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본문
내 누님에게는 김이홍이라 하는 아들이 있다.
이홍은 잊어버리는 것이 아주 심했으니 어떤 물건을 보고선 열에 아홉을 잊어버렸고 일을 하게 되면 열에 열을 잊어버리곤 했다. 아침에 한 일이라도 저녁이면 벌써 혼미해졌고 어제 한 일이라도 오늘이면 기억하지 못했다.
이홍은 나에게 하소연했다.
"제 건망증은 아무래도 병인가 봅니다. 제게 있어 작게는 어떤 일을 하지도 못하게 하고 크게는 남을 거느리지도 못하게 하며, 말을 실수하게 만들기도 하고 행동을 하더라도 무언가를 빠뜨리고는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건망증이 빌미가 되더군요. 제 건망증을 고칠 사람이 있다면 제가 천금인들 아끼겠습니까? 저는 천리 길도 멀다 하지 않고 찾아갈 것입니다."
이에 나는 타이르며 말했다.
"너는 잊는 것이 네게 병이 되고 잊지 않는 것이 네게 도움을 주는 것만 볼 뿐이고 잊지 않는 것이 네게 걱정을 끼치고 잊는 것이 네게 복을 가져다주는 것은 보지 못하는구나. 나는 네가 건망증을 굳이 고치지 않기를 바란다. 오히려 더 많은 것을 잊어서 드디어 크게 잊는 지경에 이르기를 바란다. 정녕 네가 천금을 걷고서 천하의 건망증 치료사를 찾아 치료하고자 한다면 나는 왼손으로는 네 팔꿈치를 잡아당기고 오른손으로는 네 팔뚝을 붙잡아 치료를 막겠다.
그러자 이홍은 휘둥그레하며 말했다.
"어찌하여 그렇게 말씀하십니까?"
나는 이렇게 말했다.
"너는 잊는 것이 병이라고 생각하느냐? 잊는 것은 병이 아니다. 너는 잊지 않기를 바라느냐? 잊지 않는 것이 병이 아닌 것은 아니다. 그렇다면 잊지 않는 것이 병이 되고, 잊는 것이 도리어 병이 아니라는 말은 무슨 근거로 할까? 잊어도 좋을 것을 잊지 못하는 데서 연유한다. 잊어도 좋을 것을 잊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잊는 것이 병이라고 치자. 그렇다면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잊는 사람에게는 잊는 것이 병이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그 말이 옳을까?
천하의 걱정거리는 어디에서 나오겠느냐? 잊어도 좋을 것은 잊지 못하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잊는 데서 나온다. 눈은 아름다움을 잊지 못하고, 귀는 좋은 소리를 잊지 못하며, 입은 맛난 음식을 잊지 못하고, 사는 곳은 크고 화려한 집을 잊지 못한다. 천한 신분인데도 큰 세력을 얻으려는 생각을 잊지 못하고, 집안이 가난하건만 재물을 잊지 못하며, 고귀한데도 교만한 짓을 잊지 못하고, 부유한데도 인색한 짓을 잊지 못한다. 의롭지 않은 물건을 취하려는 마음을 잊지 못하고, 실상과 어긋난 이름을 얻으려는 마음을 잊지 못한다.
그래서 잊어서는 안 될 것을 잊는 자가 되면, 어버이에게는 효심을 잊어버리고, 임금에게는 충성심을 잊어버리며, 부모를 잃고서는 슬픔을 잊어버리고, 제사를 지내면서 정성스러운 마음을 잊어버린다. 물건을 주고받을 때 의로움을 잊고, 나아가고 물러날 때 예의를 잊으며, 낮은 지위에 있으면서 제 분수를 잊고, 이해의 갈림길에서 지켜야 할 도리를 잊는다.
먼 것을 보고 나면 가까운 것을 잊고, 새것을 보고 나면 옛것을 잊는다. 입에서 말이 나올 때 가릴 줄을 잊고, 몸에서 행동이 나올 때 본받을 것을 잊는다. 내적인 것을 잊기 때문에 외적인 것을 잊을 수 없게 되고, 외적인 것을 잊을 수 없기 때문에 내적인 것을 더더욱 잊는다.
그렇기 때문에 하늘이 잊지 못해 벌을 내리기도 하고, 남들이 잊지 못해 질시의 눈길을 보내며, 귀신이 잊지 못해 재앙을 내린다. 그러므로 잊어도 좋을 것이 무엇인지를 알고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이 무엇인지를 아는 사람은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서로 바꿀 능력이 있다. 내적인 것과 외적인 것을 서로 바꾸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잊어도 좋을 것은 잊고 자신의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잊지 않는다.
이홍, 너는 성품이 강직하고 마음이 맑으며 뜻이 단정하고 행실이 방정하다. 그렇기에 잊어서는 안 될 일을, 너는 잠을 자든 깨어있든 잊지 않는다. 잊어도 좋은 것이라면 네가 잊기를 바랄 뿐이고 네가 잊지 않기를 바라지 않는다. 나는 너를 병들게 한다고 말한 건망증이 심하지 않을 것을 염려하고 네게 복을 가져다준다고 말한 건망증이 풍성하지 못할 것을 염려한다. 천금의 보물을 싸들고 천리 먼 곳을 찾아다니며 굳이 건망증을 치료할 필요가 있겠느냐? 이홍아! 차라리 잊어버려라!"
2. 핵심 정리
• 갈래 : 고전 수필
• 성격 : 교훈적, 설득적, 역설적, 논리적
• 제재 : 잊음에 대한 본질
• 주제 : 잊어야 할 것과 잊지 않아야 할 것을 분별하는 지혜의 필요성
• 특징 :
① 역설적 표현과 이중 부정, 열거법 등을 활용하여 필자의 생각을 전달함
② 질문과 이에 대한 대답을 통해 필자의 생각을 드러냄
③ ‘잊음’과 ‘잊지 않음’ 등 대조적 의미를 활용하여 주제를 부각시킴
④ 조카와의 대화 형식을 내용을 전개하는 수필
3. 작품 해설
잊어야 할 것과 잊지 않아야 할 것에 대한 사유를 통해 인간이 지향해야 할 바에 대한 깨달음을 전해 주고 있다. 글쓴이는 천하의 걱정거리가 잊어도 좋을 것은 잊지 못하고, 잊어서는 안 될 것은 잊는 데서 나온다고 말하며, 잊어도 좋을 것과 잊어서는 안 되는 것을 구분하는 삶의 필요성을 역설하고 있다. 아울러 내적인 것을 잊고 외적인 것을 잊지 못하는 삶에 대해 경계해야 한다는 가르침을 전하고 있다.
- EBS, 수능 해설 참고
4. 작가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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