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영전 - 작자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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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문

 하루는 대군이 서궁의 수헌에 앉아 계시다가 왜철쭉이 활짝 핀 것을 보고, 시녀들에게 각기 오언 절구(五言絶句)를 지어서 바치라고 명령했습니다. 시녀들이 지어서 올리자, 대군이 크게 칭찬하여 말했습니다.

  “너희들의 글이 날마다 점점 나아지고 있어서 매우 기쁘다. 다만 운영의 시에는 임을 그리워하는 마음이 나타나 있다. 지난번 부연시(賦煙詩)에서도 그러한 마음이 희미하게 엿보였는데 지금 또 이러하니, 네가 따르고자 하는 사람이 어떤 사람이냐? 김생의 상량문에도 말이 의심스러운 데가 있었는데, 네가 생각하는 사람이 김생 아니냐?”

  저는 즉시 뜰로 내려가 머리를 조아리고 울면서 말했습니다.

  “지난번 주군께 처음 의심을 사게 되자마자 저는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고 했었습니다. 그러나 제 나이가 아직 이십도 되지 않은 데다가 다시 부모님도 뵙지 못하고 죽는 것이 매우 원통한지라, 목숨을 아껴 여기까지 이르렀습니다. 그런데 또 의심을 받게 되었으니, 한번 죽는 것이 무엇이 아깝겠습니까? 천지의 귀신들이 죽 늘어서 밝게 비추고 시녀 다섯 사람이 한순간도 떨어지지 않고 함께 있었는데, 더러운 이름이 유독 저에게만 돌아오니 사는 것이 죽는 것보다 못합니다. 제가 이제야 죽을 곳을 얻었습니다.”

  저는 즉시 비단 수건을 난간에 매어 놓고 스스로 목을 매었습니다. 이때 자란이 말했습니다.

  “주군께서 이처럼 영명(英明)하시면서 죄 없는 시녀로 하여금 스스로 사지(死地)로 나가게 하시니, 지금부터 저희들은 맹세코 붓을 들어 글을 쓰지 않겠습니다.”

  대군은 비록 화가 많이 났지만, 마음속으로는 진실로 제가 죽는 것은 바라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자란으로 하여금 저를 구하여 죽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런 뒤 대군은 흰 비단 다섯 단(端)을 내어서 다섯 사람에게 나누어 주면서 말했습니다.

  “너희가 지은 시들이 가장 아름답기에 이것을 상으로 주노라.”

  이때부터 진사는 다시는 궁권을 출입하지 못하고 집에 틀어박힌 채 병들어 눕게 되었습니다. 눈물이 이불과 베개에 흩뿌려졌으며, 목숨을 한 가닥 실낱 같았습니다.       

▶안평대군의 의심과 운영의 대응

<중략>

  그날 밤 진사가 들어왔는데, 저는 병으로 일어날 수가 없어서 자란에게 진사를 맞아들이게 했습니다. 술이 석 잔 정도 돌아간 후에 제가 봉한 편지를 드리면서 말했습니다.

  “이후부터는 다시 뵐 수 없으니, 삼생(三生)의 인연과 백 년의 약속이 오늘 저녁에 모두 끝났습니다. 만약 하늘이 정해 준 인연이 아직 끊어지지 않았다면 마땅히 저승에서나 서로 만나 볼 수 있을 것입니다.”

▶김 진사에게 편지를 준 운영


  진사는 편지를 품속에 넣고 우두커니 서서 묵묵히 바라보다가 가슴을 두드리고 눈물을 흘리면서 나갔습니다. 자란은 저희들이 불쌍하여 차마 보지 못하고 기둥에 몸을 숨긴 채 눈물을 흩뿌리며 서 있었습니다. 진사가 집으로 돌아가 편지를 뜯어 보니, 그 글에 일렀습니다.


  “박명한 첩 운영은 낭군께 재배하고 사룁니다. 저는 변변치 못한 자질로서 불행히도 낭군의 사랑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 이후 우리는 얼마나 서로를 그리워하고 갈망했었습니까? 다행스럽게도 하룻밤의 즐거움을 이룰 수는 있었으나, 바다처럼 깊은 우리의 사랑은 미진하기만 합니다. 인간 세상의 좋은 일을 조물(造物)이 시기한 탓으로 궁인들이 알고 주군이 의심하게 되어 마침내 재앙이 눈앞에 닥쳤으니, 죽은 뒤에나 이 재앙이 그칠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낭군께서는 이별한 후에 비천한 저를 가슴속에 새겨 근심하지 마시고, 더욱 학업에 힘써 과거에 급제한 뒤 높은 벼슬길에 올라 후세에 이름을 드날리고 부모님을 현달케 하십시오. 제 의복과 재물은 다 팔아 부처께 공양하시고, 갖가지로 기도하고 지성으로 소원을 빌어 삼생의 연분을 후세에 다시 잇도록 해 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신다면 더없이 좋겠나이다! 좋겠나이다!”

▶김 진사에게 편지로 이별을 고하는 운영

<중략>

  제가 초사를 올려 말했습니다.

  “주군의 은혜는 산과 같고 바다와 같습니다. 그런데도 능히 정절을 고수(固守)하지 못한 것이 저의 첫 번째 죄입니다. 지난날 제가 지은 시가 주군께 의심을 받게 되었는데도 끝내 사실대로 아뢰지 못한 것이 저의 두 번째 죄입니다. 죄 없는 서궁 사람들이 저 때문에 함께 죄를 입게 된 것이 저의 세 번째 죄입니다. 이처럼 세 가지 큰 죄를 짓고서 무슨 면목으로 살겠습니까? 만약 죽음을 늦춰 주실지라도 저는 마땅히 자결할 것입니다. 처분만 기다립니다.”

  대군은 우리들의 초사를 다 보고 나서, 또다시 자란의 초사를 펼쳐 놓고 보더니 점차 노기(怒氣)가 풀리었습니다.

  이때 소옥이 무릎을 꿇고 울면서 아뢰었습니다.

  “지난날 완사를 성내(城內)에서 하지 말자고 한 것은 제 의견이었습니다. 자란이 밤에 남궁에 와서 매우 간절하게 요청하기에, 제가 그 마음을 불쌍히 여겨 여러 사람의 의견을 배척하고 따랐던 것입니다. 그러니 운영의 훼절은 죄가 제 몸에 있지 운영에게 있지 않습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주군께서는 제 몸으로써 운영의 목숨을 이어 주십시오.”

  대군의 분노가 점차 풀어져서 저를 별당에 가두고, 그 나머지 사람은 모두 풀어 주었습니다. 그날 밤 저는 비단 수건에 목을 매어 자결하였습니다.


■ 핵심 정리

• 갈래 : 한문 소설, 애정 소설, 액자 소설

• 배경 : 조선 초 · 중기, 한양의 수성궁

• 제재 :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

• 주제 : 운영과 김 진사의 비극적 사랑

• 특징 :

 ① 조선 시대 궁녀들의 삶을 보여줌.       

 ② 자유 연애 사상을 드러냄.

 ③ 시(詩)를 통해 작품이 전개됨.


■ 줄거리

 선비 유영은 안평대군의 집(수성궁)에 놀러가 홀로 술을 마시다 잠이 들고, 취몽 간에 김 진사와 운영을 만나 그들의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를 듣는다. 운영은 본래 안평대군의 궁녀였는데, 어느 날 수성궁에 찾아온 김 진사를 보고 사랑에 빠진다. 운영과 김 진사는 죽음을 무릅쓰고 무녀를 통해 편지를 주고받고, 담을 넘어 서로 만나는 등 은밀하게 사랑을 나눈다. 둘은 도망칠 계획을 세우지만, 짐 진사의 종 특이의 고발로 발각되고, 운영은 옥에 갇히는 신세가 된다. 이에 운영은 목을 메어 자결하고, 슬픔을 이기지 못한 김 진사 또한 세상을 떠난다. 운영과 김 진사는 자신들의 사랑 이야기를 세인들에게 전해 줄 것을 유영에게 당부한다. 유영은 이를 책으로 기록하고, 명산 대천을 두루 돌아다니다 생을 마친다.


■ 작품 해설 

  이 작품은 안평대군의 수성궁을 배경으로, 궁녀 운영과 김 진사의 비극적인 사랑을 그린 소설이다. 애정 소설 중에서 결말을 비극적으로 처리한 유일한 작품으로, 조선 시대 궁녀들의 억압적인 생활과, 이에 대한 고뇌가 잘 드러나 있다. 이 작품은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다. 외부 이야기는 유영에 대한 것이며, 내부 이야기에 운영과 김 진사의 사랑 이야기가 포함된다. 봉건적인 유교 사회에서 모순된 현실을 뛰어 넘어 인간 본능의 자연스러운 표출을 추구하지만, 한계에 부딪히는 두 남녀의 모습에서 비극미를 느낄 수 있는 작품이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운영전’의 인물 성격 분석  

  이 작품은 ‘수성궁 몽유록’ 또는 ‘유영전’이라고도 불리는 소설로, 궁녀인 운영과 사대부인 김 진사의 비극적 사랑을 주제로 하고 있다. 특히 이 작품은 액자식 구성을 취하고 있는데, 유영이 술에 취해 잠들었다 깨어나서 운영과 김 진사의 이야기를 듣고, 다시 잠들었다 깨어나는 이중적 구성으로 되어 있어 다른 몽유록과 다른 양상을 보이는 것이 특징이다. 또한 등장인물, 사건 등의 측면에서도 이전의 전기 소설과 다른 형태를 띠고 있다. 즉, 주인공들에게만 초점이 고정되어 사건이 전개되지 않고 있다는 점인데, ‘유영’이라는 인물이 사건의 전달에 개입하고 있다는 점이나 작중에서 ‘안평대군’의 역할이 크게 부각된 점은 그것을 보여 주는 증거이다.


2. 작품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성격  

• 운영

  ① 사랑을 실현하고자 하는 의지가 강함.

  ② 자신의 신념에 따라 주관 있게 행동함.

  ③ 현실적 장애에 당당히 맞서고자 노력하는 인물임.

• 김 진사

  ① 운영과의 사랑을 이루기 위해 어떠한 행동도 하지 못함.

  ② 소심하고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임.

• 특

  ① 진사를 속여 재물을 차지하려고 함.

  ② 사악하고 탐욕스러운 인물임.

• 안평대군

  ① 학문과 시를 즐기는 도덕군자임.

  ② 궁녀들의 삶을 구속하는 전근대적 인물임.

• 자란

  ① 운영의 마음을 이해하고 동조하며 따르는 인물임.

  ② 운영 대신 죽을 수 있는 뜻을 표할 만큼 의지적 인물임.


3. 운영의 죽음에 담긴 의미

  이 작품에서 ‘운영’은 자신의 신념에 따라 주관 있게 행동하며 현실의 벽에 당당히 맞서고자 노력하는 인물로 그려져 있지만, 현실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는다. 그러나 이러한 운영의 죽음은 순수한 애정마저 감추어야 하는 유교 사회의 부조리, 단절된 채 살아가야 하는 궁녀의 억압된 삶에 대한 저항이며, 나아가 인간성의 해방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운영이 현실 속에서 사랑을 이루지 못하고 죽게 되지만, 이는 비인간적 규제와 형식에 매인 삶을 벗어나 진정한 자아를 찾기 위한 마지막 방편이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4. 안평대군의 성격

  이 작품에서 안평대군은 중세적 윤리를 제외한 일체의 인간적 감정을 혼탁한 욕정으로 여기고 궁녀들에게서 이를 인위적으로 제거하고자 한 바 있다. 즉, 궁녀들을 궁 밖의 세계와 단절시키고 열 명의 궁녀를 자신의 이념적 틀에 맞는 인간으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다. 특히 안평대군은 궁녀들을 수성궁에 가두어 둔 채 시를 짓게 하였는데, 그것은 일종의 사상적 검열이기도 했다. ‘시란 본디 성정(性情)으로부터 나오는 것’으로서 시를 통해 궁녀들의 현재 심리 상태를 파악할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5. ‘운영전’에서 비장미를 형성하는 요소

  이 작품은 운영의 자결로 결말이 지어지는데, 이를 통해 비장미가 형성된다. 이러한 부분 외에도 이 작품을 비극적으로 형상화하는 요소가 곳곳에 제시되어 있다. 즉, 운영이 진사에게 이별을 통고하는 내용의 편지를 보낸 부분이나 자란과 소옥이 운영 대신 죽기를 자처하는 부분이 그러하다. 이러한 비극적 요소는 작품의 주제 형성에도 큰 기여를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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