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앞부분의 줄거리] 평양의 한 학교에서 조선어를 가르치는 친구인 ‘박’의 편지를 받고 십여 년 만에 평양에 온 ‘현’은 부벽루에서 대동강의 풍경을 보며 감회에 젖는다. ― 내 시간이 반이 없어진 것은 자네도 짐작할 걸세. 편안하긴 허이. 그러나 전임으론 나가 주고 시간으로나 다녀 주기를 바라는 눈칠세. 나머지 시간이라야 그리 오래 지탱돼 나갈 학과 같지는 않네. 그것마저 없어지는 날 나도 그때 아주 손을 씻어 버리려 아직은 지싯지싯 붙어 있네.하는 사연을 읽고는 갑자기 박을 가 만나 주고 싶었다. 만나야만 할 말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손이라도 한번 잡아 주고 싶어 전보만 한 장 치고 훌쩍 떠나 내려온 것이다. 정거장에 나온 박은 수염도 깎은 지 오래어 터부룩한 데다 버릇처럼 자주 찡그려지는 비웃..
■ 본문주요 부분 사람들은 남편은 뛰어난 인재라고 했다. 능히 천하를 경영할 재주가 있다고 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남편이 죽는지 사는지 아내가 모르고, 아내가 죽는지 사는지 남편이 몰라야만 뛰어난 인재가 되는 거라면 그 뛰어난 인재라는 말은 분명 이 세상에서 쓸모없는 존재라는 뜻이리라. 이 세상이 돌아가는 법칙이란 성현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렇게 복잡하고 어려운 것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며, 자식을 낳고, 그 자식에게 보다 좋은 세상을 살도록 해 주는 것, 그것 말고 무엇이 있을 수 있겠는가? 어머니는 죽고 서모는 살아남았다. 난 판단할 수 없다. 어머니는 죽어 잠시 칭송받았는지 모르나 서모는 살아남아 자식들을 키우고 집안을 돌보았다. 지금도 청안에서 윤복이의 뒤를 봐주고 있는 것이다. ..
■ 본문 이번에는 조심해서 도끼를 쳐든 도섭 영감이 고개를 돌려 자기 동네 사람들의 얼굴을 더듬기 시작했다. 모가 선 눈이었다. 왜들 미리 일러 준 대로 쟁기를 안 드느냐는 것이었다. 이 눈에 마주쳐 강 목수와 칠성이 아버지가 쟁기를 들었다. / 개털 오버 청년이 다시, “동무들! 조금두 주저할 게 없소. 동무들으 자유를 구속할 사람은 여기 한 사람두 없소. 어서 손을 드시오. 만일 우물쭈물하다가 반동에 가담했다는 불명예스런 누명을 써서는 앙이 되오!” / 차차 눈치를 보아 가며 쟁기를 드는 사람이 늘어 갔다. “잘 알았소!” / 청년은 크게 한 번 고개를 끄덕이고는, “그러믄 이 반동 지주 박용제를 우리 민주 발전으 방해물로 규정짓는 데 반대하는 사람이 있으믄 손을 드오!” / 그리고 휙 모여 선 사람..
■ 본문주요 부분 다음 날 아침 일찍 안이 나를 깨웠다. “그 양반,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안이 내 귀에 입을 대고 그렇게 속삭였다. “예?” 나는 잠이 깨끗이 깨어 버렸다. “방금 그 방에 들어가 보았는데 역시 죽어 버렸습니다.” “역시…….” 나는 말했다. “사람들이 알고 있습니까?” “아직까진 아무도 모르는 것 같습니다. 우선 빨리 도망해 버리는 게 시끄럽지 않을 것 같습니다.” “사실이지요?” “물론 그렇겠죠.” 나는 급하게 옷을 주워 입었다. 개미 한 마리가 방바닥을 내 발이 있는 쪽으로 기어오고 있었다. 그 개미가 내 발을 붙잡으려고 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서 나는 얼른 자리를 옮겨 디디었다. 밖의 이른 아침에는 싸락눈이 내리고 있었다. 우리는 할 수 있는 한 빠른 걸음으로 여관에서 멀어..
■ 본문 구보는 갑자기 걸음을 걷기로 한다. 그렇게 우두머니 다리 곁에 가 서 있는 것의 무의미함을 새삼스러이 깨달은 까닭이다. 그는 종로 거리를 바라보고 걷는다. 구보는 종로 네거리에 아무런 사무(事務)도 갖지 않는다. 처음에 그가 아무렇게나 내어놓았던 바른발이 공교롭게도 왼편으로 쏠렸기 때문에 지나지 않는다. 갑자기 한 사람이 나타나 그의 앞을 가로질러 지난다. 구보는 그 사내와 마주칠 것 같은 착각을 느끼고, 위태롭게 걸음을 멈춘다. 그리고 다음 순간, 구보는, 이렇게 대낮에도 조금의 자신을 가질 수 없는 자기의 시력을 저주한다. 그의 코 위에 걸려 있는 24도의 안경은 그의 근시를 도와주었으나, 그의 망막에 나타나 있는 무수한 맹점(盲點)을 제거하는 재주는 없었다. 구보는, 2주일간 열병을 앓은 ..
■ 본문주요 부분 그날도 기표는 담임 선생의 지시에 의해 체육부실에 내려가 우리 반 아이들의 체력 검사 통계를 내고 있었다. 그럴 시각 담임 선생이 말했다. “66명이 탄 우리 배는 순풍을 맞아 참으로 순탄한 항해를 하고 있다. 다 여러분의 노력에 의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한 가지 알려 줄 게 있다. 여러분의 한 친구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그 자세한 얘기는 반장이 해 줄 것이다. 다만 담임으로서 당부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남의 일 아닌 내 일이라고 생각해서 그 사람을 돕는 일에 앞장서 주기 바란다.” 담임 선생님이 교단에서 내려서고 그 대신 반장 임형우가 사뭇 엄숙한 표정으로 단 위에 섰다. “담임 선생님의 말씀처럼 지금 우리 친구 하나가 매우 어려운 처지에 놓여 있다. 좀 늦은 감이..
■ 본문 아침에 깨어 보니 온 누리엔 수북하게 첫눈이 내렸는데, 대문 옆 블록 담 위에 웬 흰 남자 고무신짝 하나가 얌전하게 놓여 있었다. 얼마 안 신은 듯한 거의 새 고무신짝이었다. / 아내와 나는 다 같이 께름칙한 느낌에 휩싸였다. / “웬일일까. 누가 장난을 했나.” / 내가 일부러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중얼거리자, / “아무리, 장난으로 저랬을라구요.” / 아내는 어쩐지 뾰루퉁해지면서 말하였다. 아내는 현대 여성이어서라기보다는 본시부터 이런 일에는 대범한 편이었는데, 요즘 조금은 나를 닮게 된 모양이었다. 사실은 이런 일에는 내 쪽에서 훨씬 소심하고 예민한 편이어서 아내는 이런 나를 어지간히 구질구질하게 여겨 왔던 것이다. 간밤에도 근처 어느 집에서 굿을 하는 듯, 꽹과리 소리가 요란했다. 텔레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