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항사 - 박인로



■ 본문

 ㉮ 어리석고 세상 물정을 잘 모르기로는 나보다 더한 사람이 없다. / 길흉화복을 하늘에 맡겨 두고, / 누추한 거리 깊은 곳에 초가를 지어 두고, / 변화가 심한 날씨 탓에 썩은 짚이 땔감이 되어, / 세 홉 밥, 다섯 홉 죽에 연기도 많기도 많구나. / 설 데운 숭늉에 빈 배 속일 뿐이로다. / 살림살이가 이러하다고 대장부의 뜻을 바꿀 것인가. / 안빈낙도하겠다는 한결같은 마음을 적을망정 품고 있어, / 옳은 일을 좇아 살려고 하니 날이 갈수록 뜻대로 되지 않는다. / 가을이 부족한데 봄이라고 여유가 있을 것이며, / 주머니가 비었는데 술병이라고 한들 술이 담겨 있겠는가. / 빈곤한 인생이 천지간에 나뿐이겠는가.

 ㉯ 배고픔과 추위가 몸에 사무치게 절실하다고 해서 일편단심을 잊겠는가. / 의(義)에 분발하여 목숨을 돌보지 않고 죽고야 말겠노라고 생각하여, / 전대와 망태에 한 줌 한 줌 모아 넣고, / 전쟁(임진왜란) 5년 동안 죽고 말리라는 마음을 가지고 있어, / 주검을 밟고 피를 건너 몇 백 번의 전투를 치렀던가.

 ㉰ (이) 한 몸이 겨를이 있어서 한 집안을 돌보겠는가. / 늙은 종은 종과 주인 사이의 분수를 잊어버렸는데, / 나에게 봄이 왔다고 알려 주기를 어느 사이에 생각을 하겠는가. / 밭 가는 일은 종에게 물어보는 것이 마땅하지만 (종이 없으니) 누구에게 물어볼 것인가. / 몸소 농사를 짓는 것이 내 분수인 줄을 알겠도다. / 들에서 밭 갈던 늙은이와 밭두둑 위에서 밭 갈던 늙은이를 천하다고 할 사람이 없지마는 / 아무리 갈려고 한들 어느 소로 갈겠는가.

 ㉱ 가뭄이 이미 극심하여 농사철이 다 늦은 때에, / 서쪽 두둑 높은 논에 잠깐 지나가는 비에 / 길 위에 흘러가는 근원 없는 물을 반쯤만 대어 두고, / ‘소 한 번 빌려 주마.’하고 엉성하게 하는 말을 듣고, / 친절하다고 여긴 집에 달 없는 저녁에 허둥지둥 달려가서, / 굳게 닫은 문 밖에 우두커니 혼자 서서, 큰 기침으로 에헴 소리를 꽤 오래도록 한 후에, / “어, 거기 누구신가?” 묻기에 “염치없는 저올시다.”

 ㉲ “초경도 거의 지났는데 그 어찌 와 계십니까?” / “해마다 이러하기가 구차한 줄 알지마는, / 소 없는 가난한 집에 근심이 많아 왔습니다.” / “공짜로나 값을 치거나 간에 빌려 줄 만도 하다마는, / 다만 어젯밤에 건넛집 저 사람이 / 목 붉은 수꿩을 구슬 같은 기름이 끓어오르게 구워 내고, / 갓 익은 삼해주를 취하도록 권하였는데, / 이러한 은혜를 어찌 아니 갚겠는가? / 내일 소를 빌려 주마 하고 굳게 약속을 하였기에, / 약속을 어기는 것이 편하지 못하니 말하기가 어렵구료.” / 사실이 그렇다면 설마 어찌 하겠는가. / 헌 모자를 숙여 쓰고 축 없는 짚신을 신고 맥없이 어슬렁 물러나오니, / 풍채 작은 모습에 개가 짖을 뿐이로다. <중략>

 ㉳ 보잘것없는 이 몸이 무슨 소원이 있으랴마는, / 두세 이랑 되는 밭과 논을 다 묵혀 던져 두고, / 있으면 죽이요, 없으면 굶을망정, / 남의 집 남의 것은 전혀 부러워하지 않겠노라. / 나의 빈천함을 싫게 여겨 손을 내젓는다고 물러가며, / 남의 부귀를 부럽게 여겨 손짓을 한다고 오겠는가? / 인간의 어느 일이 운명 밖에서 생겼겠는가? / 가난해도 원망하지 않음이 어렵다고 하건마는, / 내 생활이 이러하되 서러운 뜻은 없노라. / 가난하게 살고 있지만 이것도 만족하게 여기고 있노라. / 평생의 한 뜻이 따뜻하게 입고 배불리 먹는 데에는 없노라. / 태평천하에 충효를 일 삼아, / 형제간에 화목하고 친구사이에 신의 있게 사귀는 것을 그르다고 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 그 밖의 나머지 일이야 타고난 대로 살겠노라.


■ 핵심 정리

• 갈래 : 가사

• 연대 : 광해군 3년(1611년)

• 성격 : 전원적, 사색적, 한정가

• 구성 : 서사, 본사, 결사의 3단 구성

• 제재 : 빈이무원(貧而無怨)의 삶

• 주제 : 빈이무원(貧而無怨)의 삶 추구, 산림에 묻혀 사는 선비들의 고절한 삶과 현실의 부조화

• 특징 : 

 ① 열거, 과장, 대구, 설의법 등의 표현법이 사용됨.

 ② 대화체를 사용하여 실생활 모습을 사실적으로 묘사함.

 ③ 농촌의 일상생활 어휘와 어려운 한자어가 혼재되어 사용됨.


■ 작품 해설 1

 이 작품은 이덕형이 작가의 근황을 묻자 그에 대한 답으로 지은 가사로, 임진왜란 이후의 곤궁한 삶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서사는 안빈일념의 이상과 시적 화자가 처한 궁핍한 생활상과의 괴리감을, 본사는 임진왜란 시 참전했던 일에 대한 회상과 전란 후에 돌아와 몸소 농사를 지으려고 이웃집에 소를 빌리러 갔다가 실패하고 농사짓기를 포기한 심회를 노래하였다. 결사에서는 먹고사는 생활의 문제 때문에 잠시 잊고 지낸 자연 친화의 삶을 다짐하며, 안빈낙도와 유교적인 덕목을 실행하며 사는 삶을 추구하고자 하는 의지를 드러내고 있다. 임진왜란 후의 궁핍한 현실과 사대부로서 지니는 이상적인 삶의 추구 사이에서 갈등하는 시적 화자의 모습을 통해 전란 후의 변화된 양반의 위상과 매정해진 세태를 보여주고 있다.

- 지학사 T-Solution 자료실 참고


■ 작품 해설 2

 이 노래는 이덕형이 찾아와 누항(陋巷) 생활의 어려움을 묻자 박인로가 이에 대한 답으로 지은 작품이다. 박인로의 누항은 세속의 생활을 영위해야 하는 곳이고, 밥을 끓이고 매운 연기를 맡아야 하는 곳이다. 이처럼 누항 깊은 곳에 초막을 지어 가난한 생활을 할 때에 추위와 배고픔으로 인한 어려움과 수치스러움은 크지만 그대로 누항에 묻혀 자연을 벗 삼아서 빈이무원(貧而無怨)하고 충효(忠孝)와 형제간의 우애, 친구 간의 신의를 저버리지 않겠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노래는 자연에 묻혀 사는 생활을 읊고 있다는 점에서는 조선 전기의 가사를 계승했다고 할 수 있지만 한편으로는 임진왜란 후의 어려운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렸다는 점에서는 조선 후기 장편 가사들의 출현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특히 이 작품은 표면에서 지금까지 가사에서는 쓰이지 않았던 일상 생활어를 구사하여 작품에 생동감과 구체성을 부여하는 탁월함을 보임으로써 후기 가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는 선구적 역할을 하였다.

 조선 전기의 가사가 주로 양반층에 의해 창작되었고 강호시가의 범주에 드는 작품들이 많으며 전반적으로 서정적인 경향이 강했던 것에 비해 조선 후기 가사는 작자층이 다양화되면서 작품 경향이 여러 방향으로 분화되고, 생활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작품들이 많아지는 변화가 나타났다. 이 작품은 바로 이와 같은 변화의 흐름을 뚜렷하게 보여준다는 점에서 문학사적으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 윤희재, 전공국어 참고


■ 심화 내용 연구

1. 시적 화자의 운명론적, 체념적 사고방식

  전란 후 시적 화자는 경제적으로 몰락한 현실에 처해 있지만, 부정적 상황을 극복하려고 노력하기보다는 ‘吉凶禍福(길흉화복)을 하날긔 부쳐두고’에서처럼 운명론적 사고를 드러내거나, ‘貧困(빈곤) 人生(인생)이 天地間(천지간)의 나이라.’에서처럼 현실에 대한 체념적 사고를 드러내고 있다.


2. ‘누항’의 의미

  ‘누항’은 “논어”에 나오는 말로 ‘가난 속에서도 학문에 힘쓰며 도를 추구하는 즐거움을 즐기는 공간’이라는 뜻으로 자주 사용된다. ‘누항사’에서도 ‘작가’는 ‘누항’이라는 제목을 통하여 자신이 추구하고자 하는 빈이무원(貧而無怨)과 안빈낙도(安貧樂道)의 삶을 드러내고 있다. 하지만 작가에게 ‘누항’은 보잘것없는 음식이라도 먹기 위해서는 다 썩어 가는 섶을 모아다 매운 연기를 맡아 가며 불을 피워야만 하는 힘겨운 삶의 공간이기도 하다. 결국 ‘누항사’에서 ‘누항’이란 선비로서의 고절한 삶을 살고자 하는 신념과 궁핍하고 가난한 현실의 부조화가 단적으로 드러나는 말이라고 할 수 있다.


3. ‘누항사’에 드러난 시적 화자의 한계

  화자는 전원에서 안빈낙도의 삶을 추구하였지만 경제적 궁핍으로 실행하지 못하고 현실적인 삶을 살아가려 했다. 하지만 현실적인 요건을 갖추지 못해 그마저도 실행으로 옮기지 못하고 다시 자연 친화와 유교적 충의 사상을 추구하려고 한다. 이는 변화된 조선 후기의 사회에서 설득력을 잃은 성리학적 이념을 지향하는 것으로 현실이 아닌 관념적 세계에 머물고 마는 시적 화자의 한계를 드러낸 것이다.


4. ‘누항사’에 드러난 전란 후의 사회상

  조선 전기의 엄격한 신분제 아래에서 존중되었던 양반의 권위는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점차 약화되고 경제적 여건에 따라 삶의 모습이나 위상이 달라지게 되었다. ‘누항사’에서 시적 화자는 양반임에도 불구하고 전란 후 경제적으로 몰락하여 직접 농사를 지어야만 하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시적 화자는 양반 사대부로서의 사회적인 지위를 보장받지 못할 뿐만 아니라 농사지을 소도 없을 정도로 가난하여 이웃의 평민 부자에게 소를 빌리러 갔다가 수모만 당한다. 이와 같이 ‘누항사’에는 임진왜란 후의 변화된 양반의 위상과 피폐해진 사회상이 구체적이고 사실적으로 드러나 있다.


5. ‘누항사’의 문학사적 의의

  가사는 3 · 4조(또는 4 · 4조)의 연속체 형식으로 조선 전기에는 사대부인 양반계층이 서정성을 바탕으로 자연 친화, 충효의 윤리, 안빈낙도 등 관념적인 내용을 주로 노래하였다. 조선 후기에는 현실에 관심을 가지게 되고, 작자층, 주제, 표현 방식 등이 다양해졌다. ‘누항사’에서 자연 속에서 안빈낙도하며 유교적 가치를 추구하고자 노래한 부분은 전기 가사의 특징을 띠고 있고, 임진왜란 후의 궁핍하고 힘든 현실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부분은 후기 가사의 특징을 담고 있다. 그러므로 ‘누항사’는 전기 가사에서 후기 가사로 넘어가는 과도기적 작품으로 볼 수 있다.


■ 작가 소개

박인로 – 두산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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