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덕기는 조부의 꾸지람이 다른 데로 옮아간 틈을 타서 사랑으로 빠져나왔다. 머리가 텁수룩하고 꼴이 말이 아니라는 조부의 말눈치로 보아서 김병화가 온 것이 짐작되었다. “야 —그러지 않아도 저녁 먹고 내가 가려 했네.” 덕기는 이틀 만에 만나는 이 친구를 더욱이 내일이면 작별하고 말 터이니만큼 반갑게 맞았다. “자네 같은 부르주아가 내게까지! 자네가 작별하러 다닐 데는 적어도 조선은행 총재나…….” 병화는 부옇게 먼지가 앉은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딱 버티고 서서, 이렇게 비꼬는 수작을 하고서는 껄껄 웃어 버린다. “만나는 족족 그렇게도 짓궂이 한마디씩 비꼬아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겠나? 그 성미를 좀 버리게.” 덕기는 병화의 ‘부르주아, 부르주아.’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먹을 게 있는..
■ 본문 일청 전쟁(日淸戰爭)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이 떠나가는 듯하더니, 그 총소리가 그치매 사람의 자취는 끊어지고 산과 들에 비린 티끌뿐이라. 평양성 외 모란봉에 떨어지는 저녁볕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저 햇빛을 붙들어매고 싶은 마음에 붙들어매지는 못하고 숨이 턱에 닿은 듯이 갈팡질팡하는 한 부인이 나이 삼십이 될락말락하고, 얼굴은 분을 따고 넣은 듯이 흰 얼굴이나 인정 없이 뜨겁게 내리쪼이는 가을볕에 얼굴이 익어서 선앵둣빛이 되고, 걸음걸이는 허둥지둥하는데 옷은 흘러내려서 젖가슴이 다 드러나고 치맛자락은 땅에 질질 끌려서 걸음을 걷는 대로 치마가 밟히니, 그 부인은 아무리 급한 걸음걸이를 하더라도 멀리 가지도 못하고 허둥거리기만 한다. 남이 그 모양을 볼 지경이면 저렇게 어여쁜 젊은 여편네가 술 먹고..
■ 줄거리 "눈이 내리는군요." 버스 안. 검정 외투 속에 고개를 웅크리고 창 쪽으로 앉아 있는 늙은 대학생 김씨의 말에, "예, 진눈깨빈 데요." 하고 말한 것은 세무서 주사 이씨였다. 그는 멋내는 것을 좋아하여 하얀 목도리에 밤색 잠바 차림이었다. "뭐? 아, 진눈깨비! 참 그렇군." 하고 그들 뒤에서 말한 것은 털실로 짠 감색 고깔 모자를 귀밑에 푹 눌러쓴 박씨였다. 그는 군대 기피자로서 국교 선생을 사직했다. 박씨 곁 창문 쪽에는 살찐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외투 속에 웅크리고 있는 김씨는 진눈깨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신용산에서 입대할 때도 진눈깨비가 내렸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입대할 사람은 약 스무 명이었는데, 환송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태극기도 없었으며, 진눈깨비..
■ 줄거리 칠복이는 어려서 부모를 잃고 머슴처럼 일하며 커서 도시 물을 먹은 순덕이와 결혼한다. 댐 건설 때문에 자신이 갈던 땅이 물에 잠기게 되자 순덕이의 제안으로 광주로 나가게 된다. 농사일 외에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던 칠복은 아내가 식당일을 하며 벌어 온 돈으로 생활하다가 농사품을 팔러 시골에 다녀온다. 반 년 동안 집을 떠나 품을 팔다 온 칠복은 아내의 불륜을 목격하게 되고 순덕이는 줄행랑을 친다. 칠복이는 순덕이를 찾아 나서지만 찾지 못하고 어린 딸과 함께 고향인 방울재로 다시 돌아온다. 고향으로 돌아온 그는 징을 애지중지하여 한시도 놓지 않고 지내며 정신이 온전치 못할 때에는 징을 마구 울려 낚시꾼들을 방해하고 몰매를 맞는 사고를 친다. 낚시꾼과 관광객을 상대로 매운탕집을 하며 생계를 이어가..
■ 줄거리 1980년대 후반 어느 해 봄 수요일. ‘나’는 한 통의 전화를 받는다. 전화 속 목소리는 25년 전 고향 친구인 은자였다. 은자는 어린 시절 ‘나’의 단짝 동무로 찐빵 가게 딸이었는데 노래를 잘 불렀다. 은자는 신문사에서 ‘나’의 전화번호를 알아냈다며 작가인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그리고는, 현재 부천의 나이트클럽에서 노래를 부르고 있다며 ‘나’에게 꼭 놀러 오라고 한다. 강남에 카페를 개업할 예정인데 이번 일요일까지만 여기서 노래할 것이므로 그 안에 자신을 찾아오라는 것이다. ‘나’는 은자의 전화로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 기억의 한복판에 있는 은자와 고향의 큰오빠를 생각한다.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어린 나이에 가장이 되어 생계를 도맡아 꾸려 갔던 큰오빠. 큰오빠는 그 시절 우리들의 든..
■ 줄거리 만수네 단칸방에서 사는 ‘나’는 추운 겨울 밤 만수 외삼촌으로부터 ‘흥안령 저쪽 이야기’를 듣게 된다. 그것은 우리들로 하여금 더욱 넓은 세계로 통하게 한 이야기였다. 몽골에 간 만수 외삼촌은 어느 집에서 묵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만난 일본인, 집주인과 함께 세상 이야기를 하던 중 개 짖는 소리를 듣는다. 주인은 이리 떼가 나타났다며, 이리 떼는 총격을 받으면 미친 듯이 달려드는 습성이 있어 국경을 지키던 군인 셋이 죽은 경우가 있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일본인은 ‘대일본 제국 신민의 솜씨’를 보여 주겠다며 권총을 빼들고 집을 나선다. 만수 외삼촌과 몽골인 주인은 어서 돌아오라고 외쳐대는데, 잠시 후 몇 발의 총성과 함께 주위가 조용해진다. 그 다음날 아침 집주인은 만수 외삼촌에게 검붉은 피와..
■ 줄거리 ‘나’는 초겨울 추운 밤 행랑아범의 흐느끼는 소리를 들었다. 그 해 가을에 아범은 아내와 어린 계집애 둘을 데리고 행랑채에 들어와 살았는데, 극심한 생활고로 아홉 살 난 큰애를 굶기는 것보다 낫다는 생각으로 어느 연줄로 강화로 보냈다는 어멈의 말을 듣고 아범이 슬피 울었던 것이다. 어느 날 화수분(아범)은 형이 발을 다쳤다는 소식을 듣고 추수하러 혼자서 고향 양평으로 떠난다. 어멈은 쌀 말이라도 해 가지고 올 것을 기다렸으나 추운 겨울이 되도록 아범은 돌아오지 않는다. 기다리다 못해 어멈은 어느 추운날 어린 것을 업고 아범이 있는 곳으로 길을 떠난다. 그 후 어느 날, ‘나’는 출가한 여동생 S로부터 그들의 뒷 이야기를 전해 듣는데 그 내용은 이렇다. 화수분의 아내가 남편을 찾아 양평으로 떠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