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설씨녀는 율리(栗里)의 평민 여성이다. 비록 한미하고 고단한 집안이지만, 용모가 단정하고 마음과 행실이 의젓하였다. 보는 이들이 그 아름다움에 반하지 않는 이가 없었지만 감히 범접하지 못하였다. 진평왕 때에 그 아버지의 나이가 많은데도 정곡(正谷)에서 수자리* 살 차례가 되었는데, 딸은 아버지가 노쇠하고 병들었으므로 차마 멀리 떠나보낼 수 없고, 또 여자의 몸이라 대신해 갈 수도 없어, 극심하게 번민하기만 하였다. 이때 사량부(沙梁部)의 젊은이 가실(嘉實)이 비록 가난하고 궁핍하나 마음가짐은 곧은 남자로서, 일찍부터 마음속으로 설씨녀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면서도 감히 말하지 못하였다. 설씨녀가 아버지가 늙어 종군하게 된 일을 근심한다는 말을 듣고 가서 말하기를 “내가 한낱 용렬한 남자이지만 일찍부터 의지와 기개로써 자처하여 왔으니, 불초한 몸으로 아버님 일을 대신하기를 원한다.”라고 하였다. 설씨녀가 매우 기뻐하여 들어가 아버지에게 고하였다.
아버지가 이끌어 말하기를 “그대가 이 노인을 대신하여 가려 한다 하니 기쁘고도 송구스러운 마음 금할 수가 없다. 무엇으로 갚을까 생각하는데, 만일 그대가 나의 어린 딸을 어리석고 누추하다 하여 버리지 않는다면 아내로 삼아 그대를 받들게 하고 싶다.”라고 하니, 가실이 두 번 절하고 “감히 청할 수 없는 일이거늘, 진정으로 바라는 바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가실이 물러 나와 혼인할 기약을 청하니 설씨녀가 말하기를 “혼인은 인간의 윤리라 창졸간에 이루어질 수 없습니다. 내가 마음으로 허락한 이상 죽어도 변하지는 않겠으니, 그대가 수자리 살러 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후에, 날을 받아 성례하여도 늦지 않겠습니다.” 하고, 거울을 가져다 절반씩 나누어 각기 한 조각씩을 가지며 말하기를 “이것으로 신표를 삼는 것이니 후일에 합하여 봅시다.”라고 하였다. 가실은 말 한 필을 가지고 있었는데, 설씨녀에게 이르기를 “이것은 천하의 좋은 말이니, 후에 반드시 쓸 때가 있을 것이오. 지금 내가 간 뒤에 이 말을 기를 사람이 없으니 간직해 두었다가 소용이 되게 하시오.” 하고 작별하고 떠났다.
그런데 마침 나라에는 사유가 있어 군사들을 교대시키지 않았기 때문에 가실은 6년이 되도록 돌아오지 아니하였다. 아버지가 딸에게 이르기를 “처음에 3년으로 기약을 하였는데, 지금 기한이 넘었으니 다른 집으로 시집가야 하겠다.”라고 하였다. 설씨녀가 “예전에 아버지를 편안케 하기 위하여 가실과 굳게 약속하였고, 가실도 그 약속을 믿었기 때문에 종군하여 여러 해 동안 배고픔과 추위를 견디고 있습니다. 하물며 국경에 바싹 가 있어 손에 병기를 놓지 않고, 범의 아가리에 가까이 있는 것처럼 언제나 물릴까 두려워하고 있는데, 신의를 저버리고 식언하는 것이 어찌 인정이겠습니까? 아버지의 명령은 감히 끝까지 따르지 못하겠사오니 다시 말씀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아버지는 자신이 늙고 딸이 장성했지만 배필이 없다고 하여, 억지로 시집을 보내려 하여 비밀히 마을 사람과 혼인을 약속하였다. 이미 날을 정하여 그 사람을 맞아들이니, 설씨녀는 굳게 거절하고 몰래 도망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마구간에 가서 가실이 두고 간 말을 보고 크게 한숨 쉬고 눈물을 흘렸다. 이때에 가실이 교대되어 왔는데 뼈만 남도록 마르고 옷이 남루하여 집안사람들도 모르고 다른 사람이라고 하였다. 가실이 바로 앞에다 쪼개진 거울을 던지니, 설씨녀가 받아 가지고 소리 내어 울었으며, 아버지와 집안사람들도 모두 기뻐하였다. 마침내 다른 날을 정하여 혼인하고 일생을 해로하였다.
2. 핵심 정리
· 갈래 : 설화
· 성격 : 사실적, 교훈적, 낭만적
· 주제 : 가실과 설씨녀의 사랑과 신뢰
· 특징 :
① 발단, 전개, 위기, 절정, 대단원이라는 5단 구성이 드러남.
② 신물설화의 내용이 적용됨.
3. 작품 해설 1
삼국시대 가실과 설씨녀가 고난을 극복하고 혼인하게 되는 내용의 설화. 신물설화(信物說話)로, 반으로 쪼개었던 거울을 맞추어서 두 주인공이 재상봉하게 되는 이야기이다. ≪삼국사기≫ 권48 열전 설씨조(薛氏條)에 전한다.
신라 진평왕 때 경주에 설씨라는 노인이 딸을 데리고 살고 있었다. 효성이 지극한 설씨녀는 병역에 나가야 할 늙은 아버지를 대신하여 변방으로 가는 이웃의 가실이라는 소년과 장래를 약속한다. 그리하여 설씨녀는 거울을 반으로 쪼개어 서로 나누어 가지고 병역기한인 3년을 약속하고 헤어진다. 가실은 설씨녀에게 말 한필을 선물로 준다. 병역을 마치고 돌아올 때가 되어도 가실은 돌아오지 않자 설씨는 딸을 다른 곳으로 시집보내려 한다. 그러나 설씨녀는 반대하며 기다린다. 마침내 6년 만에 가실이 돌아왔으나 몰골이 너무 초라하여 알아보지를 못하였다. 둘은 서로 거울을 맞추어보고 가실인 줄 알고 혼인한다는 내용이다. 거울 대신 반지가 신물이 되는 이야기도 많이 분포되어 있다.
신물은 여인의 정절을 상징하기도 하는데, 거울을 신물로 하는 모티프는 그 뒤 문학작품의 소재로 자주 등장하게 되며, 이광수의 〈가실〉이라는 단편소설을 낳게 하기도 하였다.
‘설씨녀’는 도미의 처, 온달의 처 등 『삼국사기』 열전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성처럼 아내의 처지로 그려진다. 김부식의 유가적 입장을 여성의 입전(立傳) 의식에서 분석한 연구 성과들이 대부분 ‘열(烈)’ 의식을 주목하는데, 이는 조선 후기에 등장하는 이념화된 열행(烈行)과는 차이를 보이는 것으로 해석된다. 남녀 간의 인간적 신의(信義)를 강조하는 설씨녀의 행동은 여성에게만 국한된 열절(烈節)로 해석하기보다 인간이면 누구나 지켜야 하는 보편적 윤리의 문제로 보아야 한다.
이 설화는 『삼국사기』 열전 중 인물전으로 기록되었고, 이는 편찬자인 김부식의 유학자적 입장이 개입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정혼자에 대한 신의를 지킨 설씨녀의 열행 말고도 스스로 자신을 지켜 내고 아버지의 그릇된 결정을 교정하는 주체적인 행동에도 주목해야 한다. 조선시대 기록에 보이는 열녀의 행위가 이념의 테두리 안에서 평가되었던 것과는 달리 이 설화에서는 인간의 보편적 윤리인 신의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한국민속문학사전 참고
4. 작품 해설 2
이 작품은 『삼국사기』에 「설씨조(薛氏條)」로 수록되어 전해지는 이야기로, 가실과 설씨녀가 고난을 극복하고 혼인을 하게 된다는 내용의 설화이다. 반으로 쪼개었던 거울을 신표로 하여 헤어졌던 남녀 주인공이 다시 만난다는 점에서 신물(信物) 설화의 특징도 지니고 있다.
- 수능특강 해설 참고
5. 심화 내용 연구
1. 설화에 나타난 사랑 이야기의 의미
설씨녀를 다른 곳에 시집 보내려던 날, 해골처럼 마르고 옷도 남루한 가실이 나타났다. 가실의 희생에 설씨녀가 기다린 것은 당연한데 아버지는 의리를 버리려 했다. '김현감호'에서 두 남녀는 부당한 이유로 파탄에 이르자, 여자가 자기를 희생시켜 남자를 영화롭게 했다. '수삽석남'에서는 부모가 반대하기에, 살아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이므로 죽음을 겪으면서 사랑을 성취한다. 설화는 이와 같이 어떤 장애를 통해서 무엇이 바람직하고 옳은 것인가를 깨우쳐 준다. 사랑으로 맺어진 대등한 관계는 장애 요인을 극복해야 한다는 사상을 이 설화는 표현하고 있다.
2. ‘거울’의 상징성(수능특강 사용설명서 참고)
일반적으로 ‘거울’은 ‘귀한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수호신, 통치자, 진리, 광명 등을 상징하거나, ‘반사’의 의미로 사용될 때에는 자아성찰, 자아 분열 등의 상징성을 갖기도 한다. 또한 ‘쪼갤 수 있다’는 점을 부각하였을 때에는 사랑이나 이별의 징표로 사용되기도 한다. 이 작품에서는 ‘거울’은 가실과 설씨녀의 사랑의 징표이자 행복한 결말을 위한 신표로 사용되고 있다.
3. 등장 인물
- 설씨녀 : 비록 가난한 평민 출신의 여인이지만 평소의 행실이 매우 도덕적이고 바르며, 단정하여 주변 사람들로부터 칭송을 받는다. 아버지를 위해 가실과의 결혼을 약속하고 끝까지 가실에 대한 신의를 지켜 결국에는 가실과 혼인, 해로한다.
- 설씨녀의 아버지 : 자신의 병역 의무를 대신하는 가실에게 딸을 아내로 삼아 달라고 부탁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가실의 소식이 없자 딸과 가실의 신의를 무시하고 몰래 다른 사람과 혼인 시키려 한다.
- 가실 : 가난한 평민 출신이지만 뜻이 곧고 기개가 있는 인물이다. 설씨녀의 아버지를 위해 대신 병역의 의무를 다하고 고생 끝에 되돌아와 설씨녀와 혼인, 해로한다.
6. 엮어 읽기
이광수 - 가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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