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봉감별곡 - 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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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김양주가 먹을 다 갈고 김 진사를 탁 치며,

  “무엇을 그리 정신없이 보고 있소. 어서 어음이나 써서 드리고 갑시다.”

  “예, 쓰지요. 그런데 오천 냥은 지금 있고, 오천 냥은 평양으로 기별을 해서 가져오든지, 그렇지 않으면 내가 내려가야 할 터인데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허 판서는 벼슬 팔기에 수단이 있는 양반일 뿐 아니라, 김 진사 집의 실정을 다 아는 터라, 이 말을 듣고 선뜻 허락을 한다.

  “그러면 오천 냥 가진 표는 나를 주고, 오천 냥은 어음만 써 놓았다가 나중에 들여놓게그려.” / 김 진사는 오천 냥 어음을 써 놓고, 또 오천 냥은 돈표를 써 놓으니, 허 판서가 받아 문갑 서랍에 넣고 웃는 낯으로 김 진사를 쳐다본다.

  “내일이면 과천 현감을 할 터이니, 이제는 김 과천이라 하지. 김 과천, 허허!”

  “황송합니다.” / “내일이면 할 터인데 무슨 관계가 있나. 그런데 아까 우리 집 심부름 하는 아이를 보고 무어라고 했나?” / “위인이 하도 얌전하기에 칭찬하였습니다.”

  “글쎄, 칭찬한 줄은 아네. 그런데 사위 삼았으면 좋겠다고 그러지 않았나?”

  허 판서는 음흉한 생각이 있어서 묻는 말이지만, 김 진사가 어찌 그런 속을 알겠는가. 조금도 의심하지 않을 뿐 아니라 도리어 황공하여 대답한다.

  “네, 그러했습니다. 소인에게 미천한 딸이 하나 있사온데, 과히 모자라지는 아니하므로, 그에 걸맞은 사람으로 짝을 지어 주려고 열여섯이 되도록 시집을 못 보냈습니다. 댁 상노를 보니 그 모양이 비슷하기에 무심코 속으로 말한다는 것이 대감 귀에까지 들리게 되었습니다.” / 허 판서가 이 말을 듣고 불같은 욕심이 일어나서 체면도 돌아보지 않고,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뜨리더니, / “여보게 김 과천, 나는 그 상노 놈과 비교해서 어떤가?” / “황송합니다.” / “황송하다고 할 것이 아니라, 내가 김 과천에게 청할 말이 있으니, 부담 없이 들을 텐가?” / “대감의 분부라면 죽더라도 따르겠사오니, 어찌 안 듣겠습니까?” / “다른 청이 아니라, 내가 자네 사위가 되면 어떻겠는가?”   

▶채봉을 첩으로 삼고자 하는 허 판서

  “천만의 말씀이올시다.”

  “천만의 말인 것이 아니라 내 말을 들어 보게. 김양주가 이 자리에 앉아 있어서 하는 말이네만 김양주는 내 속을 다 아네. 내가 작년에 첩을 잃고, 마땅한 사람이 없어서 지금까지 그저 있네. 자네 딸을 내게 줄 것 같으면, 자네 딸도 호강을 할 것이요, 자네도 작은 고을 수령으로만 다니겠나. 감사 아니 참판, 판서는 못 할라구.”

  애초에 김 진사가 서울에 왔을 때에는 천금 같은 딸을 위해 좋은 사위를 얻어 낙을 보려는 마음이 먼저였다. 그런데 평안도 사람이 벼슬하기가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려운 이 시절에, 천만뜻밖으로 줄을 잘 잡아 벼슬자리를 얻고, 또 이같이 허 판서의 농간에 놀아나다 보니 헛된 영예에 불같은 욕심이 나는지라. 혼자 생각하길,

  채봉의 됨됨이가 녹록지 아니하여 팔자가 세니 재상의 첩이나 시켜 호강하게 하고, 나는 부원군 부럽지 않게 벼슬이나 실컷 얻으리라. / 하고 기쁘게 허락한다.    

▶허 판서의 청을 허락하는 김 진사

  “무엇이 그리 좋은 일이 있어 춤을 춘단 말이오?”

  “벼슬 없이 늙던 내가 허 판서 주선으로 벼슬길에 나서게 됐지, 또 내일모레면 과천 현감을 하지, 이제 채봉이가 그리 들어가 살면 평생 호강하거니와, 내가 감사도 되고 참판도 되고 판서도 될 것인즉, 부인이야 정경부인은 따 놓은 당상이니 이런 경사가 어디 있소. 두말 말고 데리고 올라갑시다.”

  첩이란 말에 펄펄 뛰던 이 부인도 그 말에 솔깃하여, / “영감이 기어코 하려 드시면 난들 어찌하겠소마는, 채봉이가 말을 들을지 모르겠소.”

  이때 초당에 앉아 글을 읽고 있던 채봉은 부친의 목소리를 듣고 취향을 데리고 안방으로 건너오다가 자신의 혼사 이야기가 나오자 걸음을 멈추고 서서 듣고 있었다. 이윽고 말소리가 그치자 채봉이 방에 들어가 부친 앞에서 날아갈 듯 맵시 있게 절을 한다. / “아버님, 먼 길 안녕히 다녀오셨습니까?”

  김 진사가 딸을 보고 귀한 생각이 한층 더 나서 등을 어루만지며,

  “오냐, 잘 있었느냐. 그래 그동안 글공부도 더 하고, 바느질도 많이 익혔느냐?”

하더니, 부인을 쳐다보며 벙글벙글 웃으며,

  “부인, 참 이제는 바느질을 배워도 쓸데가 없겠구려. 침모가 있어서 다 해서 바칠 터이니…….”

  채봉은 이 말을 듣고 눈살을 찌푸리며 얼굴을 숙인다. 김 진사는 다시 채봉을 보고,

  “아가, 너는 재상의 첩이 좋으냐, 여염집의 부인이 좋으냐? 아비, 어미 있는데 부끄러울 게 뭐냐. 네 생각을 말해 보아라.”

  채봉이 예사 여염집 처녀 같았으면 부모의 말이라 뭐라고 대꾸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장필성과의 일을 잠시도 잊지 않은 데다 부모가 하는 얘기를 다 들은 터라 조금도 서슴지 않고 얼굴을 바로 하고 대답한다.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뒤 되기는 바라는 바가 아닙니다.”

  “허허, 그 녀석. 네가 첩 구경을 못 해서 그런 소리를 하는구나! 재상의 첩이야 세상에 그 같은 호강은 또 없느니라.” / 부인이 말을 가로막고 김 진사를 쳐다보며,

  “영감은 자식에게 별말씀을 다 하시는구려. 계집애 자식이란 것은 으레 부모가 하는 대로 좇아가는 법이랍니다. 아가! 너는 네 방으로 가 있어라.”

  채봉을 내보낸 두 내외는 서울로 올라갈 의논을 하고, 그 날도 집안 세간을 팔아 서울 갈 짐을 꾸린다.

  한편 채봉은 초당으로 나와 장필성과의 약속을 생각하고 홀로 탄식한다. <중략>

  채봉이 이같이 비장한 마음을 먹으니, 저도 모르게 눈물이 옷깃을 적신다.

  이윽고 한 꾀를 생각하고 취향을 대하여,

  “취향아! 내가 너를 몇 해 동안 친형제같이 알고 지낸 터이어니와, 내 억울한 사정을 알 사람은 너밖에 없구나. 장씨의 일은 너도 아는 바이어니와, 아무리 부모의 분부인들 그런 중한 언약을 오늘날 배반할 수 있나.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중략>

  “아무리 생각해도 그리할 수밖에 없으니, 가다가 도중에서 몸을 피할 터이니, 너는 뒤를 밟아 오너라.”

   ▶채봉이 재상의 첩으로 들어가지 않기로 결심함.


■ 핵심 정리

• 갈래 : 애정 소설, 연정 소설

• 성격 : 사실적, 비판적, 진취적

• 제재 : 채봉과 장필성의 사랑

• 주제 : 권세에 굴하지 않는 순결하고 진실한 사랑

• 특징 :

  ① 여성 주인공의 주체적 의지가 드러남.

  ② 조선 후기의 타락한 사회상을 사실적으로 드러냄.

  ③ 사건 전개가 현실적 차원에서 이루어짐.

• 의의 : 조선시대 소설에서는 드물게 보는 독창적인 작품으로 무엇보다도 우연성과 비현실성이 점차 사라지면서 고전 소설의 말미에 놓이는 작품으로 내용 중에 채봉이 지어 부르는 가사체(歌辭體)의 '추풍감별곡'이 있으며, 동명(同名)의 서도창(西道唱)이 따로 있다.


■ 작품 해설 1

  일명 ‘추풍감별곡’이라고도 불리는 이 작품은, 중국 소설 ‘왕교란백년장한(王嬌鸞百年長恨)’을 번안한 작품으로 평가되기도 하지만 서두에서 남녀 주인공의 결연 과정만 모방했을 뿐이다. 이 작품의 시대적 배경은 매관매직이 횡행하던 조선 말기로, 이 작품처럼 현실성을 띠고 있는 조선 시대 고전 소설도 드물다고 할 수 있다.

  평양에 사는 김 진사의 딸 채봉과 장필성은 서로 약혼한 사이였으나 벼슬에 눈이 먼 채봉의 아버지 김 진사가 딸을 허 판사의 첩으로 주려고 하자 집을 나와 평양 기생이 되는 등 두 남녀는 많은 고난을 겪다가 마침내 숙원을 이룬다는 내용이다. 이 작품은 어떠한 권세에도 굴하지 않고, 사랑을 찾으려는 순결하고도 진실한 주인공 장필성과 채봉의 애정담을 그리고 있으며, 나아가 조선 말기의 부패하고도 몰락해 가는 양반 위정자들의 실상을 폭로하고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작자 · 연대 미상의 고전소설. 1책. 국문필사본 · 활자본. ‘ 추풍감별곡 ’ 이라는 표제도 있는데, 이는 작품 안에 삽입된 시의 제목이기도 하다. 필사본으로는 규장각본이 있고, 활자본은 1913년 박문서관본, 1952년 세창서관본이 있다. 남녀주인공이 기구하게 헤어지고 만나는 과정을 그린 애정소설이다.

 여주인공 채봉은 평양성 밖 김진사의 딸로, 봄날 꽃구경에 나섰다가 전 선천부사의 아들 장필성을 만나 서로 호감을 갖게 된다. 필성은 채봉이 수줍어 도망하다가 떨어뜨린 손수건을 주워 연정을 담은 시를 써서 시비 추향에게 전한다. 이를 받아 본 채봉이 화답시를 보낸다. 채봉의 어머니 이부인이 채봉을 질책하자 채봉이 사실을 고한다. 필성이 어머니를 통하여 채봉의 집에 매파를 보내자, 채봉의 아버지 김진사가 서울 가고 없는 동안에 부인이 혼자 결정하여 약혼한다.

 김진사는 세도가 허판서의 문객 김양주를 통하여 벼슬할 생각을 한다. 김양주는 김진사에게 과년한 딸이 있다는 말을 듣고, 딸을 허판서의 애첩으로 들여보내고 그 대가로 벼슬을 하도록 권한다. 김진사가 주저하던 끝에 승낙하고 허판서에게도 약속을 하고 온다. 돌아온 김진사는 부인에게 딸을 데리고 상경하자고 하니 부인은 대경실색하고, 채봉은 눈물만 흘린다. 부인과 채봉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김진사는 전답과 기타 가산을 정리하여 상경한다.

 김진사 일행은 도중에 화적을 만나는데, 이때 채봉은 부모에게 알리지 않고 평양으로 되돌아온다. 김진사는 화적에게 재물을 빼앗기고 허판서에게 사정을 알리지만 허판서는 대노하여 김진사를 옥에 가둔다. 부인은 할 수 없이 채봉을 찾으러 다시 평양으로 온다. 채봉은 평양에서 시비 추향의 집에 묵고 있었는데, 기생어미가 그녀에게 기생되기를 권하나 거절한다.

 채봉의 어머니는 추향의 집에서 딸을 만나 아버지가 하옥되어 있는 사실을 이야기하고 상경하자고 조른다. 채봉은 아버지를 구하기 위하여 기생으로 몸을 팔기로 작정하고 기생어미로부터 돈을 받아 어머니에게 준다.

 기명을 송이라고 한 채봉은 장필성에게 화답하여 보낸 한시를 내놓고 그것을 풀이하는 사람에게 몸을 허락하겠다고 하지만 아무도 풀지를 못한다. 필성은 기생 송이가 제시하였다는 한시를 듣고 하도 신기하여 찾아갔다가 채봉을 만나고, 그 뒤 밤마다 찾아가서 사랑을 속삭인다.

 한편, 평양감사 이보국이 송이의 서화가 뛰어나다는 말을 듣고 몸값을 지불하고 데려와 곁에 두고 서신과 문서를 처리하는 일을 맡긴다. 필성은 채봉을 잃고는 채봉을 그리워하며 고민으로 지내다가 감영의 이방이 되기를 자원하여 채봉을 만나고자 한다.

 채봉은 별당에 거처하면서 필성을 날마다 그리워하고 있다가 어느 달 밝은 밤에 ‘추풍감별곡’을 지어서 부른다. 이 노래를 들은 감사가 채봉을 불러 천한 이방을 사모한다고 질책한다. 이에 채봉은 현재 이방으로 와 있는 필성과의 관계를 고백한다. 감사는 두 사람의 사랑을 가상히 여겨 필성을 불러서 상면하게 하고 감사 자신이 혼례와 관련된 일들을 주관하여 두 사람의 지난날의 인연을 성취시켜준다.

 이 소설은 12회 회장체소설로 중국소설집 ≪금고기관(今古奇觀)≫ 중의 〈왕교란백년장한(王嬌鸞百年長恨)〉과 유사한 점이 있어 번안이라는 논란이 있다. 서두의 남녀 상봉과정과 화답한 시가 일치하는 것으로 보아 영향을 받은 듯하나, 줄거리와 짜임새는 서로 다르므로 창작소설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관직을 사고 파는 일이 성행하던 조선 말엽의 세태를 반영한 것이 특징이다. 딸을 팔아서까지 벼슬하려고 하는 김진사, 부모의 명을 거역하고 도망하였다가 기생이 되는 채봉, 애인을 만나기 위하여 천한 이방이 되는 필성 등은 기존질서에 크게 파격적인 행동을 하는 인물들이다.

 신분질서의 와해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육욕과 출세욕은 개화기의 고전소설들과도 상통하는 점이다. 현실적 · 합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의 전개와 사실에 가까운 표현법 등은 이 작품이 근대소설로 옮겨가는 과정에 있는 작품임을 시사한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심화 내용 연구

1. ‘채봉감별곡’에 담긴 시대적 상황  

• “평안도 사람이 벼슬하기가 하늘에 오르는 것처럼 어려운 이 시절에”: 서북 지역(평안도)의 사람들에 대해 차별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9세기 초에 발생한 ‘홍경래의 난’은 이러한 차별에 대한 반발로 일어난 사건이었다.

• “채봉이 예사 여염집 처녀 같았으면 부모의 말이라 뭐라고 대꾸하지 않았을 터이지만”: 유교적 전통 사회인 조선 사회에서는 자식이 부모의 뜻에 따르는 것이 도리였다.


2. 애정 소설의 특징

  우리나라를 배경으로 한 애정 소설의 여주인공 대부분을 기생 출신에서 택한 데 비해 이 작품은 양가의 규중 처자를 여주인공으로 삼았으며, 중국을 배경으로 한 애정 소설이 대부분이 일부다처에 의한 애정 생활을 공공연하게 표현해 놓은 데 비해 이 작품은 진실한 애정만으로 결합되어 일부일처주의의 애정 생활을 표현했다.


3. ‘채봉감별곡’의 근대성

  우리나라 애정 소설의 저변에는 서사적 전통이 깔려 있는데, 그것은 바로 여성 인물의 ‘주체성 발현의 전통’이다. 우리 애정 소설에서는 애정 장애를 극복하기 위해 주체로서 몸부림치는 여주인공의 모습이 오랫동안 형상화되어 왔다.

  ‘채봉감별곡’은 그런 애정 소설의 전통을 이어 발전시킨 작품이다. 특히, 환경과 대면해 주체성을 발현하는 현실적 인물을 이전의 어느 소설보다도 더 구체적으로 형상화해 냄으로써 우리 애정 소설의 전통을 창조적으로 발전시킨 작품으로 자리하게 되었다.


4. ‘채봉감별곡’에 나타난 사회상

  이 작품은 매관매직이 성행하던 조선 후기의 세태를 반영한 것이 특징이다. 딸을 팔아서까지 벼슬하려고 하는 김 진사, 부모의 명을 거역하고 도망하였다가 기생이 되는 채봉, 애인을 만나기 위하여 천한 이방이 되는 필성 등은 기존 질서를 벗어나 파격적인 행동을 하는 인물들이다. 신분 질서의 와해뿐만 아니라 무분별한 욕망과 출세욕은 개화기의 고전 소설들과도 상통하는 점이다. 현실적 · 합리적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사건의 전개와 사실에 가까운 표현법 등은 이 작품이 근대 소설로 옮겨 가는 과정에 있는 작품임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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