 사용으로 주제를 강화함.

 ② 정신적 가치가 경시되는 현실을 반어적으로 풍자함.


■ 작품 해설 1

 이 시는 물질적 가치 때문에 정신적 가치가 퇴색해버린 시 대상을 비판하고 있다. 사람들은 단 한 줄의 시나 한 권의 소설을 읽지 않고도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 한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도 있다. 이렇든 근본적으로 외면되고 있는 정신적 가치와 현대인이 추구하는 물질적 가치의 대립을 통해 죽은 ‘그’ 사람이나 ‘그’를 기리는 묘비명을 써 주고 있는 시인 모두를 풍자하고 있다. 또한 세상이 잿더미가 된다 해도 묘비는 살아남을 테지만 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인가라는 질문을 통해 시인의 역사적 사명에 대해 자문하고 있다. 이처럼 이 시는 정신적 가치가 경시되는 현실을 비판하고, 세속적 가치에 종속된 문인을 풍자하며 시인의 바람직한 역할을 촉구하고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시는 물질적 가치가 삶의 전 과정을 지배하고 일체의 정신적 가치가 사라져버린 현실을 비판적으로 형상화한 작품이다. 이 시가 자본주의 사회 자체를 비판적으로 조망하고 있는 것인지 부정과 부패가 만연하고 모든 가치를 오직 화폐로만 계산하는 특정한 사회를 비판하는 것인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조금 추상적으로 말해서 물질적 가치가 정신적 가치를 압도하는 사회에 대한 총체적인 비판으로 읽을 수도 있을 듯하다. 시인은 1~2행에서 ‘시’와 ‘소설’을 정신적 가치를 상징하는 객관적 상관물로 등장시키고 있다.


 이 시에는 어떠한 정신적 가치도 추구한 적이 없는 ‘그’라는 인물이 등장한다. 시인에 따르면 그는 단 한 줄의 시도,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지 않았으나 평생을 행복하게 살고 많은 재물을 모았으며, 심지어 높은 자리에 올랐다. 시의 제목이 ‘묘비명’인 것으로 미루어 세상의 추앙을 받던 ‘그’가 죽었다.


 그런데 이 시에는 한 가지 아이러니가 존재한다. 그것은 한평생 물질적인 가치를 추구하며 살았던 ‘그’의 묘비명을 정신적 가치의 상징적인 보존자인 “유명한 문인”이 작성했다는 사실이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이렇게 질문할 수 있다. 왜 정신적 가치를 추구하는 삶을 살았던 “유명한 문인”이 물질적 가치만을 최고로 간주하며 살았던 ‘그’의 묘비명을 썼을까? 이 시의 내용으로 미루어 짐작컨대 문인이 썼다는 묘비명은 ‘그’의 업적과 삶을 칭송하는 내용들이 핵심을 이루고 있는 듯하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는 9~12행에서 훗날 이 묘비가 역사의 “귀중한 사료”로 사람들에게 전해질 그날을 염려한다. 왜냐하면 묘비의 내용은 ‘그’의 삶과는 전혀 닮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그것을 날조, 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화자는 ‘역사’와 ‘문학’의 존재 이유에 대해 질문하고 있다.


 정신적 가치의 상징인 ‘역사’와 ‘시인’, 즉 문학의 존재 이유는 그것이 부정적인 현실을 즉각적으로 변화시킬 힘을 갖고 있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기록’의 영속성에 있다. 역사는 종종 승자에 의한, 승자를 위한 기록으로 전락하지만, ‘기록’의 영속성은 그런 거짓 역사의 거짓됨을 기록으로 증언한다. 하지만 이 시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화자는 작품의 마지막에서 “역사는 도대체 무엇을 기록하며/시인은 어디에 무덤을 남길 것이냐”라고 개탄하고 있는데, 이는 ‘역사’와 ‘시’가 위에서 언급한 증언과 기록의 역할을 모두 잃어버렸다는 데서 비롯된다.


 여기에서 우리가 읽어야 할 것은 역사와 문학이 기득권, 즉 ‘그’의 삶을 날조하는 데 동원되는 부정적 현실에 대한 시인의 비판적 태도이다. 하지만 현실에 대한 이런 비판의 이면에는 ‘역사’와 ‘문학’이 무엇을 위해, 어떻게 존재해야 하는가에 대한 시인의 태도가 내재되어 있다.

-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현대문학, 2013.11. 인문과 교양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묘비명의 상징적 의미

 묘비명은 고인을 기념하기 위해 묘비에 명문이나 시문을 새긴 것으로, 그 사람의 삶과 추구했던 가치관을 담고 있다. 하지만 묘비명과 고인의 행적이 반드시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특히 돈과 권력을 거머쥐었던 사람들일수록 엄청난 호화 분묘와 거창한 묘비명을 남겨서 욕된 이름을 영원히 기억시키려고 한다. 이 시에서도 ‘그’의 묘비명이 과연 물질적인 삶을 화려하게 살다 간 ‘그’의 실제 삶과 어울리는 것인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한다. 따라서 이 시에서 묘비명은 물질적 가치를 추구하는 사람들의 헛된 욕망이자 현실과 타협한 문인의 타락한 정신을 상징한다.


2. 시인의 역사적 사명

 이육사는 시인으로서 당대 현실의 문제를 충실하게 시에 반영하였다. 이처럼 시인은 현실을 올바로 인식하고, 현실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투사가 되어야 한다. 시는 행동이자 참여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시에서 시적 화자가 말하는 시인의 사명은 현실의 문제가 무엇인지를 밝히고, 무엇이 바람직한 가치인지를 역설하여 담아내는 것이다.


3. 대립적 소재의 사용

 이 시는 대립적 소재의 사용으로 주제를 강화하고 있다. 즉, ‘시’와 ‘소설’은 문학의 한 형태로서 정신적인 가치를 대표하며, ‘그’와 관련된 ‘많은 돈’과 ‘높은 지위’는 물질적 가치를 의미한다.


4. 반어적 표현

 반어는 실제로 말하고자 하는 바와 반대로 말하는 경우를 뜻한다. 이 시에서 화자는 ‘그’의 삶을 반어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1연에서 ‘그’는 한 줄의 시나 단 한 권의 소설도 읽지 않았지만 많은 돈을 벌고 높은 자리에 올라 행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하지만 이처럼 정신적 가치를 경시하고 물질적 가치만 중시한 사람이 진정으로 행복한 삶을 살았을 리는 만무하다. 게다가 그런 삶을 산 이에게 명색이 ‘시인’이라는 사람이 ‘훌륭한’묘비명을 써 주었다는 것은 더욱 아이러니하다. 따라서 시인이 ‘그’를 두고 ‘이처럼 훌륭한 비석을 남겼다’라고 말하는 것은 그의 삶을 담은 묘비명이 결코 훌륭할 수 없다는 의미를 반어적으로 드러낸 것이다.



■ 작가 소개

김광규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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