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 김광규



■ 본문

4․19가 나던 해 세밑 / 우리는 오후 다섯시에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고 / 불도 없는 차가운 방에 앉아

하얀 입김 뿜으며 / 열띤 토론을 벌였다

어리석게도 우리는 무엇인가를 / 정치와는 전혀 관계없는 무엇인가를

위해서 살리라 믿었던 것이다

결론 없는 모임을 끝낸 밤 / 혜화동 로터리에서 대포를 마시며

사랑과 아르바이트와 병역 문제 때문에 / 우리는 때 묻지 않은 고민을 했고

아무도 귀 기울이지 않는 노래를 /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노래를

저마다 목청껏 불렀다

돈을 받지 않고 부르는 노래는 / 겨울밤 하늘로 올라가

별똥별이 되어 떨어졌다

그로부터 18년 오랜만에 / 우리는 모두 무엇인가가 되어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어 / 넥타이를 매고 다시 모였다

회비를 만 원씩 걷고 / 처자식들의 안부를 나누고

월급이 얼마인가 서로 물었다

치솟는 물가를 걱정하며 / 즐겁게 세상을 개탄하고

익숙하게 목소리를 낮추어 / 떠도는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모두가 살기 위해 살고 있었다

아무도 이젠 노래를 부르지 않았다

적잖은 술과 비싼 안주를 남긴 채 / 우리는 달라진 전화번호를 적고 헤어졌다

몇이서는 포커를 하러 갔고 / 몇이서는 춤을 추러 갔고

몇이서는 허전하게 동숭동 길을 걸었다

돌돌 말은 달력을 소중하게 옆에 끼고 / 오랜 방황 끝에 되돌아온 곳

우리의 옛사랑이 피흘린 곳에 / 낯선 건물들 수상하게 들어섰고

플라타너스 가로수들은 여전히 제자리에 서서 / 아직도 남아 있는 몇 개의 마른 잎 흔들며

우리의 고개를 떨구게 했다

부끄럽지 않은가 / 부끄럽지 않은가

바람의 속삭임 귓전으로 흘리며 / 우리는 짐짓 중년기의 건강을 이야기했고

또 한 발짝 깊숙이 늪으로 발을 옮겼다 


■ 핵심 정리

․ 갈래 : 자유시, 서정시

․ 성격 : 회상적, 서사적, 반성적

․ 어조 : 자신의 삶을 성찰하는 어조

․ 제재 : 소시민적인 삶

․ 주제 : 소시민적 삶에 대한 부끄러움과 반성, 젊음을 상실한 것에 대한 자괴감과 현실적 순응에 대한 부끄러움

․ 특징 : 

 ① 평범한 일상어를 사용하여 현실적 생동감을 주고 있음

 ② 구체적 체험에서 얻어진 내용을 담고 있어 독자에게 감동을 줌

 ③ 서사적인 진술을 통해 과거와 현재의 삶의 모습을 대비시킴


■ 작품 해설 1

 이 시는 과거에서 현재로 시간이 흐름에 따라 순수함과 열정을 잃어 가는 소시민의 삶을 다루고 있다. 4․19혁명이 일어나던 무렵의 화자는 혈기와 순수로 이상을 추구했지만 18년이 지나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로 변했고, 화자처럼 변해버린 동창들과의 만남은 ‘열띤 토론’이 없는 ‘떠도는 이야기’의 장이 되어 버렸다. 화자는 ‘플라타너스 가로수’가 제공하는 사람에 대한 반성의 시간도 저버릴 만큼 ‘늪’과 같은 생활에 익숙해져 있다. 이러한 화자의 모습에서 맹목적으로 현실에 순응하여 살아가는 중년 소시민의 의식 구조를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유명한 노래의 제목이기도 한 이 시의 제목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그렇게 이미 지나가 버려 기억의 흔적만 남은, 다시는 돌아갈 수 없는 젊은 날의 열정과 순수에 대한 아련한 그리움과 슬픔을 느끼게 한다.

- 윤희재, 전공국어 참고


■ 작품 해설 2

 이 시는 중년에 이른 시적 화자가 18년 전(사일구 혁명 즈음)의 순수했던 자신을 돌이켜 보면서 스스로를 반성하는 이야기를 담고 있다. 시적 화자는 젊음 시절에는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신념과 꿈을 가졌지만 이제는 단지 현실에 순응해서 사는 소시민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여기서 그는 지난 날의 삶과 현재적 삶을 대비하면서 지금의 자신의 모습을 반성하고 있다. 이 시에서 4·19 혁명 당시 친구들과 함께 나누었던 열띤 토론, 그 혁명의 열기를 시인은 ‘옛사랑’이라고 표현한 것이고 세월이 흐른, ‘그로부터 18년’이 지난 지금은 ‘혁명이 두려운 기성 세대가 되었기’ 때문에 그 혁명의 열기는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로 남아 있게 된 것이다.

  이 시의 구성은 1연에서 청년기의 열정적인 혁명의 열기를, 2연에서는 이와 대조적으로 혁명이 두려운 중년기의 기성 세대를 대비시키고 있다. 그럼으로써 잃어버린 혁명의 순수함에 대한 회고를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시의 화자는 부정과 불의에 항거하여 정의를 부르짖던 4·19 세대로, 18년의 세월이 흐른 뒤 이제는 변화를 두려워하는 기성 세대가 되어 현실에 안주하며 소시민으로 살아가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있다. 그러면서도 그런 현실에 순응하고 살아갈 수밖에 없음을 고백하고 있다. 이와 같은 시상 종결 방식에서 맹목적일 만큼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중년 소시민의 의식 구조를 엿볼 수 있다. 이 시는 일정한 이야기가 담겨 있는 서사적 구조의 형식을 가지고 있다. 그 속에서 인물은 내적 갈등을 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고민은 고민으로 끝날 뿐이지 어떤 대안을 제시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여기서 시인의 한계를 보면서 그 한계로 인하여 인간의 삶을 다시금 성찰하게 하고, 흘러 가버린 세월 저편의 젊은 시절을 되새김으로써 아련한 슬픔을 느끼게 하는 문학적 매력을 또한 발견할 수 있다.


■ 심화 내용 연구

1. 시상의 전개

 1행~19행 : 4․19혁명이 나기 전 열정에 들뜬 젊은 날의 모습을 회상

 20행~37행 : 18년의 세월이 흐른 후 중년의 나이가 되어 소시민으로 다시 만난 현재의 모습

 38행~39행 : 변화한 모습에 대한 시민의 반성과 상념


2.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시적 화자

 이 시의 시적 화자는 ‘나’가 아니라 ‘우리’이다. 시인은 자신을 포함한 4.19 세대 모두가 부끄러움과 허탈감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라고 보고 ‘나’라는 개별적 화자 대신에 ‘우리’라는 공동의 화자를 내세웠을 것이다. 우리가 우리에게 이야기할 때 화자와 청자 사이의 거리감이 소실되며, 이 시를 읽는 독자들까지 우리의 하나로 흡수되는 효과가 나타난다. 말하자면 삶의 순수성과 진실성을 상실한 채 하루하루의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이 시의 화자이자 청자가 되는 것이다. 그 결과 이 시는 시인을 포함한 우리 모두에게 스스로를 돌아보게 하는 반성의 지평을 마련해 준다.(출처 : 이승원,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


3.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의 제목

 이 시의 제목인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는 원래 외국 가요를 국내에서 번안한 것이다. 시인은 대중들에게 널리 알려진 노래의 제목을 시의 제목으로 채택함으로써 이 시가 껴안고 있는 기성 세대라든가 소시민 계층에 대한 회한의 심정을 독자들에게 효과적으로 전달될 수 있도록 하였다. 또한 ‘희미한 옛사랑의 그림자’라는 제목 자체에서 이미 지나가 버려 다시는 돌아올 수 없는 젊은 날의 열정과 추억에 대한 안타까운 그리움과 아련한 슬픔을 지니게 한다.


4. ‘어리석음’의 중의적 의미

 젊음은 순수하다. 그래서 동시에 무모하리 만큼의 낙관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어리석음은 이 시의 화자에게 비난의 대상이라기보다는 아련한 그리움으로 다가온다.


5. ‘바람의 속삭임’의 역할

 시적 화자가 걷고 있는 길은 오래 전에 자신들이 혁명을 노래했던 곳이다. 세월이 흐른 뒤 오랜만에 그 길을 걸으면서 시적 화자는 젊은 시절의 순수와 열정을 잃어버린 채 살고 있는 현재의 삶에 부끄러움을 느낀다. 그 때나 지금이나 제자리에 서 있는 플라타너스의 마른 잎이 흔들리는 소리가 시적 화자에게 이런 부끄러움을 환기시키는 것이다. ‘바람의 속삭임’은 과거와 현재를 이어주며, 시적 화자에게 반성의 계기를 만들어 준다. 그러나 시적 화자는 이를 외면하고 만다.

 이 시에서 ‘늪’은 소시민적 삶, 정신적 죽음, 헤어나기 어려운 속된 삶 등의 함축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 작가 소개

김광규 – 한국현대문학대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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