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본문[앞부분의 줄거리] 작가인 ‘나’의 고향 친구 유재필은 그 성품이 본받을 만한 데가 있어 ‘나’는 그를 ‘유자’라고 부른다. 대기업 총수의 운전기사로 일하던 그는 우연한 사건으로 총수의 미움을 사 그룹의 교통사고를 처리하는 노선 상무로 좌천된다. 그는 운전자의 운전 윤리에 누구보다도 반듯하였다. 그러므로 운행 중에 때 아닌 곳에서 과속으로 앞지르기를 하거나, 옆에서 끼어들어 진로 방해를 하거나, 차선을 함부로 넘나들거나, 신호등이 바뀌기 전부터 앞으로 나가지 않는다고 뒤에서 경적을 울려 대거나, 운전 상식이나 도로 질서에 도전하는 자를 보면, 매양 혼잣말처럼 중얼거리기를 잊지 않았다. “츤헌늠…… 저건 아마 즤 증조할애비는 상전덜 뫼시구 가마꾼 노릇 허구, 할애비는 고등계 형사 뫼시는 인력거꾼 노..
■ 본문 [앞부분의 줄거리] 화가인 ‘나’는 혜인의 이별 통보를 무기력하게 받아들일 뿐 그녀와의 관계는 별 진전을 보이지 않는다. 의사인 형이 소설을 쓰기 시작한 것은 형이 수술하던 한 소녀의 죽음으로 인해 정신적인 타격을 입은 다음부터이다. 소설에서 형은 6·25 전쟁 중에 동료를 살해한 경험에 대해 그리고 있다. 형의 소설은 끝이 달라져 있었다. 형은 내가 쓴 부분을 잘라 내고 자신이 끝을 맺어 놓은 것이었다. 형의 경험은 이 소설 속에서 얼마만큼 사실성을 유지하고 있는지는 모른다. 혹은 적어도 이 끝부분만은 형의 완전한 픽션인지도 모른다. 형은 나의 추리를 완전히 거부해 버린 것이었다. ‘나’는 관모가 나타날 때까지 동굴을 들락날락하고만 있다. 드디어 관모는 동굴까지 올라왔다. 그 얼굴이 어둠 속에..
■ 본문 흰 눈이 쌓인 산록(山麓)의 바람 소리가 시리다. 그것은 바로 사형 집행장에서의 일임에 틀림없다. 나는 권총 사격에 몇 점, 카빈에 몇 점, 엠원 소총에는 몇 점 하는 명사수의 하나로, 나의 소속 부대에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나 자신이 이 사형 집행의 사수로 지명될 줄은 몰랐다. 또 그렇게 달갑지도 않은 일이다. 더욱이 일단 지명된 이상에는 피해 낼 도리가 없다. 아무도 이런 일을 선두에 서서 하겠다고 좋아하는 사람은 없다. 그것도 전기장치로 된 집행장에서 단추 하나를 누르면 보이지 않는 곳에서 기계가 스스로 모든 일을 처리하여 주는 경우라면 몰라도, 이런 경우는 따분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나는 전에 형무소에서 사형을 집행하는 관리들의 고역을 상상해 본 일이 있다. 그럴 때마..
■ 본문 동이 앞에 막아서면서부터 책망이었다. 걱정두 팔자요 하는 듯이 빤히 쳐다보는 상기된 눈망울에 부딪힐 때, 결김에 따귀를 하나 갈겨 주지 않고는 배길 수 없었다. 동이도 화를 쓰고 팩하게 일어서기는 하였으나 허 생원은 조금도 동색하는 법 없이 마음먹은 대로는 다 지껄였다. 어디서 줏어먹은 선머슴인지는 모르겠으나 네게도 아비어미 있겠지. 그 사나운 꼴 보면 맘 좋겠다. 장사란 탐탁하게 해야 되지, 계집이 다 무어야. 나가거라, 냉큼 꼴 치워. 그러나 한마디도 대거리하지 않고 하염없이 나가는 꼴을 보려니, 도리어 측은히 여겨졌다. ▶충줏집과 농탕치는 동이의 따귀를 올려붙인 후 동이에게 연민을 느끼는 허 생원 거나해짐을 따라 계집 생각보다도 동이의 뒷일이 한결같이 궁금해졌다. 내 꼴에 계집을 가로채서는..
■ 본문 날이 밝자 또 걸었다. 어제보다도 쉬는 도수가 잦아 갔다. 김 일등병도 군복 바지와 군화마저 벗어 버렸다. 맨발로 산길을 걷기가 힘든다는 걸 모르는 바 아니었다. 하지만 우선 신발이 천근만근 무겁게 여겨져 견딜 수가 없는 것이었다. 여기저기 발바닥이 터져 피가 내배었다. 그렇다고 돌부리 아닌 고운 땅만 골라 밟을 수만도 없었다. 한결같이 눈에 뵈는 것은 인가 아닌 산봉우리와 계곡의 움직임 없는 굴곡뿐이요, 귀에는 그처럼 갈망하고 있는 아군의 폿소리 대신 한없이 먼 데까지 퍼져 나간 고즈넉함과 김 일등병의 몰아쉬는 거칠은 숨소리뿐이었다. 그래도 주 대위는 온 신경을 귀로 모으고 있었다. 어떤 색다른 소리나마 놓치지 않으려는 것이다. 한번은 주 대위가 저리 가 물을 마시고 가자고 했다. 김 일등병은..
■ 본문 응칠이가 이 동리에 들어온 것은 어느덧 달이 넘었다. 인제는 물릴 때도 되었고, 좀 떠보고자 생각은 간절하나 아우의 일로 말미암아 망설거리는 중이었다. 그는 오라는 데는 없어도 갈 데는 많았다. 산으로 들로 해변으로 발부리 놓이는 곳이 즉 가는 곳이다. ▶응칠의 떠도는 생활 그러나 저물면 그대로 쓰러진다. 남의 방앗간이고 헛간이고 혹은 강가, 시새장. 물론, 수가 좋으면 괴때기 위에서 밤을 편히 잘 적도 있었다. 이렇게 하여 강원도 어수룩한 산골로 이리 넘고 저리 넘고 못 간 데 별로 없이 유람 겸 편답하였다. 그는 한구석에 머물러 있음은 가슴이 답답할 만치 되우 괴로웠다. 그렇다고 응칠이가 본시 역마직성이냐 하면 그런 것도 아니다. 그도 오 년 전에는 사랑하는 아내가 있었고 아들이 있었고 집도..
■ 본문 사흘 뒤에 성기가 다시 절에서 내려오니까, 체 장수 영감은 마루 위에서 막걸리를 마시고 있고, 계연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마루 끝에 걸터앉아 있었다. 머리를 감아 빗고 새 옷 — 새 옷이래야 전날의 그 항라 적삼을 다시 빨아 다린 것 — 을 갈아입고, 조그만 보따리 하나를 곁에 두고, 슬픔에 잠겨 있던 계연은, 성기를 보자 그 꽃같이 선연한 두 눈에 갑자기 기쁨을 띠며 허리를 일으켰다. 그러나 바로 그다음 순간, 그 노기를 띤 듯한 도톰한 입술은 분명히 그들 사이에 일어난 어떤 절박하고 불행한 사실을 전하고 있었다. 막걸리 사발을 들어 영감에게 권하고 있던 옥화는 성기를 보자, “계연이가 시방 떠난단다.” 대번에 이렇게 말했다. 옥화의 말을 들으면, 영감은 그날, 성기가 절로 올라가던 날, 저녁..
■ 본문 버스가 산모퉁이를 돌아갈 때 나는 ‘무진(Muijn 10km)’라는 이정비(里程碑)를 보았다. 그것은 옛날과 똑같은 모습으로 길가의 잡초 속에서 튀어나와 있었다. 내 뒷좌석에 앉아 있는 사람들 사이에서 다시 시작된 대화를 나는 들었다.“앞으로 십 킬로 남았군요.”“예, 한 삼십 분 후엔 도착할 겁니다.”그들은 농사 관계의 시찰원들인 듯했다. 아니 그렇지 않은 지도 모른다. 그러나 하여튼 그들은 색무늬 있는 반소매 셔츠를 입고 있었고 데드롱직(織)의 바지를 입었고 지나쳐 오는 마을과 들과 산에서 아마 농사 관계의 전문가들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관찰을 했고 그것을 전문적인 용어로 얘기하고 있었다. 광주(光州)에서 기차를 내려서 버스를 갈아탄 이래, 나는 그들이 시골 사람들답지 않게 낮은 목소리로 점..
■ 본문 별안간 초봉이가, / “다들 가거라 이놈들아!”하고 목청이 터지게 외치면서 미친 듯 뛰쳐 일어서던 것이다. 그 서슬에 송희를 문턱 안에다가 내동댕이를 쳤고, 그래 아이가 불에 덴 듯이 까무러치게 울고 해도 초봉이는 모르는 모양이다. 눈에서는 닿으면 베어질 듯 파랗게 살기가 쏟쳐 나온다. 아드득 깨물어 뜯은 아랫입술에서는 검붉은 피가 한 줄기 조르르 흘러내려 턱으로 또렷하게 줄을 긋는다. 풀머리를 했던 쪽이 흐트러져 머리채가 한 가닥 어깨 앞으로 넘어와서 치렁거린다. 그다지 고르고 곱던 바탕이 간곳없고, 보기 싫게 사뭇 삐뚤어진 얼굴은 터질 듯 경련을 일으켜 산 고깃덩이같이 씰룩거린다. 이는 여느 우리 인간의 눈이나 얼굴이기보다도 생명을 노리는 적에게 바투 몰려 어디고 침침한 막다른 골로 피해 들..
■ 본문 덕기는 조부의 꾸지람이 다른 데로 옮아간 틈을 타서 사랑으로 빠져나왔다. 머리가 텁수룩하고 꼴이 말이 아니라는 조부의 말눈치로 보아서 김병화가 온 것이 짐작되었다. “야 —그러지 않아도 저녁 먹고 내가 가려 했네.” 덕기는 이틀 만에 만나는 이 친구를 더욱이 내일이면 작별하고 말 터이니만큼 반갑게 맞았다. “자네 같은 부르주아가 내게까지! 자네가 작별하러 다닐 데는 적어도 조선은행 총재나…….” 병화는 부옇게 먼지가 앉은 외투 주머니에 두 손을 찌른 채 딱 버티고 서서, 이렇게 비꼬는 수작을 하고서는 껄껄 웃어 버린다. “만나는 족족 그렇게도 짓궂이 한마디씩 비꼬아 보아야만 직성이 풀리겠나? 그 성미를 좀 버리게.” 덕기는 병화의 ‘부르주아, 부르주아.’ 하는 소리가 듣기 싫었다. 먹을 게 있는..
■ 본문 일청 전쟁(日淸戰爭)의 총소리는 평양 일경이 떠나가는 듯하더니, 그 총소리가 그치매 사람의 자취는 끊어지고 산과 들에 비린 티끌뿐이라. 평양성 외 모란봉에 떨어지는 저녁볕은 뉘엿뉘엿 넘어가는데, 저 햇빛을 붙들어매고 싶은 마음에 붙들어매지는 못하고 숨이 턱에 닿은 듯이 갈팡질팡하는 한 부인이 나이 삼십이 될락말락하고, 얼굴은 분을 따고 넣은 듯이 흰 얼굴이나 인정 없이 뜨겁게 내리쪼이는 가을볕에 얼굴이 익어서 선앵둣빛이 되고, 걸음걸이는 허둥지둥하는데 옷은 흘러내려서 젖가슴이 다 드러나고 치맛자락은 땅에 질질 끌려서 걸음을 걷는 대로 치마가 밟히니, 그 부인은 아무리 급한 걸음걸이를 하더라도 멀리 가지도 못하고 허둥거리기만 한다. 남이 그 모양을 볼 지경이면 저렇게 어여쁜 젊은 여편네가 술 먹고..
■ 줄거리 "눈이 내리는군요." 버스 안. 검정 외투 속에 고개를 웅크리고 창 쪽으로 앉아 있는 늙은 대학생 김씨의 말에, "예, 진눈깨빈 데요." 하고 말한 것은 세무서 주사 이씨였다. 그는 멋내는 것을 좋아하여 하얀 목도리에 밤색 잠바 차림이었다. "뭐? 아, 진눈깨비! 참 그렇군." 하고 그들 뒤에서 말한 것은 털실로 짠 감색 고깔 모자를 귀밑에 푹 눌러쓴 박씨였다. 그는 군대 기피자로서 국교 선생을 사직했다. 박씨 곁 창문 쪽에는 살찐 젊은 여자가 앉아 있었다. 외투 속에 웅크리고 있는 김씨는 진눈깨비가 내리는 것을 보면서, 자기가 신용산에서 입대할 때도 진눈깨비가 내렸었다는 사실을 생각하고 있었다. 입대할 사람은 약 스무 명이었는데, 환송 나온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태극기도 없었으며, 진눈깨비..