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생전 - 이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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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심생은 서울의 양반이다. 약관의 나이에 용모가 매우 준수하고, 풍정이 넘쳤다. 

 어느 날 운종가에 나가 임금님의 거동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길이었다. 건장한 여종이 자주색 명주 보자기로 한 처녀를 덮어씌워 등에 업고, 머리를 땋은 여종은 주홍색 비단신을 들고 뒤를 따르는 모습이 눈에 들어 왔다. 어림짐작으로 보자기 안의 몸을 재어보니 어린 여자 아이는 아니었다. 드디어 심생은 바짝 붙어 뒤를 쫓았다. 멀찍이 따르다가 소매로 스치며 지나가기도 하면서 눈은 한 순간도 그 보자기를 떠나지 않았다. 걸음이 소광통교(서울의 지명)에 이르렀을 때, 갑자기 회오리바람이 앞에서 일어나 자주색 보자기를 반이나 들추었다. 아니나 다를까 처녀가 나타나는데 복숭아 빛 발그레한 뺨에 버들가지 같은 가는 눈썹, 초록 저고리에 다홍치마, 연지분이 몹시 고와 설핏 보아도 절색이었다.

 처녀도 보자기 속에서 어렴풋하게 아름다운 소년이 쪽빛 두루마기에 초립을 쓰고, 좌우 이쪽저쪽으로 따라오는 것을 보고 있었다. 추파(秋波)를 들어 보자기 밖의 소년을 한참 주시하던 중에 보자기가 걷히고 버들 같은 눈과 별과 같은 눈동자 네 개가 부딪쳤다. 놀라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했다. 보자기를 당겨 다시 덮어쓰고 자리를 떴다.

 심생이 어찌 그대로 놓치겠는가! 곧장 뒤를 쫓아갔다. 소공주동(서울의 지명) 홍살문 안에 이르러 처녀는 중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심생은 망연자실하여 한참을 배회하다가 이웃 노파를 붙들고 자세히 알아보았다. 늙어서 은퇴한 호조 계사(회계원)의 집이요. 딸 하나만을 두었고, 나이는 열 예닐곱이요,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는 등등. 처녀가 거처하는 곳을 물었더니 노파는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좁은 골목을 따라가다 보면 회칠한 담이 하나 나올 거유. 담 안에 작은 집이 한 채 있는데 바로 처자가 거처하는 곳이라우.”

노파의 말을 듣고 난 심생은 아무리 해도 잊을 수가 없었다. 저녁이 다가오자 집에서 거짓말을 꾸며 댔다.

 “서당 친구가 저랑 밤을 같이 보내자고 하니 오늘 밤부터 가볼게요.”

 드디어 인정(人定)이 되기를 기다려 그 집으로 가서 담을 넘었다. 초승달이 어스름 빛을 드리운 창밖에는 꽃과 나무들이 제법 아담하게 가꾸어져 있고, 창호지에 비치는 등불은 아주 환하였다. 벽에 등을 대고 처마 밑에 앉아서 숨을 죽이고 기다렸다. 방 안에는 여종 둘이 함께 있었다. 처녀는 나직한 목소리로 언문 소설을 읽는 중이었는데 꾀꼬리 새끼가 우는 듯 낭랑하게 들려왔다.

 삼경 무렵, 여종들은 깊은 잠에 빠져 들었다. 처녀는 그제야 "훅!" 등불을 끄고서 잠자리에 들었다. 하지만 오랫동안 잠을 이루지 못하고 무슨 고민이라도 하는 듯 몸을 뒤척거렸다. 심생은 잠이 들 리도 없었고 숨을 낼 수도 없었다. 새벽종이 울릴 때까지 그대로 있다가 담을 타고 나왔다.

 그로부터 일과로 날이 저물면 가서 파루가 치면 돌아오곤 했다. 그렇게 한 지 스무날이 되었어도 심생은 조금도 게으름을 피우지 않았다. 처녀는 처음에는 소설도 읽고 바느질도 하며, 한밤에 등불이 꺼지면 잠도 잤으나, 번민하여 잠을 이루지 못하기도 하였다. 예니레를 넘기자 "몸이 편치 않다."라고 말하고 겨우 초경(初更)인데도 베개를 베고 누워서는 자주 손을 던져 벽을 쳤고, 긴 한숨 짧은 탄식이 창을 넘어 들려왔다.

  하루하루 밤을 보낼 적마다 심해지던 스무날째 저녁, 처녀는 홀연히 마루 뒤쪽으로 나와서 벽을 따라 돌아 심생이 앉아 있는 장소에 이르렀다. 심생은 깜깜한 어둠 속에서 불쑥 일어나 처녀를 잡았다. 처녀는 조금도 놀라지 않고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도련님은 소광통교에서 만났던 분이 맞지요? 소녀는 도련님이 여기를 찾아오신 지 벌써 스무날인 것을 잘 알아요. 저를 잡지 마세요. 소리를 지르기만 하면 다시는 여기를 나가지 못해요. 저를 놓아주시면 제가 틀림없이 이 문을 열어 맞이할 거예요. 어서 저를 놓아요.”

 심생은 곧이듣고 뒤로 물러서서 기다렸다. 처녀는 다시 빙 돌아서 방에 들어갔고, 그 다음에 여종을 불러 분부하였다.

 “어머니한테 가서 큰 주석 자물쇠를 달래서 갖고 오너라. 밤이 아주 캄캄하여 겁이 난다.”

 여종이 안방으로 가더니 오래지 않아 자물쇠를 갖고 왔다. 처녀는 드디어 약속한 뒷문에다 문고리를 아주 분명하게 걸고 손으로 자물쇠를 채우되 일부러 "철거덕!" 거는 소리를 냈다. 그리고는 바로 등잔불을 껐다. 정적에 쌓여 잠이 깊이 든 듯했으나 실은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하략) 


■ 핵심 정리

․ 갈래 : 고전소설, 전(傳)

․ 성격 : 비극적

․ 시점 : 전지적 작가 시점

․ 배경 : 조선시대, 종로

․ 제재 : 신분이 다른 두 남녀의 사랑

․ 특징 : 

 ① 이야기에 대한 작가의 논평이 덧붙음

 ② 혼자 장애 모티브가 나타남

․ 주제 : 신분제의 속박으로 인한 남녀의 비극적 사랑

․ 구성 :

 발단 : 심생이 종로로 어가 행렬을 구경하러 갔다가 보자기에 싸여 계집종에게 업혀 가는 소녀를 보고 따라감. 회오리 바람이 불어 젖혀진 보자기 틈으로 소녀의 얼굴을 보았고, 눈이 마주쳤지만 소녀는 다시 보자기로 가리고 집으로 돌아감. 심생은 소녀를 따라가 그녀의 집 이웃 노파에게 그녀에 대해 물어 신상을 알아냄.

 전개 : 심생은 소녀의 집 담을 넘어 들어가 그녀의 방 밖에서 밤을 새우고 새벽에 돌아감. 소녀는 심생이 매일 밤 방 앞에 와 있는 것을 알고 고민함. 스무 날째 되는 날 소녀는 방을 나와 심생에게 갔고, 심생은 소녀를 붙잡았으며, 소녀는 거짓말을 하여 심생을 단념하게 하려 함.

 위기 : 심생은 변함없이 스무 날 동안 문밖에서 기다렸고, 서른 날째 소녀는 심생을 자기 방으로 데리고 들어감. 소녀는 부모님을 설득해 허락을 받고 심생과 부부의 인연을 맺음.

 절정·결말 : 심생은 자신의 가족들 몰래 소녀를 만났으나 결국 가족들이 알게 되어 북한산으로 가게 됨. 소녀가 심생이 머무는 선방으로 편지를 보내와 자신의 죽음을 알림. 심생은 실의하여 문과를 포기하고 무인으로 살다 요절함. 매화외사(梅花外史)의 평

․ 의의 : 신분의 차이 때문에 사랑을 이루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많이 있으나 작품 결말에 그려진 심생의 죽음은 인상적이다. 또 주인공 여자는 춘정(春情)에 들뜬 심생을 슬기롭게 거절하기도 하고, 자신의 뚜렷한 주관으로 사랑을 받아들이기도 하며, 신분 때문에 겪은 불우한 현실을 토로함으로써 자신도 떳떳한 개체적(個體的) 인간임을 선언하기도 한다. 이같이 자신의 삶에 적극적이면서도 강한 의지를 보이는 여성상은 조선 후기의 새로운 사회상을 짙게 반영하는 것이다. 실제로 이옥은 〈이언 俚諺〉에서 당대 여성의 섬세한 감정을 그려내고 있는데 〈포호처전 捕虎妻傳〉에 나오는 숯장사의 아내에게서도 이러한 면을 발견할 수 있다. 이 작품은 〈이생규장전 李生窺墻傳〉 또는 〈춘향전〉을 연결시켜주는 문학사적 의의를 갖는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 작품 해설

 조선 정조 때에 이옥(李鈺)이 지은 전(傳). 김려(金錤)가 편찬한 ≪담정총서 捻庭叢書≫ 권11 〈매화외사 梅花外史〉에 실려 있다. 그의 전(傳) 21편 중 유일하게 신분이 다른 두 남녀의 애정을 소재로 입전(立傳)한 작품이다. 〈심생전〉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서울의 사족(士族) 집안에서 태어난 심생(沈生)이 우연히 길을 가다가 호조계사(戶曹計士)로 노퇴한 중인(中人)의 딸과 눈이 맞아 뒤를 쫓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된다. 심생은 매일 밤 담장을 넘어 처자의 방문 앞에 기다리기를 한 달을 한 뒤에 뜻을 이루었다.

 그러나 심생의 부모가 이를 알고 그를 북한산 산사로 공부하러 보냈다. 그녀는 심생을 그리워하다가 끝내 병이 들었다. 죽음이 임박하여 심생에게 편지를 보내어 하직하고는 죽었다. 그녀의 죽음을 뒤늦게 안 심생은 글공부를 버리고 무과에 급제하여 금오랑(金烏郞)에 올랐으나 요절하였다.

 〈심생전〉의 서술자는 사평(史評)에서 이 이야기를 12세 때에 시골 학당에서 선생으로부터 들었다. 선생은 심생과 동창으로 절에서 편지를 받았을 때에 함께 있었다고 한다.

 이옥은 이 내용이 실재한 것임을 밝히고, 정사(情史)에 추록하기 위하여 쓴다고 하였다. 또, 풍류낭자의 일을 본받게 하려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모든 일에 대하여 진실로 얻어야겠다고 마음먹으면 못할 일이 없음을 일깨워 주려고 들려준 것이라는 교훈성을 내세우고 있다.

 〈심생전〉은 서술자의 이러한 의도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또 다른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우선 두 남녀의 신분갈등으로 인한 혼사장애 모티프는 조선 후기 신분질서의 동요라는 사회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언문소설을 즐겨 읽었다는 것을 통해서 당시 국문소설 독자층은 여주인공과 같은 부유한 중인이나 상인의 부녀자였음을 알게 한다.

 〈심생전〉은 한 인물의 성격을 확인하기 위한 행적의 삽화식 서술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한 사건의 시말을 장면 제시적으로 서술을 하여 서술의 야담취향성을 보여 준다. 사건의 결말이 설화나 소설과는 달리 비극적인 것은 사실에 입각해서 기록해야 하는 전(傳)의 장르적 성격 때문이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매화외사(梅花外史)’ 평결 부분의 의미

 작가 이옥은 ‘신분의 벽을 넘지 못하고 이별하는 비극적인 두 남녀의 사랑 이야기’인 ‘심생의 사랑’을 통해 신분 제도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낸다. 이옥이 이 작품을 썼던 당시에 정조는 정통적인 문체에서 벗어난 소설체의 글쓰기를 하는 이들을 억압했다. 따라서 이옥은 이러한 주제를 은폐하고 희석하기 위해 소설 말미에 ‘매화외사(梅花外史)’의 평결 부분을 붙인 것이다.


2. 이옥이 ‘심생전’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

 젊은 남녀의 순수한 애정이 한 사회의 규범에 의해 저지당하고 있음을 보여 주는 이 작품은 신분제로 인한 질곡을 문제시하고 있다. 소녀가 정성스레 마련해 준 옷을 입고 음식을 먹는 것조차 자유로울 수 없는 폐쇄적이고 왜곡된 사회 속에서 자유분방한 인정(人情)의 발현을 추구하다가 좌절하는 운명을 그렸다. 이는 인간의 본성에 충실한 ‘진정’이 결국 비극적으로 끝날 수밖에 없는 당대 사회의 현실을 비판한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심생전’은 욕망의 성취와 비극적 최후를 통해 현실 사회의 문제점을 드러내는 애정 전기 소설의 특징을 잘 보여 준다고 말할 수 있다.


■ 작가 소개

 이옥 –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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