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 만기(萬基) 치과 의원에는 원장인 서만기 씨와 간호원 홍인숙 양 외에도 거의 날마다 출근하다시피 하는 사람 둘이 있다. 그 한 사람은 비분강개파 채익준 씨요, 다른 한 사람은 실의의 인간 천봉우 씨다. 두 사람은 다 같이 서만기 원장의 중학교 동창생이다. 그들은 도리어 원장보다도 먼저 나와서 대합실에 자리 잡고 신문을 읽고 있는 날도 있었다. 더구나 채익준은 간호원보다도 일찍 나오는 수가 많았다. 큼직한 미제 자물쇠가 잠겨 있는 출입문 앞에 버티고 섰다가 간호원이 나타날 말이면, “미스 홍, 오늘은 나에게 졌구려.” / 익준은 반가운 낯으로 맞이하는 것이었다. 그런 날은 인숙이가 아침 청소를 하는 데 한결 편했다. 한사코 말려도 익준은 굳이 양복저고리를 벗어부치고 소매까지 걷고 나서서 거들어 주..
■ 본문 주요 부분 돌아서서 마스트를 올려다본다. 그들은 보이지 않는다. 바다를 본다. 큰 새와 꼬마 새는 바다를 향하여 미끄러지듯 내려오고 있다. 바다. 그녀들이 마음껏 날아다니는 광장을 명준은 처음 알아본다. 부채꼴 사북까지 뒷걸음질 친 그는 지금 핑그르르 뒤로 돌아선다. 제정신이 든 눈에 비친 푸른 광장이 거기 있다. 자기가 무엇에 홀려 있음을 깨닫는다. 그 넉넉한 뱃길에 여태껏 알아보지 못하고, 숨바꼭질을 하고, 피하려 하고 총으로 쏘려고까지 한 일을 생각하면, 무엇에 씌었던 게 틀림없다. 큰일 날 뻔했다. 큰 새, 작은 새는 좋아서 미칠 듯이, 물속에 가라앉을 듯, 탁 스치고 지나가는가 하면, 되돌아오면서, 그렇다고 한다. 무덤을 이기고 온, 못 잊을 고운 각시들이, 손짓해 부른다. 내 딸아. ..
■ 본문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아니나 다를까, 재봉틀을 돌리던 어머니의 불호령이 떨어졌다. 바깥채 가겟방으로 이사를 온 뒤 어머니는 옆방 사람 눈치를 볼 필요가 없었으므로 큰 몸집만큼이나 그 목소리가 늘 컸다. “이 썩어 빠진 늠의 자슥아! 니가 부잣집 파틴지 잔친지 그 짓 보아 놓으모 그기 중학교 들어가는 시험에 나온다 카더나? 잘 처묵고 잘사는 사람 그 돈놀음 잔치 본다고 니한테 무슨 이득이 돌아오겠노! 저 얼비를 내가 장자라 믿고 이래 눈 팔아 키우모 난중에 무신 덕을 보겠다꼬…….” / 어머니의 목소리에 물기가 섞여 있었다. “자, 잘몬했습니더.” / 주눅이 든 내 목소리가 떨렸다. “기름진 음식 많이 묵어 배창자 터져 죽을 그 부자들 파티 구경이나 하고 평생 그 밑구녕 닦아 주는 종노릇이나 하모..
1. 본문 이렇게 비 내리는 날이면 원구(元求)의 마음은 감당할 수 없도록 무거워지는 것이었다. 그것은 동욱(東旭) 남매의 음산한 생활 풍경이 그의 뇌리를 영사막처럼 흘러가기 때문이었다. 빗소리를 들을 때마다 원구에게는 으레 동욱과 그의 여동생 동옥(東玉)이 생각나는 것이었다. 그들의 어두운 방과 쓰러져 가는 목조 건물이 비의 장막 저편에 우울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비록 맑은 날일지라도 동욱 오뉘의 생활을 생각하면, 원구의 귀에는 빗소리가 설레고 그 마음 구석에는 빗물이 스며 흐르는 것 같았다. 원구의 머릿속에 떠오르는 동욱과 동옥은 그 모양으로 언제나 비에 젖어 있는 인생들이었다. 동욱의 거처를 왕방하기 전에 원구는 어느 날 거리에서 동욱을 만나 저녁을 같이한 일이 있었다. 동욱은 밥보다도 먼저 술을..
■ 본문주요 부분 “고 서방, 당신은 또 뭘 하러 왔소? 작년 것도 못 다 내고서 또 무슨 낯으로 여기 오우?” 매섭게 꼬집었다. 그리고 그는 다시 장부를 뒤적거리면서 하던 일을 계속했다. 일행은 허탕을 치고 밖으로 나왔다. 그리고 며칠 뒤, 저수지 밑 고 서방의 논을 비롯하여 여기저기에, 그예 입도 차압(立稻差押)의 팻말이 붙기 시작했다. 농민들은 알아보지도 못하는 그 차압 팻말을 몇 번이나 들여다보고, 또 들여다보았다. — 피땀을 흘려 가면서 지은 곡식에 손도 못 대다니? 그들은 억울하고 분하기보다, 꼼짝없이 이젠 목숨을 빼앗긴다는 생각이 앞섰다. 고 서방은 드디어 야간 도주를 하고 말았다. “이렇게 비가 오는데 그 어린것들을 데리고 어디로 갔을까?” 이튿날 아침, 동네 사람들은 애 터지는 말로써 그..
■ 본문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차중에서 생긴 일이다. 나는 나와 마주 앉은 그를 매우 흥미 있게 바라보고 또 바라보았다. 두루마기 격으로 기모노를 둘렀고, 그 안에서 옥양목 저고리가 내어 보이며, 아랫도리엔 중국식 바지를 입었다. 그것은 그네들이 흔히 입는 유지 모양으로 번질번질한 암갈색 피륙으로 지은 것이었다. 그리고 발은 감발을 하였는데 짚신을 신었고, 고부가리로 깎은 머리엔 모자도 쓰지 않았다. 우연히 이따금 기묘한 모임을 꾸미는 것이다. 우리가 자리를 잡은 찻간에는 공교롭게 세 나라 사람이 다 모였으니, 내 옆에는 중국 사람이 기대었다. 그의 옆에는 일본 사람이 앉아 있었다. 그는 동양 삼국 옷을 한 몸에 감은 보람이 있어 일본 말로 곧잘 철철대이거니와 중국 말에도 그리 서툴지 않은 모양이었다..
■ 본문주요 부분 그러나 요새로 와서 나의 신경은 점점 흥분하여 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을 보면 적개심이라든지 반항심이라는 것은 보통 경우에 자동적 · 이지적이라는 것보다는 피동적 · 감정적으로 유발되는 것인 듯하다. 다시 말하면, 일본 사람은 지나치는 말 한마디나 그 태도로 말미암아 조선 사람의 억제할 수 없는 반감을 끓어오르게 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그것은 결국에 조선 사람으로 하여금 민족적 타락에서 스스로를 구하여야 하겠다는 자각을 주는 가장 긴요한 원동력이 될 뿐이다. 촌뜨기는 차차 침이 괴어 오는 수작이다. “그러나 밑천이 아주 안 드는 것은 아니지요. 우선 얼마 안 되지만 보증금을 들여놓아야 하고, 양복이나 한 벌 장만하여야 할 터이니까……. 그러나 당신이야 형님이 헌병대에 계시다니까 신분..
■ 본문앞부분의 줄거리 공사판을 떠돌아다니는 영달은 공사가 중단되자 어디로 갈 것인가를 생각하며 방황한다. 그리고 현장 사무소가 문을 닫을 즈음에 밀린 밥값을 내지 않고 도망치다가, 고향인 삼포로 가는 정 씨를 만나게 된다. 두 사람은 함께 삼포로 가는 기차를 타려고 감천으로 가던 중 술집에서 도망친 백화를 만난다. 백화는 처음에 두 사람을 경계하지만 자신과 비슷한 처지라는 것을 알고 서서히 마음을 연다. 아직 초저녁이 분명한데 날씨가 나빠서인지 곧 어두워질 것 같았다. 눈은 더욱 새하얗게 돋보였고, 사위는 고요한데 나무 타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감옥 뿐 아니라, 세상이란 게 따지면 고해 아닌가…….”정 씨는 벗어서 불 가에다 쬐고 있던 잠바를 입으면서 중얼거렸다. “어둡기 전에 어서 가야지.”그들은 ..
■ 본문주요 부분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별로 복잡한 내용이랄 것도 없는 장부를 마저 꼼꼼히 확인해 보고 나서야 늙은 역장은 돋보기안경을 벗어 책상 위에 놓고 일어선다. 벌써 삼십 분이나 지났군. 출입문 위쪽에 붙은 낡은 벽시계가 여덟 시 십오 분을 가리키고 있다. 하긴 뭐 벌써라는 말을 쓰는 것도 새삼스럽다고 그는 고쳐 생각한다. 이렇게 작은 산골 간이역에서 제시간에 정확히 도착하는 완행열차를 보기가 그리 쉬운 일은 아님을 익히 알고 있는 탓이다. 더구나 오늘은 눈까지 내리고 있지 않은가. 역장은 손바닥을 비비며 창가로 다가가더니 유리창 너머로 무심히 시설을 던진다. 건널목 옆 외눈박이 수은등이 껑충하게 서서 홀로 눈을 맞으며 희뿌연 얼굴로 땅바닥을 내려다보고 있다. 송이눈이다. 갓난아이의 주먹만..
■ 본문다 촌장님은 이리가 무섭지 않으세요?촌장 없는 걸 왜 무서워하겠니?다 촌장님도 아시는군요?촌장 난 알고 있지.다 아셨으면서 왜 숨기셨죠? 모든 사람들에게, 저 덫을 보러 간 파수꾼에게, 왜 말하지 않는 거예요?촌장 말해 주지 않는 것이 더 좋기 때문이다.다 거짓말 마세요, 촌장님! 일생을 이 쓸쓸한 곳에서 보내는 것이 더 좋아요? 사람들도 그렇죠! ‘이리 떼가 몰려온다.’ 이 헛된 두려움에 시달리는데 그게 더 좋아요?촌장 얘야, 이리 떼는 처음부터 없었다. 없는 걸 좀 두려워한다는 것이 뭐가 그렇게 나쁘다는 거냐? 지금까지 단 한 사람도 이리에게 물리지 않았단다. 마을은 늘 안전했어. 그리고 사람들은 이리 떼에 대항하기 위해서 단결했다. 그들은 질서를 만든 거야. 질서, 그게 뭔지 넌 알기나 하니..
■ 본문(공산토월) “몰라보겄네, 되게 컸어.” 그는 내 손을 잡고 여러 차례나 힘지게 흔들었다. 그래도 내 입에서는 아무 말도 새어나오지 않고 있었다. 요즘도 나는 하루 열댓 번 이상 헛손질하듯 하며 형식적인 악수를 자주 하고 살지만, 또 앞으로도 매양 그러기가 쉽지만, 그때 해 봤던 그 석공과의 악수만은 언제까지라도 못 잊어할 것임을 스스로 믿는다. 그것은 내가 생전 처음 처자를 거느린 어른하고 악수를 해 본 최초의 경험이라는 한 가지 뜻만으로도 그렇다. 그는 얼굴이 허옇게 쇠었다는 겉보매 외에 조금도 달라진 데가 보이지 않았다. 어느 결에 그는 내 손을 뿌리치듯 물리고는 불쑥 내 뒤로 튕겨져 나갔다. 그리고 두 손이 발등에 닿도록 허리를 굽혀 절하고 있었다. 우리 어머니가 석공의 어깨를 쓰다듬으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