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규방에 일이 없어 백화보(百花譜)를 펼쳐 보니 / 봉선화 이 이름을 뉘라서 지었는고
신선의 옥피리 소리 선경(仙景)으로 행한 후에 / 규방에 남은 인연이 일지화(一枝花)에 머무르니
유약한 푸른 잎은 봉황(鳳凰) 꼬리가 넘노는 듯 / 태연자약 붉은 꽃은 신선(神仙) 옷을 펼쳤는 듯
백옥섬 깨끗한 흙에 촘촘히 심어 내니 / 춘삼월 지난 후에 향기 없다 웃지 마소
취한 나비 미친 벌이 따라올까 저어하네 / 정숙한 저 기상을 여자밖에 뉘 벗할꼬
옥난간 긴긴 날에 보아도 다 못 보아 / 사창(紗窓)을 반쯤 열고 계집종을 불러내어
다 핀 꽃을 캐어다가 수(繡) 상자에 담아 놓고 / 바느질 그친 후에 안채에 밤이 깊어 촛불이 밝았을 제
나옴나옴 바로 앉아 흰 구슬 가루로 갈아 / 빙옥(氷玉) 같은 손 가운데 난만히 개어 내어
파사국 저 제후의 홍산호를 펼쳤는 듯 / 심궁 풍류(風流) 절구에 도마뱀을 빻았는 듯
섬섬옥수 열 손가락에 수실로 감아 내니 / 종이 위에 붉은 물이 희미하게 스미는 양
미인의 얕은 뺨에 붉은 이슬 어리는 듯 / 단단히 봉한 모양 비단 옥자(玉字) 편지 한 통 서왕모에게 부치는 듯
춘면을 늦게 깨어 차례로 풀어 놓고 / 거울을 앞에 두고 눈썹을 그리려니
난데없는 붉은 꽃이 가지에 붙었는 듯 / 손으로 잡으려니 분분이 흩어지고
입으로 불려 하니 안개 섞여 가리었다 / 동무를 서로 불러 낭랑히 자랑하고
꽃 앞에 나아가서 두 빛을 비교하니 / 쪽잎에서 나온 물이 쪽빛보다 푸르단 말 이 아니 옳을쏜가
은근히 풀을 매고 돌아와서 누웠더니 / 녹의홍상(綠衣紅裳) 한 여자가 표연히 앞에 와서
웃는 듯 찡그리는 듯, 사례하는 듯 하직하는 듯 / 몽롱하게 잠을 깨어 정녕히 생각하니
아마도 꽃 귀신이 내게 와 하직했는가 / 방문을 급히 열고 꽃 수풀을 살펴보니
땅 위에 붉은 꽃이 가득히 수놓았다 / 암암히 슬퍼하고 낱낱이 주워 담아 꽃다려 말 붙이네
그대는 한치 마소. 시세 연년에 꽃빛은 의구(依舊)하니 / 하물며 그대 자취 내 손톱에 머물렀지
동산의 도리화는 편시춘(片時春)을 자랑 마소 / 이십 번 꽃바람에 적막하게 떨어진들 뉘라서 슬퍼할꼬
규중에 남은 인연이 그대 한 몸뿐이로세 / 봉선화 이 이름을 뉘라서 지었는고 / 일로 하여 지었어라
■ 핵심 정리
․ 갈래 : 규방가사, 내방가사
․ 성격 : 낭만적, 서정적, 예찬적, 여성적
․ 제재 : 봉선화 물들이기
․ 주제 : 봉선화를 통해 담은 여인의 아름다운 정회, 봉선화에 대한 여인의 정서
․ 특징 :
① 의인법, 직유법 등이 사용됨
② 문답법을 통해 내용을 전개함
③ 시간의 흐름에 따라 시상을 전개함
④ 여성들의 일상사와 여성들의 섬세한 감각으로 밝은 생활의 정서를 나타냄
⑤ 비유적 표현을 사용하여 봉선화를 대하는 정감이 섬세하게 표현됨
⑥ 백화보에서 봉선화를 보고 봉선화의 아름다움을 예찬함
■ 작품 해설
작자·연대 미상의 가사. 형식은 4음 4보격 무한 연속체라는 가사의 율격을 대체로 충실히 지켰으되, 2음보를 추가하여 6음보로 늘어난 행이 몇 군데 보인다. 필사본인 ≪정일당잡지 貞一堂雜識≫에 수록되어 있다. 진술 양식은 일인칭시점의 독백체 서술로서 주관적인 감흥을 서정적 양식에 담아 노래하였다.
어떤 이는 이 작품이 허난설헌(許蘭雪軒)의 문집에 들어 있는 <염지봉선화가 染指鳳仙花歌>·<선요 仙謠>·<선사 仙詞>·<광한전백옥루상량문 廣寒殿白玉樓上梁文> 등의 일부 구절과 일치하는 대목이 있고, 시상(詩想)이나 시경(詩境)이 비슷하다는 점을 들어 조선 중기의 여류시인 허난설헌의 작품으로 단정한 바 있다.
그러나 <봉선화가>와 이들 허난설헌의 작품 사이의 유사성은 그 소재나 극히 짧은 일부 구절에 한정된 것이다. <광한전백옥루상량문> 중에 “춘라 비단에 옥자를 써서 서왕모를 맞이하고(春羅玉字邀王母)”라는 구절과 <봉선화가>의 “춘라 옥자 일봉서를 왕모의게 부텻난닷”이 같은 화소(話素)이다. 또 <동선요 洞仙謠>의 “자주 퉁소소리 가락 속에 붉은 구름 흩어지면(紫簫聲裏彤雲散)”이란 구절은 <봉선화가>의 “진유의 옥소소래 자연으로 행한 후에”와 유사하다. 이러한 부분적 유사성은 동일작가뿐 아니라 상이한 작가 사이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날 수 있는 현상이다.
한편 <봉선화가>는 시종일관 봉선화로 물들인 아름다운 손톱의 묘사로 전개되고 있다. 반면, <염지봉선화가>는 봉선화를 단지 여인의 장식물이나 여인의 한·원망·그리움의 투영으로 보지 않고 하나의 살아 있는 개체로서 깊이 있는 생각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인다. 이와 같이 전체 구조상의 유사성이 없는 한 동일작가로 추정하는 견해는 타당성이 없다.
더욱이 허난설헌의 유고(遺稿)를 정리하여 출간한 허균(許筠)은 그의 문집에서 정철(鄭澈)의 <사미인곡>·<권주사 勸酒辭> 등의 가사 작품은 높이 평가한 바 있다. 이에 반해, 그의 누이의 가사 저작 여부에 대해서는 일체 언급이 없다는 점을 유의하지 않을 수 없다.
작품의 내용은 먼저 화자(話者)가 봉선화를 대하게 된 연유와 봉선화라는 이름의 유래, 봉선화의 아름다움과 향기 없음, 춘삼월에 봉선화를 심는 일 등 봉선화라는 제재의 주변적 사실로부터 시작된다.
이어서 긴긴 여름날 여공(女工)을 모두 끝낸 밤에 일하는 아이와 함께 봉선화로 손톱에 물들이는 모습과 그 과정을 노래했다. 다음날 거울 앞에서 눈썹을 그리려 하니 거울 속에 꽃이 만발한 듯한 아름다움과 꽃 앞에 나아가 그 아름다운 빛을 비교하는 모습을 그렸다.
마지막으로 잠깐 눈을 붙인 사이에 한 여인이 나타나 웃는 듯 찡그리는 듯, 사례하는 듯, 하직하는 듯함을 본다. 잠을 깨어 생각하니 꽃귀신일 것 같아 급히 꽃수풀로 나가본다. 땅 위에 붉은 꽃이 가득히 수놓아졌음을 보고 꽃밭에 떨어진 봉선화의 운명을 애석히 여기면서도, 다른 꽃과 달리 여인의 손톱 위에 오래 남아 그 절조를 나타냄을 강조했다.
<봉선화가>는 <규원가 閨怨歌>와 더불어 허난설헌이 지었다는 전제 아래 ‘규방가사(閨房歌辭)’의 첫 작품으로 그 중요성이 인정되어 왔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 작품의 작자가 허난설헌이 아니라는 관점에서 그러한 견해를 부정하기도 했다.
또한, 이 작품이 교술적인 계녀가(誡女歌) 계통에서 거리가 먼 점, 음수율이 4·4조보다 3·4조가 우세한 점, 시작과 종결의 형식, 어휘구사의 방식 등에서 영남지방을 중심으로 한 규방가사와는 상당히 다른 것으로 파악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입장에서는 단지 꽃을 대상으로 한 언어 유희라는 점과 자기 탄식에 그친 노래라는 점에서 양반가사에 귀속시키려고 하였다. 그 밖에 이 가사의 문학적 성격 면에서 차라리 규방가사가 아닌 일반가사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주장도 나왔다.
그러나 이 노래의 후반부에 여인의 섬세한 감정이 잘 드러나 있고, 조선시대 여인들의 정서생활을 모티프로 하고 있는 점, 깊은 규중에 갇혀 화초를 벗삼아 꿈을 키우던 여인의 상황을 잘 표현해주고 있다는 점에서 규방가사의 중요한 한 자리를 차지함을 부인할 수 없다. 이와는 또 다른 작자 미상의 <봉선화가>와 <화가 花歌> 등 많은 꽃노래가 있는데, 이 노래는 이러한 계통의 가사 중 원형적 작품으로 주목된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참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