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생전 - 박지원



■ 본문

  허생은 묵적골〔墨積洞〕에 살았다. 곧장 남산(南山) 밑에 닿으면, 우물 위에 오래된 은행나무가 서 있고, 은행나무를 향하여 사립문이 열렸는데, 두어 칸 초가는 비바람을 막지 못할 정도였다. 그러나 허생은 글 읽기만 좋아하고, 그의 처가 남의 바느질품을 팔아서 입에 풀칠을 했다.

▶가난하면서도 실생활을 등한시하는 허생

  하루는 그 처가 몹시 배가 고파서 울음 섞인 소리로 말했다.

  “당신은 평생 과거(科擧)를 보지 않으니, 글을 읽어 무엇합니까?”

  허생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아직 독서를 익숙히 하지 못하였소.” / “그럼 장인바치 일이라도 못 하시나요?” / “장인바치 일은 본래 배우지 않은 걸 어떻게 하겠소?” / “그럼 장사는 못하시나요?” / “장사는 밑천이 없는 걸 어떻게 하겠소?” / 처는 왈칵 성을 내며 소리쳤다.

  “밤낮으로 글을 읽더니 기껏 ‘어떻게 하겠소?’ 소리만 배웠단 말씀이오? 장인바치 일도 못 한다, 장사도 못 한다면, 도둑질이라도 못 하시나요?”

▶허생을 질책하는 아내

  허생은 읽던 책을 덮어 놓고 일어나면서,

  “아깝다. 내가 당초 글 읽기로 십 년을 기약했는데, 인제 칠 년인걸…….”

하고 휙 문밖으로 나가 버렸다.

  허생은 거리에 서로 알 만한 사람이 없었다. 바로 운종가로 나가서 시중의 사람을 붙들고 물었다. / “누가 서울 성중에서 제일 부자요?”

  변 씨(卞氏)를 말해 주는 이가 있어서, 허생이 곧 변 씨의 집을 찾아갔다. 허생은 변 씨를 대하여 길게 읍하고 말했다.

  “내가 집이 가난해서 무얼 좀 해 보려고 하니, 만 냥(兩)을 꾸어 주시기 바랍니다.”

  변씨는 / “그러시오.” / 하고 당장 만 냥을 내주었다. 허생은 감사하다는 인사도 없이 가 버렸다. 변 씨 집의 자제와 손들이 허생을 보니 거지였다. 실띠의 술이 빠져 너덜너덜하고, 갖신의 뒷굽이 자빠졌으며, 쭈그러진 갓에 허름한 도포를 걸치고, 코에서 맑은 콧물이 흘렀다. 허생이 나가자, 모두들 어리둥절해서 물었다.

▶변씨에게 돈을 빌리는 허생

  “저이를 아시나요?” / “모르지.”

  “아니, 하루아침에, 평생 누군지도 알지 못하는 사람에게 만 냥을 그냥 내던져 버리고 성명도 묻지 않으시다니, 대체 무슨 영문인가요?” / 변 씨가 말하는 것이었다.

  “이건 너희들이 알 바 아니다. 대체로 남에게 무엇을 빌리러 오는 사람은 으레 자기 뜻을 대단히 선전하고, 신용을 자랑하면서도 비굴한 빛이 얼굴에 나타나고, 말을 중언부언하게 마련이다. 그런데 저 객은 형색은 허술하지만, 말이 간단하고, 눈을 오만하게 뜨며, 얼굴에 부끄러운 기색이 없는 것으로 보아, 재물이 없어도 스스로 만족할 수 있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해 보겠다는 일이 작은 일이 아닐 것이매, 나 또한 그를 시험해 보려는 것이다. 안 주면 모르되, 이왕 만 냥을 주는 바에 성명은 물어 무엇을 하겠느냐?”

▶허생을 시험하고자 하는 변씨

  허생은 만 냥을 입수하자, 다시 자기 집에 들르지도 않고 바로 안성(安城)으로 내려갔다. 안성은 경기도, 충청도 사람들이 마주치는 곳이요, 삼남(三南)의 길목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대추, 밤, 감, 배며 석류, 귤, 유자 등속의 과일을 모조리 두 배의 값으로 사들였다. 허생이 과일을 몽땅 쓸었기 때문에 온 나라가 잔치나 제사를 못 지낼 형편에 이르렀다. 얼마 안 가서, 허생에게 두 배의 값으로 과일을 팔았던 상인들이 도리어 열 배의 값을 주고 사 가게 되었다. 허생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 냥으로 온갖 과일의 값을 좌우했으니, 우리나라의 형편을 알 만하구나. <중략>

▶매점매석을 통해 큰 돈을 벌어들인 허생

  “어렵습니다. 제이(第二)의 계책을 듣고자 하옵니다.” / 했다. / “나는 원래 ‘제이’라는 것은 모른다.” / 하고 허생은 외면하다가, 이 대장의 간청에 못 이겨 말을 이었다.

  “명(明)나라 장졸들이 조선은 옛 은혜가 있다고 하여, 그 자손들이 많이 우리나라로 망명해 와서 정처 없이 떠돌고 있으니, 너는 조정에 청하여 종실(宗室)의 딸들을 내어 모두 그들에게 시집보내고, 훈척(勳戚) 권귀(權貴)의 집을 빼앗아서 그들에게 나누어 주게 할 수 있겠느냐?” / 이 대장은 또 머리를 숙이고 한참을 생각하더니, / “어렵습니다.” / 했다. / “이것도 어렵다, 저것도 어렵다 하면 도대체 무슨 일을 하겠느냐? 가장 쉬운 일이 있는데, 네가 능히 할 수 있겠느냐?” / “말씀을 듣고자 하옵니다.”

  “무릇, 천하에 대의(大義)를 외치려면 먼저 천하의 호걸들과 접촉하여 결탁하지 않고는 안 되고, 남의 나라를 치려면 먼저 첩자를 보내지 않고는 성공할 수 없는 법이다. 지금 만주 정부가 갑자기 천하의 주인이 되어서 중국 민족과는 친근해지지 못하는 판에, 조선이 다른 나라보다 먼저 섬기게 되어 저들이 우리를 가장 믿는 터이다. 진실로 당(唐)나라, 원(元)나라 때처럼 우리 자제들이 유학 가서 벼슬까지 하도록 허용해 줄 것과 상인의 출입을 금하지 말도록 할 것을 간청하면, 저들도 반드시 자기네에게 친근해지려 함을 보고 기뻐 승낙할 것이다. 국중의 자제들을 가려 뽑아 머리를 깎고 되놈의 옷을 입혀서, 그중 선비는 가서 빈공과(賓貢科)에 응시하고, 또 서민은 멀리 강남(江南)에 건너가서 장사를 하면서, 저 나라의 실정을 정탐하는 한편, 저 땅의 호걸들과 결탁한다면 한번 천하를 뒤집고 국치(國恥)를 씻을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명나라 황족에서 구해도 사람을 얻지 못할 경우, 천하의 제후(諸侯)를 거느리고 적당한 사람을 하늘에 천거한다면, 잘되면 대국(大國)의 스승이 될 것이고, 못 되어도 백구지국(伯舅之國)의 지위를 잃지 않을 것이다.”

  이 대장은 힘없이 말했다. / “사대부들이 모두 조심스럽게 예법(禮法)을 지키는데, 누가 변발(辮髮)을 하고 호복(胡服)을 입으려 하겠습니까?”

▶현실 대응책을 제시하는 허생

  허생은 크게 꾸짖어 말했다.

  “소위 사대부란 것들이 무엇이란 말이냐? 오랑캐 땅에서 태어나 자칭 사대부라 뽐내다니 이런 어리석을 데가 있느냐? 의복은 흰 옷을 입으니 그것이야말로 상인(喪人)이나 입는 것이고, 머리털을 한데 묶어 송곳같이 만드는 것은 남쪽 오랑캐의 습속에 지나지 못한데, 대체 무엇을 가지고 예법이라 한단 말인가? 번오기(樊於期)는 원수를 갚기 위해서 자신의 머리를 아끼지 않았고, 무령왕(武靈王)은 나라를 강성하게 만들기 위해서 되놈의 옷을 부끄럽게 여기지 않았다.  <후략>”

   ▶이완을 질타하는 허생


■ 핵심 정리

• 갈래 : 한문 소설, 풍자 소설

• 배경 : 17세기 중반, 서울을 중심으로 한 한반도 전역, 무인도, 장기(長岐, 일본의 나가사키)

• 성격 : 풍자적, 비판적

• 제재 : 허생의 기이한 삶

• 주제 : 무능한 사대부층에 대한 비판과 현실에 대한 각성 촉구

• 특징 : 

 ① 조선 후기 실학 사상이 반영됨.

 ② 당대의 사회 모순과 지배층을 비판하고 풍자함.

 ③ ‘빈 섬’을 통해 이상향의 구체적인 모습을 제시함.



■ 전체 줄거리

 남산 밑 묵적골(墨積洞)에 살며 책 읽기만 즐겨하던 가난한 선비인 허생은, 어느 날 생활고를 견디지 못한 아내의 질책을 듣고 장안의 부자인 변씨를 찾아가 만 냥을 빌린 후 과일과 말총을 매점 매석하여 큰돈을 번다. 이후 도적의 소굴로 찾아가 도적들을 설득한 뒤, 이들을 이끌고 미리 보아 둔빈 섬으로 들어가 농사를 지으며 살도록 한다.

이곳에서 농사와 무역을 통해 부를 축적한 허생은 자신의 이상국 건설 시험을 마친 뒤 섬에서 나와 나라 안의 빈민을 구제한다. 변씨의 이야기를 들은 이완 대장이 허생의 사람됨을 알고 찾아와 인재를 구할 방법을 묻는다. 이에 허생은 시사 삼책을 제시하지만, 이완 대장은 모두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허생은 지배층의 허례허식을 비판하면서 이완을 내쫓는다. 다음 날 허생은 자취를 감춘다.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열하일기(熱河日記)” ‘옥갑야화(玉匣夜話)’에 실린 한문 단편 소설로, 당대 사회 현실을 비판, 풍자한 것이다. ‘허생’이라는 인물을 내세워 당대의 무능한 사대부들을 비판하고, 선비 계층의 현실 인식과 그에 따른 과제를 제시하였다.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철학을 가진 박지원의 사상이 잘 드러난 작품이다.

  이 작품의 내용 요소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는 허생이 매점매석의 방법으로 부를 축적한 이야기, 둘째는 군도(群盜)를 이끌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이야기, 셋째는 이완과의 대화 장면이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작품은 연암 박지원의 실학 사상이 원숙한 경지에 도달하였을 때 쓰여졌다는 점과 그러한 실학 사상이 날카로운 현실 비판과 뚜렷한 이상향을 지향하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한 작품이다. 이 작품에 나타나는 몇 가지 일화들에는 연암의 사상이 잘 드러나 있다. 

 ‘허생전’은 부의 문제에 있어서 독점을 통해 축적의 폐해를 보여 주었다. 허생은 갑부 변씨에게 만 냥을 꾸어 매점매석한 결과 엄청난 돈을 벌게 된다. 이는 허생의 본심이 아니며, 이를 통한 부 축적이 결코 바람직하지 않음을 보여 주려고 했던 것이다. 또 허생은 군도(群盜)를 이끌고 무인도로 들어가 이상향을 건설하는데, 이것은 이상적인 공동체 건설을 시험해 본 것이다. 끝으로 허생은 이완 장군과의 대화에서 북벌론을 비판한다. 당시 사대부들의 편협성과 허위성, 인재 등용의 불합리성, 부도덕성을 대화를 통해 드러내 보여 주었다.

 - 윤희재, 전공 국어 참고


■ 작품 해설 3

 ‘허생전’은 ‘허생’이라는 영웅적 면모를 지닌 인물을 통해 당대 사회의 경제적 · 사회적 제도의 취약점과 모순, 지배 계층인 사대부의 무능과 허위의식을 풍자한 소설이다. 이 작품에서 허생의 행위는 크게 세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우선 허생은 매점매석을 통해 많은 돈을 버는데, 이러한 상행위를 통해 작가는 그 당시의 취약한 경제 구조뿐만 아니라 허례허식에 치우친 양반들을 풍자하고 있다. 두 번째는 허생이 군도를 이끌고 빈 섬으로 들어가는 행위이다. 이를 통해 지배층의 무능으로 말미암아 양민이 도둑이 될 수밖에 없는 사회 현실을 비판하면서, 빈민을 구제하기 위한 이용후생(利用厚生)의 실천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은 이완 대장과 만나 대화하는 것이다. 허생은 이완에게 부국강병(富國强兵)을 위한 인재 등용, 치욕을 씻기 위한 명나라 후예와의 결탁, 유학과 무역이라는 시사 삼책을 제시하지만, 양반 지배 계층을 대변하는 이완은 그것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이를 통해 작가는 의미 없는 북벌론만을 내세우는 무능한 양반 계층을 비판하고 있다. 이렇게 볼 때, 이 작품은 ‘허생’이라는 작가의 대리인을 내세워 현실 인식과 그에 대한 비판 의식을 드러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 천재교육, 지식백과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허생의 상(商)행위에 담긴 의미

 허생은 변 부자에게서 빌린 만 냥으로 과일과 말총을 사는데, ‘과일’은 주로 제사를 지낼 때 쓰고 ‘말총’은 양반들이 머리를 싸맬 때 사용하는 양반의 전유물이다. 허생이 과일과 말총을 매점매석함으로써 많은 돈을 벌 수 있었던 것은 양반들이 제사 같은 예도나 의관을 중요시하여 그런 물품값이 열 배로 뛰어올라도 그 값을 주고 사 갔기 때문이다. 허생의 이러한 상행위는 비록 비정상적인 것이지만, 허생의 말대로 겨우 만 냥으로 나라 안의 과일과 망건 값을 좌우했다는 것은 당시 경제 구조의 취약성과 양반들의 겉치레에 치중하는 허례허식을 보여 주는 것이다.


2. ‘이완 대장’을 등장시킨 이유

 이완은 임금의 신임을 받는 신하로, 집권층의 태도와 관점을 대변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런 만큼 집권층의 입장을 고려해야 했으므로 허생이 제시한 시사 삼책을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다. 작가는 이완이라는 인물을 설정해 명분만 앞세우는 당시 집권층의 무능과 북벌론의 허구를 비판하고자 한 것이다. 한편 이완은 역사적인 실존 인물로, 실존 인물을 작품에 끌어와 작품의 현실성을 높이고자 한 작가의 의도를 엿볼 수 있다.


3. ‘허생’이 사라진 이유

 당대 현실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가지고 있었던 허생은 현실을 개혁하고자 이완 대장에게 세 가지 계책을 제안한다. 그러나 대의명분을 중시하는 이완 대장이 제안을 거절하자 허생은 이튿날 종적을 감춘다. 이는 당시의 상황에서는 허생의 주장이 현실적으로 수용되기 어려운 급진적인 것이었음을 암시한다. 한편, 일반적인 고전 소설과는 다른 중심인물의 잠적이라는 미완의 결말 구조는 암시와 여운을 주어 허생의 이인(異人)다운 풍모를 강조하는 효과를 거두고 있다.


4. ‘허생전’에 반영된 당대 현실

 ① 정치 : 이완 대장과 같은 집권층에서 허구적인 북벌론을 내세우며 친명배청 정책을 펼침.

 ② 경제 

  *만 냥으로 과일과 말총을 매점매석할 수 있을 정도로 경제 구조가 취약함.

  *상업을 천시하고 교통 여건이 갖추어지지 못하여 경제가 발전하지 못함.

 ③ 사회 · 문화 

  *양반들은 아무리 비싸도 제사에 쓰이는 과일과 의관을 갖추기 위해 필요한 망건을 사는 등 허례허식에 얽매여 있음.

  *나라에 군도가 들끓고 백성들의 삶이 피폐함.

  *인재 등용이 올바르게 이루어지지 않음.


5. ‘허생전’ 창작의 시대적 배경

 이 작품이 창작된 18세기 후반은 중세에서 근대로 이행하는 역사적 전환기였다. 경제적으로 부의 축적과 집중화가 가속되면서 새로운 신분 계층이 생기고 사회 변동은 심화되었다. 사상적으로 성리학의 비현실성을 문제 삼아 실생활에 관심을 둔 실학이 꽃을 피우고 있던 시기였다.


6. 시사 삼책과 그 의미

 ① 인재 등용 강조 : 숨어 있는 인재를 널리 찾아 등용할 것.

  의미 : 인재 등용 제도의 문제점 지적 – 왕의 적극적인 노력 촉구

 ② 친명 정책의 확고한 지향 : 명의 유민 우대와 훈척의 부정 근절

  의미 : 배청 존명 의식의 허구성 비판 – 국정의 근본적 개혁 요구

 ③ 지피지기(知彼知己)전략 : 청나라와의 교류를 통한 청나라 문명의 적극적 수용

  의미 : 명분에 얽매인 비실리적 사고 비판 – 청의 문물 도입 주장


■ 작가 소개

박지원 – 두산 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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